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당신에게는 나밖에 없어요
에트루스칸에 있을 때였다면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방문을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배경이 갈리코로 달라진 이후로는 둘 사이에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생겼다.
요사이 알폰소 왕자를 찾아오는 갈리코 측의 인사는 라리에사 대공녀뿐이 없었다.
라리에사의 방문을 거절하면 알폰소는 정말로 일주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이거,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그녀는 시골 처녀 흉내라도 내는지, 왕골 바구니 가득 담아온 빵과 치즈, 과일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딱 한 명이 먹을만한, 2~3일 치의 식량이었다.
딱히 식사가 나쁘게 나오는 것은 아니어서 별달리 필요가 있지는 않았지만 알폰소는 일단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것들을 받았다.
“오늘도 챙겨다 주셨군요.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감사합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왕자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모르는 척하고 바구니에서 와인 한 병도 함께 꺼냈다.
“이건 갈리코 왕국의 특산품인 발포주예요. 왕자님와 함께 마시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앞의 음식이 알폰소를 위한 배려라면 가져온 와인은 라리에사의 사심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망은 다른 사람의 절망인 때가 있는 법이다.
라리에사 대공녀와 자신의 처소 안에서 음주라니, 알폰소 왕자로서는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취해서 손이라도 잡았다가는 인생을 저당 잡히게 된다. 절대로 안 될 일이다.
“한잔하기에는 시간이 이르네요. 다음 기회에 함께하죠.”
라리에사가 꺼낸 발포주를 다시 왕골 바구니 안으로 집어넣는 왕자를 보며, 대공녀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외드 대공은 아내에게 딸 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했지만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언제나 규칙 없이 물렀다.
하지만 그것이 라리에사가 제멋대로 외출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늘도 갖은 핑계를 다 대서 의상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차를 타고 나와 왕궁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왕궁 출입은 집에 어떻게 숨길 수가 없다.
라리에사는 대공저로 돌아간다면 난감해하는 베르나데트 대공비를 옆에 세워두고 혓바닥에 칼을 물은 유지니 부인에게 호되게 혼쭐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운이 좋을 경우였다. 제발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빌어야 했다.
“혹시.”
알폰소 왕자 말을 꺼냈다. 라리에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부탁드린 기사에 대한 소식은 새로 들어온 것이 있을까요?”
그가 라리에사 대공녀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는 가급적이면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으나, 상황이 빈궁하면 누구든 우아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아⋯⋯. 그 에트루스칸 기사에 대한 이야기 말씀이시로군요.”
라리에사는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상태로 답했다.
알폰소 왕자는 일전에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엘코 경의 상황에 대해 수소문을 부탁해 둔 상태였다.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라리에사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기가 싫었다. 자신의 실수와 시간축이 겹쳤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엘코 경이 희생당한 데에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잘못이 3할 정도는 되고도 남을 테지만, 그녀는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 ‘실수’라고 여겼다.
“그 기사는⋯⋯.”
하지만 라리에사는 엘코 경에 관한 수소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폰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황금의 왕자님’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눈치가 없다가도 있는 라리에사는 본인이 알폰소에게 열렬히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살아는 있습니까?”
라리에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알폰소가 물었다.
라리에사는 나빠지려는 기분을 다잡으며—왜 내 일상에 대해서는 저렇게 급한 의문을 가진 적이 없는 거지?—찬찬히 대답했다.
“네,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어요.”
“천신님, 감사드립니다!”
알폰소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성호를 그었다.
그의 관심을 자신에게 도로 끌고 오고 싶어서, 라리에사는 말을 이었다.
“그 기사는 갈리코로 압송된 이후로 필리프 4세 폐하의 부하들에게 미레이유 공작의 일로 문초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자백은 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엘코 경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구나⋯⋯!
알폰소는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문초를 받았다’는 짧은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엘코 경이 어떤 고문을 당했을지가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내 이름만 불면 편하게 해준다고 했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그 뒤로는요?”
“그 뒤로는 별다른 소식이 없어요. 죽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추가적인 형집행이 있을 거라는 말도 못 들었어요. 아마 몽펠리에 궁의 지하 감옥에 여전히 갇혀 있지 않을까요.”
거기까지 들은 왕자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만 같았다.
기껏 소식을 전해주고 치하의 말을 기대하고 있었던 라리에사는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저기, 알폰소 왕자님.”
“네? 대공녀.”
“그렇게 뻣뻣한 태도, 계속 유지하실 거예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폰소 왕자가 정색해서 라리에사 대공녀를 쳐다보았다.
에트루스칸에서 라리에사가 ‘대 갈리코 왕국’ 운운해가며 거만하게 굴었던 이후로 알폰소는 이런 종류의 도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지금은 정말로 갈리코 왕국에 끌려와 있는 신세였다.
명목은 사절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인질이다. 더더욱 예민한 상태였다.
알폰소 왕자가 표정을 굳히자 찔끔한 라리에사는 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불쌍한 얼굴로 팔자 눈썹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왕자님. 저에게 이러지 마세요. 왕자님께는 지금 정말 저밖에 없어요.”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일어날 때가 넘었다.
오후에는 아버지인 외드 대공이 입궁할 일정이 있었다. 아버지와 마주치기 전에 왕궁을 떠나야 한다.
“오귀스트 공주를 조심하세요. 겉과 속이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아니, 이 왕궁 안의 아무도 믿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에요.”
그렇게 귀띔한 라리에사 대공녀는 서둘러 왕자의 처소를 나섰다.
나가면서 두 번쯤 돌아보았지만 떠나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미련을 뚝뚝 떨구며 그렇게 장내를 쓸고 간 후, 호화로운 감옥에 그녀가 두고 간 왕골 바구니와 단둘이 남은 알폰소 왕자는 고심에 빠졌다.
‘대공녀가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언뜻 들으면 라리에사가 평소의 비이성적인 질투를 하는 것으로 들렸다. 하지만⋯⋯.
‘왕궁 안의 그 아무도? 자기 아버지도?’
이건 여자의 질투를 넘어선 그 무언가의 힌트 같았다.
사흘에 한 번씩 꼭 찾아와서 굳이 먹을 것을 두고 가는 것도 이상했다.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레오 3세의 부름에 추기경의 붉은 예복을 입고 왕궁에 등청했다.
국왕의 정식 요청에 따른 공식적인 알현이었다.
‘날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만.’
가에타 지방의 상황이 흉흉하다는 사실은 데 마레 추기경도 전달받아서 들은 상황이었다.
보병이 충원중이라는 이야기까지는 몰랐지만, 기병대가 꿈쩍도 않는다는데, 왕이 성황청의 사자를 불러 할 말은 뻔했다.
‘보나 마나 루도비코 법황에게 부탁해 갈리코 왕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는 얘기지.’
데 마레 추기경은 조그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며 팔라지오 카를로의 화려한 복도를 고아하게 걸어 왕의 집무실 앞에 섰다.
‘원하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때가 안 좋아.’
왕에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아파오는 골을 누르며 데 마레 추기경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 내부로 발을 디뎠다.
- “데 마레 추기경 납시오!”
그 안에는 레오 3세와, 그의 측근 셋, 그러니까 발데사르 후작, 콘타리니 백작, 그리고 델피아노사 경이 앉아 있었다.
델피아노사 경을 시작으로 귀족 셋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왕조차도 옥좌에서 일어서 데 마레 추기경을 맞이했다.
추기경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고소(苦笑)를 지었다.
‘극진한 환대인데. 급한가 보군.’
“데 마레 추기경!”
레오 3세가 자리에서 친히 일어서 두어 걸음 걸어왔다. 친근하게 양손을 벌린 채였다.
‘안기라는 소린가?’
“그간 수복강녕 하셨나?”
데 마레 추기경은 빈정대는 속마음을 숨긴 채 매끈한 매너로 답했다.
“국왕 폐하의 하늘과 같은 성심 덕에 그간 편안히 잘 지냈나이다.”
“앉게, 이리 앉게.”
테이블에 자리 잡은 뒤에 레오 3세가 꺼낸 이야기는 데 마레 추기경의 예상을 한 치도 빗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루도비코 법황께서 중재를 좀 서 주십사⋯⋯.”
데 마레 추기경을 모셔서 도움을 받자는 안건을 처음 꺼낸 발데사르 후작이 추기경에게 사안을 설명했다.
‘이 사람이. 국왕한테 물어보기 전에 나한테 먼저 연락이라도 해 보지.’
데 마레 추기경은 오늘의 실패를 뒤집어쓸 사람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발데사르 후작임에 혀를 차며 답했다.
“후작님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평시라면 저도 당연히 루도비코 법황 성하께 그러한 청을 올렸을 것입니다.”
다음에 나올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발데사르 후작과 레오 3세는 아니길 빌며 다음 단어를 기다렸다.
“다만⋯⋯.”
그러면 그렇지. 그들은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때가 좋지 않습니다. 루도비코 법황 성하께서는 지금 갈리코의 필리프 4세에게 싫은 소리를 하실 수가 없으실 겁니다.”
“혹시⋯⋯. 예사크의 일 때문에 그렇습니까?”
콘타리니 백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루도비코 법황께서 ‘성전’을 준비 중이신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무어 제국의 발호가 거세지자 역대 법황들은 예삽교 군주들을 규합해 예삽교의 성지, 예사크를 탈환하기 위한 군대를 보냈다.
이를 ‘성전’ 내지는 ‘십자군 전쟁’이라 불렀다.
1차 십자군은 100여 년 전, 2차 십자군은 40여 년 전이었다.
지금 루도비코 법황이 준비 중인 것은 제3차 십자군 전쟁이었다.
천년의 고도, 영원의 나라 예사크에 성황청의 깃발을 꽂는 법황은 그 치적이 천년을 넘어 만년까지도 칭송되리라.
“슈테른하임의 율덴부르크 대공이 총사령관으로 자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갈리코 왕국과는 무슨 관계가⋯⋯.”
슈테른하임 공국은 북쪽에 있는 대공국으로, 군주인 율덴부르크 대공의 신실함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전반적으로 가난한 북쪽 연합국들 중에서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으나 결국에는 소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에트루스칸의 레오 3세와 먼 혈연일지언정 갈리코와는 큰 연관성이 없는 국가였다.
“총사령관은 율덴부르크 대공이 맡았으되 재정은 슈테른하임 공국이 책임질 수 없지요. 갈리코의 필리프 4세가 루도비코 법황께 제3차 십자군 전쟁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아⋯⋯.”
발데사르 후작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조만간 슈테른하임 대공이 구체적인 규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갈리코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원 규모가 확정되기 전에는 당연히, 루도비코 법황께서는 필리프 4세 폐하께 싫은 소리를 하려 들지 않으실 것이고. 지원 규모가 확정된 후라도 실제로 대금이 집행되기 전까진 몹시 부담스러우실 겁니다.”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대주(貸主)에게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 수 있는 채무자는 없었다.
제아무리 법황이라도 인간 세상의 규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방도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데 마레 추기경이 운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