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라리에사 대공녀만 알고 있는 비밀
라리에사 대공녀는 며칠 전의 가족 식사를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끔찍한 세 시간 반이었다.
오귀스트 공주는 수치도 모르고 알폰소 왕자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 “알폰소 왕자님,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무 때나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중립적이어야 마땅할, 아니, 라리에사 드 발로아 대공녀를 혼처로 지정해 에트루스칸 왕국에까지 보냈으니 라리에사의 편을 들어주었어야 마땅할 필리프 4세마저 오귀스트 공주를 대놓고 밀어주었다.
- “왕궁 근처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오귀스트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치욕스러운 ‘가족’ 식사였다.
‘알폰소 왕자님과의 혼담이 오가던 건 분명히 나였다고!’
필리프 4세와 오귀스트 공주야 진짜 가족이 아니라 그저 먼 친척일 뿐이니까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했다고 치자.
라리에사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원망이 많았다.
비열한 오귀스트가 알폰소를 채가려고 획책을 하고 국왕 폐하는 이를 거들고만 있는데, 라리에사를 지켜줘야 했던 외드 대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되려, 발끈하려고 했던 라리에사를 제지하기까지 했다.
‘무슨 아빠가 그래⋯⋯!’
라리에사는 억울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아버지가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고 원망스러운 것은 원망스러운 것이었다.
‘이건 아냐. 진짜 아냐. 아버지한테 얘기할 거야. 알폰소 왕자님과 결혼시켜주지 않는다면 날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라리에사의 찡찡댐은 대개 어머니에게만 통했다.
하지만 외드 대공도 말로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다가,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거듭 권유하면 모르는 척 누그러지는 일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잘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아버지에게 자기 심정을 말조차 하지 못한다면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이다.
그녀는 내성에 있는 자기 방을 떠나 외드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통상적으로 있어야 하는 보좌관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평소와 다르게 돌아다니던 하인들이며 평기사들, 하급 귀족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하들을 물려 놓은 것 같았다.
‘단둘이 이야기하기에는 차라리 낫지.’
라리에사는 치밀어오르는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도리질을 쳤다.
그녀는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해.”
선객이 있었다.
며칠 전 오귀스트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재미를 봤던 라리에사는 자연스레 숨을 죽이고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알폰소 왕자⋯⋯.”
그녀는 알폰소의 언급에 곧바로 귀를 쫑긋 세웠다.
- “국왕 폐하께서 하시는 일⋯⋯.”
- “희생양⋯⋯”
- “우리는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심각한 그들의 말투와 대화 내용에 라리에사 대공녀는 점점 더 낯빛이 창백해졌다.
- “가에타의 일이 완료되면 조만간⋯⋯.”
- “끝⋯⋯.”
아버지와 아버지 부하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이어졌다. 천지개벽할 이야기였다.
이를 전부 다 엿들은 라리에사 대공녀는 새파래진 얼굴로 비틀대며 자리를 떴다.
‘알폰소 왕자님⋯⋯!’
* * *
레오 3세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 콰직!
그는 몬테펠트로 노후작이 보낸 보고서를 한 손으로 뭉개 버렸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갈리코는 이런 망발을 한단 말이냐!”
왕의 심기 하나는 기막히게 케어했던 마르케즈 백작의 빈자리를 느끼며, 발데사르 후작과 콘타리니 백작은 연신 고개만 조아렸다.
국왕의 보좌관인 델피아노사 경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폐하, 북쪽의 간악한 도당이 이번에는 어떤 헛소리를 했길래 이리 격노를 하십니까.”
“자네 눈으로 직접 읽어보게!”
레오 3세는 자기가 구겨버린 양피지를 델피아노사 경에게 던지듯이 밀었다.
델피아노사 경은 구깃구깃한 종이를 집어서 편평하게 폈고, 나머지 두 대신들도 옆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양피지를 함께 읽었다.
「⋯⋯(전략)⋯⋯. 그리하여 소신은 몽펠리에 중장기병대에게, 자국의 왕자 전하께서 귀국에 사절로 파견이 되셨으니 이제 군대를 물리라고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리코의 중장기병대장은 양국간의 협상이 끝나야 자신에게 명이 내려온다며, 갈리코 중앙정부의 명령 없이는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답장을 보내와⋯⋯(후략)⋯⋯.」
“허!”
종이를 읽던 발데사르 후작이 어이가 없어 내뱉은 탄식이었다.
“아니 지금, 갈리코 놈들이, 우리 국경에서 안 나간다고 버티고 있다고요?”
옆에서 콘타리니 백작이 울부짖었다.
“우리가 왕자 전하까지 자기네 나라로 파견한 상태인데도 군사를 못 물리겠다고 버틴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애초에 했던 말과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더 읽어 봐! 가관이야!”
레오 3세는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외쳤다. 귀족 남자 셋은 찍소리도 못한 채 양피지를 마저 읽었다.
「⋯⋯갈리코의 군세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중장기병대 외에도 보병 군세가 충원되고 있어⋯⋯. 항의를 전달하였으나 중장기병대 측에서는 답신이 없어⋯⋯. 보병의 규모는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약 3000여 명⋯⋯. 점차 늘고 있는 중⋯⋯.
현지에서는 영명하신 국왕 폐하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 오단토니오 데 몬테펠트로 올림.」
발데사르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병이⋯⋯. 증원되고 있다고요?”
보병이 충원되면, 갈리코의 중장기병대는 바로 에트루스칸 내륙으로 쳐들어 올 전력을 보유하게 된다.
대신들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건⋯⋯. 갈리코 왕국이 국지적인 군사 도발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발데사르 백작이 예측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마지막 단어들을 다시 입안으로 삼켰다.
가에타 외곽에 주둔한 3000여 기의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에 6000명의 보병만 충원된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에트루스칸 왕국 내부를 휘저을만한 군세를 갖추게 된다.
갈리코 왕국에 침략당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유일한 왕자이자 왕위계승권자를 갈리코 땅에 보내놓은 상태로.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레오 3세를 슬쩍 훔쳐보았다.
발데사르 후작보다는 항상 조금 덜 비관적인 콘타리니 백작이 외쳤다.
“알폰소 왕자님께 즉시 서신을 보내 필리프 4세에게 엄중히 항의토록 해야 합니다!”
콘타리니 백작은 설마 갈리코 왕국이 진짜로 공격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내가 안 해 본 줄 아나?”
레오 3세가 언짢은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소리쳤다.
“알폰소 이놈, 답장이 없어! 몽펠리에 왕궁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가 미래의 군주로서 가져야 할 몸가짐에 대해 구구절절이 써서 보냈거늘!”
왕자가 팔레르 드 몽펠리에에 도착한 지 벌써 거의 삼 주가 지나고 있었다.
지금은 7월 초순이다. 그동안 왕자 일행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알폰소 혼자서 편지가 늦어지는 거라면 불효막심한 녀석이라고 치부하고 치웠을 텐데, 함께 간 마르케즈 백작이나 알폰소의 부관인 베르나르디노 경의 편지조차 늦었다.
몽펠리에 궁전에 들어간 직후, 잘 도착했음을 알리는 편지 한 통이 마지막이었다.
“폐하, 하오나 방도가 없사옵니다.”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쓸 수 있는 수단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콘타리니 백작이 레오 3세를 재촉했다.
그는 본디 왕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발언을 거의 하지 않는 성미였는데, 콘타리니 백작마저도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상황이 많이 급하다는 뜻이었다.
“알폰소 왕자 전하께 파발을 보내소서. 필리프 4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든, 빨리 결혼 동맹을 체결하든, 가에타에 주둔한 몽펠리에 중장기병대에 보병 병력이 추가 합류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발데사르 후작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폐하, 시몬 데 마레 추기경에게 도움을 구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호오?”
“필리프 4세도 어디까지나 예삽교 군주입니다. 루도비코 법황께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천신의 대리인께 복종할 순종의무를 지고 있는 이상 그도 그 말씀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법황에게 파문당하면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할 테니 눈치를 아무래도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과연, 법황 성하께서 에트루스칸 왕국을 위해 갈리코 왕국을 제지해 주실는지요?”
델피아노사 경이 초를 쳤다. 발데사르 후작은 무거운 음성으로 답했다.
“법황 성하께서는 원칙적으로 예삽교 국가들을 평화롭게 하나로 모아 지상 낙원을 만드실 의무를 지고 계시네. ⋯⋯설마 묵과하시겠나.”
묵과할 수도 있다. 루도비코 법황이라면 묵과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릴 수는 없다.
레오 3세는 거칠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발데사르 후작의 말이 맞다. 법황 그 늙은 여우가 무슨 조건을 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세. 델피아노사 경은 날을 잡아 데 마레 추기경을 왕궁으로 불러들이고, 알폰소에게 보낼 파발마를 준비하게.”
“예, 폐하!”
대신들은 바쁘게 흩어졌다.
* * *
고의로 아버지의 편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는 알폰소 왕자가 팔라지오 카를로에서 오간 대화를 들었다면 진심으로 억울해했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받은 편지가 한 통도 없었다.
아니, 편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협상은 손톱만치도 진전되지 않았고,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당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렇게 굴 줄은 예상했지만, 이건 인간적으로 심하잖아!”
흥분하는 법이 없는 사람 좋은 알폰소 왕자가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토한 울분이었다.
필리프 4세는 사냥대회를 핑계 삼아 일주일간 나타나지 않더니, 그 이후로는 성황청과의 사이에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다며 자취를 감췄다.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알폰소 왕자를 담당한 것은 오귀스트 공주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묘하게 냉담했으며 점차 더 성의가 없어져 갔다.
급기야는 필리프 4세의 알현 일정을 묻는 알폰소 왕자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 “손님이시면 손님답게 얌전히 기다리시지요. 어련히 때가 되면 알아서 연락 드리지 않으려고.”
갈리코 측에서 잡아주는 외부 일정은 점점 더 줄어들어만 갔다.
알폰소 왕자는 일주일도 넘도록 자신에게 배당된 처소에 멀뚱히 앉아 시간을 죽이는 일이 잦게 되었다.
즉, 알폰소 왕자와 에트루스칸 일행들은 몽펠리에 궁 정중앙에 있는 화려한 처소에 실질적으로 감금된 상태에 가까웠다.
“왕자 전하. 본국에서 일체의 지시가 오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케즈 백작이 무거운 얼굴로 고했다.
“통상적이지 않습니다. 국왕 폐하로부터 지시나 독촉이 두 번은 오고도 남았을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마르케즈 백작은 차마 뒷이야기를 마저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음.”
알폰소 왕자는 침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몽펠리에 궁 측에서는 서신도 중간에서 가로채는 모양이었다.
외교 사신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대우였다. 자기가 언제 똑같이 돌려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막 나가자는 거지.”
알폰소는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알폰소 왕자님!”
이제는 익숙해진,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처소를 울렸다.
“아, 그분이 오셨군요.”
마르케즈 백작이 알폰소 왕자의 눈치를 살폈다.
“저희는 일단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마르케즈 백작과 베르나르디노 경은 자리를 피했다.
두 에트루스칸 귀족이 나간 자리에 한 명이 갈리코 귀족 여인이 들어왔다. 라리에사 대공녀였다.
“알폰소 왕자님!”
그녀는 검박한 얼굴 가득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들어왔다.
알폰소 왕자는 엄습해오는 두통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갖춰 그녀를 맞이했다.
“라리에사 대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