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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70화 (170/733)

<제170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오해

오귀스트 공주는 입을 삐죽이며 자신의 소맷단을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피부에 색이 옅은 백금발을 가진 공주였다.

이목구비는 모두 작고 섬세하게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신경질적인 인상이 있었다.

“공주마마, 국왕 폐하의 국혼은 마마께서 막으실 수 있는 게 아니옵니다. 폐하께옵서도 후계자를 얻으셔야지요.”

오귀스트 공주의 예쁜 미간이 불만으로 주름졌다.

“그렇지만 왜 꼭 그 여자여야 해? 갈리코 사람도 많고, 신분이 문제라면 군주의 혈통을 이은 북쪽 사람들도 있잖아. 난 프리노약 산맥 남쪽에서 오는 것들은 안 믿어.”

“그게 국익에 보탬이 되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녀는 오귀스트 공주를 달랬다.

“공주마마, 상대는 나이도 어리고 제대로 사교계에 데뷔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아무리 그 나라 사람들이 쓸데없이 콧대가 높아 갈리코 왕국을 촌스럽다고 무시한다고는 하지만, 그 여자는 수도 출신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라 기준으로는 시골 여자지요. 감히 대 갈리코 왕국 수도 몽펠리에의 한 떨기 꽃이신 공주마마를 무시할 수 있을 리가요”

오귀스트 공주의 꼭 다물린 입매가 조금 풀렸다. 시녀는 다짐하듯이 다시 한번 반복했다.

“외국인이 몽펠리에 왕궁에 와서 왕비가 되더라도 절대 공주마마를 거스르지는 못할 겁니다. 친정도 제대로 없다면서요.”

“그치⋯⋯?”

“그럼요. 게다가 공주마마께서는 국왕 폐하의 성심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 오라비가 좀 까다롭기는 하지.”

필리프 4세의 변덕스러운 성정은 가까운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국왕이 하나뿐인 여동생을 각별히 아낀다는 점도 몽펠리에 궁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둘째 오빠인 루이 왕자를 쳐내고 큰오빠인 필리프에 대한 무한 충성을 바쳤다.

“국왕 폐하께서 공주마마를 총애하시는 것은 몽펠리에 궁전 사람이라면 모두가 압니다. 그 외국인 여자도 눈이 달렸다면 공주님을 하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귀스트 공주는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분이 안 풀린 듯했다.

“우리 오라버니는, 다른 여자가 필요하지 않아.”

그녀는 앙다문 입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오라버니를 가장 잘 아는 건 나야.”

* * *

누군가의 열렬한 기대와 냉정한 무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에트루스칸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는 6월 초순의 어느 날, 팔레 드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전하 납시오!”

전령의 알림과 함께 몽펠리에 궁전의 정문에 들어선 알폰소 왕자는 국왕 근위대의 우렁찬 뿔피리 소리로 환영받았다.

300여 명의 근위대가 양옆으로 도열한 채 에트루스칸의 왕자를 맞이하는 가운데 중앙에는 피처럼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알폰소 왕자는 백마의 말발굽으로 붉은 카펫을 밟았고, 선두에 선 백마 탄 왕자와 고위직 관리 둘, 그의 9인의 기사단, 그리고 50기의 국왕 직속 근위대가 순서대로 그 뒤를 따랐다.

붉은 카펫의 끝에는 높은 단상이 있었다.

거기에는 필리프 4세가 친히 알폰소 왕자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나의 친애하는 사촌!”

그는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여동생과 꼭 닮은 백금발을 지닌 잘생긴 젊은 왕이었다.

이마와 콧대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알폰소 왕자와 같은 청회색이었다.

하지만 필리프 4세와 알폰소 왕자가 비슷한 점은 그 눈동자 색뿐이었다.

갈리코의 젊은 왕은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굴고 있었지만 그의 인상에는 어딘가 큰 뱀같이 의뭉스러운 곳이 있었다.

그는 양손을 번쩍 들고 가까이 다가와 알폰소 왕자를 포옹했다. 알폰소도 왕을 마주 껴안았다.

은빛 갑옷을 입은 알폰소와 붉은 궁정복을 입은 필리프가 순간적으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네, 젊은 사촌. 몽펠리에 궁전에 온 것을 환영해. 집처럼 편안하게, 천천히 지내다가 가게.”

필리프 4세는, 에트루스칸 왕국에 ‘혈육을 잃은 왕족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했던 것치고는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고모를 잃은 그에게는 모친을 잃은 알폰소 왕자의 미간에 서려 있는 수심과 비슷한 것의 그림자조차도 없었다.

알폰소는 천천히 답했다.

“국왕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필리프 4세는 미끈하게 웃으며 답했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에트루스칸 왕족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루할지 모르겠으나 몽펠리에 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최신식 건축물이라네. 볼만한 것들이 많을 거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왕족을 수감하기 위한 지하 감옥도 새로이 정비해 두었지.”

알폰소 왕자는 필리프 4세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왕권 경쟁에 패배한 루이 왕자를 새 감옥에 수감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날 지하 감옥에 처박고 싶다는 이야기인가.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필리프 4세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 외에도, 새로 만든 분수 정원이나 사슴 우리도 있지. 오늘 나오지는 않았는데, 내 동생인 오귀스트가 안내해 줄 테니 슬슬 돌아보시게.”

필리프 4세는 한마디 덧붙였다.

“오귀스트도 착한 아이야. 만나보면 재미있을 걸세.”

“그렇군요.”

알폰소는 평이하게 답변하며 필리프 4세와 몽펠리에 왕궁의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회담의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그는 이곳에 국왕의 명을 받고 결혼 동맹, 그러니까 본인의 약혼에 대해 논의하러 왔다.

갈리코 왕국의 친척들을 ‘위로’하는 것도 그의 역할 중 하나였지만, 오늘 처음 만난 이 사촌의 표정을 보았을 때 그는 고모님의 죽음에 관한 애도가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이 들 것 같은 곳은 아니었다.

빨리 매듭을 짓고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알폰소 왕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음? 회담을 벌써?”

필리프 4세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내가 다음 주에 사냥을 하러 가네. 공식 일정이야. 일주일이면 돌아올 테니 그 이후에 일정을 잡도록 하지.”

알폰소 왕자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갈리코 왕국은 알폰소 왕자의 도착 일정을 사전에 통보받았다.

그리고 에트루스칸의 왕위 계승권자가 친히 방문하는 것보다 큰 공식 일정은 없을 것이다.

사냥대회가 아무리 중요하다손 치더라도 사전에 조정하지 못할 리 없었고, 일정이 부득이하게 겹쳤다면 알폰소 왕자와의 일정을 앞에 두는 것이 상례이다.

필리프 4세는 알폰소의 기색을 분명히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고 말을 건넸다.

“에트루스칸의 왕자가 친히 우리 궁을 방문해 준 것은 가문의 영광이지! 융숭한 연회와 아름다운 무도회로 최고의 환대를 약속하네.”

확실히, 들어온 지 몇 분 되지는 않지만 몽펠리에 궁은 알폰소 왕자를 위해 준비한 티가 났다.

근위대 도열, 국왕이 친히 정문까지 맞으러 나온 점, 성의 입구와 왕궁의 정문, 거리에 가득 내걸린 형형색색의 휘장들과 장식물까지.

“실무자급끼리 먼저 접촉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 사소한 일들은 아랫것들에게 맡겨 두세. 오느라 힘들었지, 우선 목욕부터 하고 올 텐가? 자네가 묵을 숙소를 내 직접 안내해 주지.”

필리프 4세는 알폰소 왕자를 친히 자기 손으로 숙소로 안내했다.

성의 정중앙에 위치한, 7개의 방을 갖춘 스위트룸 형식의 처소였다.

알폰소는 날카로운 눈으로 숙소를 살폈다.

호화롭고 화려했지만 입구의 통로 하나만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통로는 성의 정중앙에 있어 통로가 막히면 이동하기 어려워 보였다.

“최근에 새로 단장한 곳이야. 왕의 처소와 지금 비어 있는 왕비의 처소를 제외하면 팔레 드 몽펠리에서 가장 큰 처소라네.”

“호화롭네요. 융숭한 대접에 사촌의 호의를 느낍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알폰소 왕자가 서 있는 방은 갈리코 왕국의 자존심을 보이기라도 하듯 으리으리했다.

알폰소의 칭찬에 필리프는 기분이 좋은 듯 낮게 웃었다.

“푹 쉬도록 해. 오늘 저녁에 만찬을 가지고, 또 조만간 보지.”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알폰소 왕자는 필리프 4세와 오귀스트 공주, 외드 대공 내외와 라리에사 대공녀와 함께하는 ‘가족 만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가족 만찬’은 신기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필리프 4세가 대부분의 대화를 주도했고, 알폰소 왕자는 차분하게 답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영양가가 없는, 신변잡기적인 내용들이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길 기세였으나, 외드 대공의 관리·감독이 빛을 발했다.

아버지의 눈치에 라리에사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식사 시간 내내 제 분수를 지켰다.

특이한 점은 오귀스트 공주와 라리에사 대공녀의 관계였다.

라리에사는 오귀스트 공주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못했다.

그냥 사이가 나쁘다는 정도로는 설명하지 못할 만큼 짙은 적의의 농도였다.

가장 간명한 설명은 ‘라리에사 대공녀가 오귀스트 공주를 질투하고 있다’일 것이다. 견제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의 의문은, 도리어 오귀스트 공주의 태도에 있었다.

라리에사가 이상하게 구는 것은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고 상황판단력도 엉망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라리에사가 오귀스트를 견제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질투나 견제도 뭔가 건더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귀스트의 알폰소에 대한 태도는 몹시 담백했다. 전혀, 일말의 이성적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구먼!”

“그러게요.”

되려 오귀스트 공주는 자기 오라비의 비위를 깍듯하게 맞추느라 알폰소 왕자는 뒷전일 지경이었다.

국왕 필리프가 보이는 정도의, 친척 사이에서 반가워하는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예의를 갖춘 사무적인 태도, 그것이 전부였다.

“이런 자리를 가지게 된 것도 다 복이야. 조만간 자리를 한 번 더 만들기로 하지.”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궁 근처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오귀스트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오귀스트 공주가 알폰소 왕자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알폰소에 눈에는 그것이 마지 못해 예의를 지킨 것이라는 점이 너무나 잘 보였다.

하지만 이미 질투에 눈이 먼 라리에사 대공녀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겼다.

식사 자리 내내 별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외드 대공이 딸을 째려보았다.

라리에사는 별수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디저트만 깨작거렸다.

“그렇게 폐를 끼쳐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나 대신이라고 생각해. 내가 바쁠 때 오귀스트한테 이야기하면 그것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오귀스트 공주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꺼운 듯이 웃었다.

“저는 오라버니의 손발이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알폰소 왕자님,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무 때나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알폰소는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숙여 보았다.

어차피, 숙녀를 시도 때도 불러낼 수는 없다.

“제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에 필리프 4세가 손뼉을 딱, 치며 좌중을 정리했다.

“먼 길 오느라 여독이 심할 걸세, 오늘은 일찍 자리를 파하는 게 우리 사촌을 위해 좋겠어.”

“그럼요.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필리프 4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모든 일행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 우리 사촌, 조심해서 돌아가고. 조만간 다시 봄세.”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알폰소 왕자는 아주 오랫동안 갈리코 국왕인 필리프 4세를 만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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