169화 알고 있는 비밀, 알지 못하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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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알고 있는 비밀, 알지 못하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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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알고 있는 비밀, 알지 못하는 비밀
2022.07.17.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타인은 물론이고 본인도 믿지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약하고, 제 이득만 챙기며,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만 의리와 인정을 입에 올리는 생물이다. 전생에서의 숱한 경험을 통해 체득한 교훈이었다.
유니콘 같은 인간 개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니콘은 드물기에 유니콘이다. 그녀가 아는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비텔리는 현명하고, 판단이 빠르며,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것과는 별개로,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카루소 대표님은 원래 시동을 회의에 재석시키시나요?”
카루소 대표는 의외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집무실의 문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처음 아리아드네를 안내해 주었던 시동이 눈을 크게 뜬 채 시립해 있었다. 본인에게 불똥이 튄 것에 놀랐는지 놀란 얼굴이었다.
“똘똘해 보이네요. 전 돈 셀 손이 필요해요. 당분간 빌려주시겠어요?”
외부인에게 금전의 출납을 맡기지는 않는다. 그것이 푼돈이 아니라 두카토 금화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건 핑계다.
“……예? 이 아이를?”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카루소 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동도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설마 제가 못된 짓이라도 하겠어요?”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높였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의 날개 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르칠 거에요. 몸 성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카루소 대표는 시동과 시선을 교환했다.
뒤에 서 있던 주세페는 고개를 갸웃, 숙였다. 아리아드네는 산 카를로 전체에서도 다시 찾기 힘들 정도로 좋은 주인이지만 수하의 의사를 저렇게까지 고려해주지는 않는다. 뭐지? 저 시동이 누리는 이토록 훌륭한 업무 환경은?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시동과의 시선 교환을 마친 카루소 대표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잘 가르쳐 주신다니 저희로서는 영광입니다. 목걸이는 오늘 두고 가시는 것이지요?”
“네. 보안은 물론이고, 외부로 소문이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하게 신경 써 주십시오.”
그녀는 주변을 쓱 훑었다. 집무실 내부의 구성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목걸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 대표님, 그리고 이 방 안에 있는 주세페와 우리 시동, 총 네 명뿐입니다.”
“…….”
“어디서 말이 샜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이니 절 실망하게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신용은 상인의 생명입니다.”
“믿습니다.”
간명하게 대답한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자정까지 금화로 3000 두카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금 논의한 내용은 계약서로 준비해 놓을 테니 자정에 오셔서 서명하시지요.”
“저희 측에서도 한 부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얼떨결에 마주 악수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손은 가냘픈 체구의 16세 소녀답지 않게 아주 단단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이만.”
그녀는 대표에게 인사하고 시동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눈은 기대감 7할과 두려움 3할이 뒤섞여 빛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소년과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었다.
“넌 지금 나를 따라오렴.”
* * *
카루소 대표의 집무실에 ‘푸른 심해의 심장’을 놓아둔 대신 그의 시동을 대동하고 대표의 집무실을 떠난 아리아드네는 중정에서 자신의 호위 인원들을 모두 물렸다. 요란하게 보카네그로 상회의 본점 건물을 떠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에 올랐다.
“아가씨, 어떻게 되셨어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산차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잘 됐어.”
“이 아이는 누구예요?”
깔끔한 의복을 갖춰 입고 있는 갈색 쇼트커트의 소년이었다.
“우리 인질.”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농담이었지만 소년은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예? 시동 같아 보이는데, 시동을 인질로요?”
시동은 하인들 중 똘똘하고 용모가 좋은 소년을 골라서 쓴다. 운이 좋다면 그 자리를 오래 지키다가 장차 주인의 오른팔이 되어 고용주의 가장 중요한 사업을 돕겠지만, 시원치 않다면 내일 당장 갈려도 이상하지 않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별반 없는 것이다.
“내가 아주 악당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인걸.”
아리아드네는 기분 좋게 웃고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산차의 의문은 데 마레 대저택에 돌아오고 난 뒤에야 풀렸다.
“산차. 우리 손님께 3층의 서쪽 윙에 손님방을 하나 내주렴.”
“서쪽 윙이요? 아가씨, 그쪽은 여자 고용인들이 기거하는 쪽인데요. 아무리 어리다손 치더라도 남자를 들일 수는 없어요!”
아리아드네가 데 마레 대저택에 처음 왔을 때 묵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집의 딸이 쓸만한 방은 아니었지만, 가정교사나 하녀장 같이 좋은 대접을 받는 여성 사용인들이 쓰는 독방이 3층 서쪽 윙에 있었다.
예전에 루크레치아의 가난한 친척들이 장기로 방문할 때도 여성은 그쪽 방을 내어주었다.
“맞아. 여자들이 쓰는 쪽이라서 내주라고 한 거야.”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네 진짜 이름이 뭐니? 비텔리 양.”
시동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난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둘러대지 않아도 돼. 본명을 대는 게 불편하면 대충 불리고 싶은 이름을 대.”
시동은 잠시 머뭇대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소용없다는 생각이 이르렀다. 저 여자는 신에게 맞닿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시동은 결국 자신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페트루치아 비텔리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산차에게 시동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페트루치아 비텔리. 카루소 비텔리 대표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야.”
그녀는 소년, 아니 소녀에게 눈을 접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 잘 부탁해, 페트루치아 양.”
* * *
페트루치아를 발견한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행운이었다. 아리아드네 일행을 맞이하는 페트루치아 비텔리를 본 순간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는 섬광이 번득였다.
‘이 아이다!’
1137년, 아리아드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보카네그로 상회와 카루소 대표는 에트루스칸 전역에서 비교할 상대가 없는 대표 상회로 승승장구했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 대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라나고 있었지만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후계 문제였다.
보카네그로 상회는 길드를 기반으로 한 일반적인 상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카루소 대표 1인을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단지도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카루소 대표의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후계자로 삼아 상회를 물려줘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어려서부터 상회로 데려와 일을 가르친 ‘조카’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카루소 대표와 조카 사이의 관계가 특별히 각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근(@군)거렸다. 저거, 조카가 아니라 사생아라고.
그러다가 1137년에 갑자기 카루소 대표의 ‘조카’인 ‘페데리코 비텔리’에 대한 루머가 산 카를로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실 ‘페데리코 비텔리’는 조카나 사생아가 아니라 정실의 몸에서 본 친자식이며, 남자가 아니라 여자, 그러니까 친딸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일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확인을 못 했는데.’
섭정공의 약혼녀 아리아드네는 언니에게 패해 서쪽 탑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온갖 방계들과 상회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다 덤벼들어서 뜯어먹으려고 들었었지.’
여자에게 상회를 넘겨줄 수 없다, ‘페데리코’를 결혼시켜서 페데리코의 남편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야 한다, 얌전히 시집이나 보내고 부대표에게 넘겨라, 아예 부대표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 운운.
‘난장판이었는데.’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는 똘똘해 보였다. 보카네그로 상회는 이전보다 더욱 빨리 클 것이다. 이번에 어떻게 될지는 시간을 두고 보면 될 일이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1137년을 넘길 작정이었으니까.
* * *
라리에사 대공녀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왕궁에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리에사는 무른 어머니에게 매달려 자기도 왕궁에 따라가면 안 되냐고 졸랐다.
“음, 네 아버지께서 널 가급적 집 안에 두라고 하셨지만, 아직 에트루스칸 왕자님도 도착하시기 전이니 괜찮지 않으려나…….”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언제나처럼 허락하자, 라리에사의 만면에 희색이 어렸다.
대공비는 왕가의 방계 부인들과 함께 왕궁 내의 미사당에서 기도를 올린 후, 오후에는 오귀스트 공주가 주최하는 티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필리프 4세는 아직 반려자가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안주인 노릇은 그의 여동생인 오귀스트 공주가 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전 오귀스트 언니랑 잠깐 놀다 올래요!”
“그런데 오귀스트 공주님의 일정을 모르지 않니. 폐를 끼치면 어쩌지…….”
“아이, 참. 엄마는! 내가 그렇게 눈치 없어 보여요? 언니가 바쁘시면 바로 돌아올게요.”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자기 딸이 눈치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오귀스트 공주가 내쫓기야 하겠어, 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친척인걸. 그녀는 결국 딸의 청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그래서 지금 라리에사 대공녀는 희희낙락하며 미사당에 기도를 하러 간 베르나데트 대공비와 떨어져 오귀스트 공주의 처소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몽펠리에 궁의 시종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고, 라리에사는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님!”
그녀를 발견한 오귀스트 공주의 시녀가 놀라며 인사했다.
“오늘 공주 전하를 만나러 오실 일정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잠깐 언니 계시나 들르러 왔네. 공식 티파티 전에 얼굴이나 보려고. 언니는 안에 계시나?”
“잠시만 응접실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공주님께서 시간이 비시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라리에사는 익숙한 응접실로 안내되어 아름다운 소파에 착석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실이나 서재에 들어가고 싶은데.’
오귀스트 공주의 신변에 변화가 있다면—새로 남편을 맞이한다던가—그 증거는 남들을 맞이하는 응접실에는 없을 것이다.
안쪽에 있겠지. 라리에사는 공주의 측근 시녀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듣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옷방에 쌓여 있는 새 드레스 같은 것이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주변을 쓱 살피며 일어나 응접실과 안쪽 처소를 연결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 “……하는 게 싫어.”
‘!’
오귀스트 공주의 그 측근 시녀의 대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언니 목소리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귀를 쫑긋 세운 체 체통도 잊고 문에다가 귀를 댔다.
- “국혼 준비, 벌써부터 해야 해? 성사될지 안 될지도 모르잖아.”
- “공주마마, 하지만 국왕 폐하께 성의 표시는 하셔야지요.”
- “나는 싫다고.”
- “그건 공주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좋은 인상이라도 남기세요. 미리부터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면 필리프 4세 폐하께서 뿌듯해하실 겁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역시, 역시 그랬어!
오귀스트 공주가 알폰소 왕자의 국혼 상대가 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러운 배신자 오귀스트! 겉으로는 위해 주는 척, 나의 행운을 축하해주는 척했으면서 뒷구멍으로는 ‘황금의 왕자님’을 채가려는 협잡꾼!
라리에사 대공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절대로 뺏기지 않을 것이었다. 상대가 오귀스트건 필리프 4세이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황금의 왕자님’은 내 것이야!’
흰자위가 빨갛게 충혈된 라리에사 대공녀는 이를 악물고 오귀스트 공주의 응접실에서 뛰쳐나갔다. 저 악랄한 배신자와는 단 1분 1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리에사 대공녀는 오귀스트 공주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
“난 그 여자가 국혼을 위해 갈리코 왕국에 오는 게 싫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