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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75화 (175/733)

<제175화> 힘이 없는 자의 슬픔

중요한 이야기는 협상장에서 모두 나눴다.

식사 자리에서 필리프 4세와 율덴부르크 대공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들은 모두 신변잡기거나 덕담이었다.

하지만 협상장에서 상한 기분까지는 가릴 수가 없었다.

“군주의 가장 큰 미덕은 모름지기 예사크의 곤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에게 엄격하되 주변에 베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덴부르크 대공이 넌지시 던진 이야기였다.

그의 금욕적인 회색 눈은 필리프 4세가 손에 쥔 독주 잔, 지나치게 가깝게 끌어안고 있던 오귀스트 공주,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거대한 에메랄드 반지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으로, ‘저 에메랄드 반지 하나를 팔면 얼마나 많은 장병에게 무구를 갖춰줄 수 있는지 아느냐’라고 비난하는 듯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옳습니다. 검약과 절약이야말로 예삽교 군주의 가장 큰 미덕이지요.”

오귀스트 공주가 웃으며 덧붙였다.

“검약과 절약은 언제나 어디서나 몸에 밴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전투나 전쟁 준비라고 해도 마찬가지이고요. 군주가 유능하고 꼼꼼하면 적은 돈으로도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쟁 자금을 많이 받아갈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알아서 잘 꾸려보라, 못 하면 댁이 무능해서 그런 것이라는 일침이었다.

일그러지는 율덴부르크 대공의 표정에, 구원병력으로 나선 것은 그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던 알폰소 왕자였다.

“전쟁에는 특수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수하에게 국가와 군주를 위해 목숨까지 걸도록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희생한 국민에게 아끼지 않고 융숭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군주를, 국가를, 백성을 위해 나서겠습니까?”

오귀스트 공주가 매섭게 알폰소 왕자를 째려보았다.

억하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니, 감추지 않는 태도였다.

그녀는 율덴부르크 대공 앞에서도 빈정거리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무례하지는 않았다.

라탄 고어의 사용으로 한 번 거슬렸던 알폰소 왕자의 심기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그 와중에 율덴부르크 대공이 미소를 띠며 알폰소 왕자에게 맞장구를 쳤다.

“사기는 한 번 꺾이면 걷잡을 수 없으며 믿음은 한 번 부러지면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에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고요. 기왕 은혜를 베푸시는 김에 크게 베풀면 그 명성이 중앙대륙 전역에, 아니, 온 예삽교 세계에 울려 퍼지실 겁니다.”

필리프는 매끈한 얼굴로 답했다.

“좋은 말씀이시군요.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때 알폰소가 한마디를 툭, 얹었다.

여상스러운 말투이되 이야기가 나온 타이밍을 고려하면 전혀 여상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군주는 자신의 수하를 보호해야 할 의무도 있지요.”

필리프는 역시 가면 같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훌륭한 군주라면 그래야 마땅하지, 어린 사촌.”

어린 사촌, 어린 왕자. 깎아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필리프의 언사에 부당함을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알폰소는 겉으로는 일절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거침없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필리프 4세 폐하, 그대의 혈연이 훌륭한 군주가 되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필리프 4세의 눈가에 까마귀 주름이 졌다. 눈웃음을 친 것이다.

오귀스트가 인상을 썼다. 그녀는 그녀의 오라버니에게 부담이 될 만한 일체의 행위를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율덴부르크 대공의 앞이다. 오귀스트는 나서는 것을 잠시 멈췄다.

율덴부르크 대공의 눈을 의식한 것은 필리프 4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람 좋게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어디 들어나 보지.”

“제 기사가 폐하의 날개 아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가 있었나?”

필리프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알폰소는 명료하게 말했다.

“발로아 대공녀, 라리에사님의 귀환 시에 에트루스칸에서 함께 보내온 기사입니다. 이름은 엘코. 나이는 23세. 잿빛 머리카락에⋯⋯.”

알폰소가 호락호락하게 나가떨어지지 않을 것 같자 필리프 4세는 귀찮은 듯 손을 흔들며 모르는 척을 그만두었다.

“아, 아. 기억해. 미레이유 공작의 살인 혐의로 압송해 온 죄인이지.”

“죄가 밝혀졌습니까?”

알폰소는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엘코 경은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그 뒤로 갈리코 왕국에서 정식 재판이나 그 외의 확정판결이 없었음을.

“죄가 있으니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보내온 것 아니겠나?”

필리프는 미끈하게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알폰소는 끈질기게 물고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아니오. 에트루스칸 왕국에서는 엘코 경에게 죄가 있음을 밝힐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만 갈리코 왕국에서 요구하셨기 때문에 수사와 재판 절차를 갈리코 왕국에 위임한 것입니다. 에트루스칸 왕국에서는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리코에서도 그의 죄를 밝혀내지 못하셨군요.”

필리프가 가늘고 긴 눈을 떠서 알폰소를 노려보았다. 뱀 같은 시선이었다.

알폰소는 지지 않고 필리프를 마주 노려보았다. 오귀스트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자기 오라버니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다. 저렇게 긁으면 안 된다.

그는 인내심이 없었고, 집요한 사람이었다.

원한은 삼 대를 걸쳐서라도 쫓아가서 받아내고야 마는 위인이었다.

오귀스트 공주는 필리프 왕이 판을 엎어버릴까 봐 걱정했지만, 필리프 왕은 정반대로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율덴부르크 대공의 시선이 필리프 4세를 훑고 있었다.

그리고 필리프 왕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율덴부르크 대공은 예삽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 신실함으로 인망이 높은 이다.

굴에서 100년은 산 여우 같은 루도비코 법황이 신실한 자를 진심으로 높게 칠지는 알 수 없으나, 법황조차도 우대하는, 예삽교 군주의 의무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남자였다.

자신의 평판은 상당 부분 율덴부르크 대공의 입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우리 사촌의 수하를 아끼는 마음이 눈물겹네. 앞으로 좋은 군주가 되겠어.”

“그는 저에게 충성을 다한 자이자 함께 자란 친우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제게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안 될 말⋯⋯!”

발끈하는 오귀스트를 필리프가 왼손을 들어 제지했다.

“오귀스트.”

기세등등하던 오귀스트 공주는 필리프 4세의 말 한마디에 순한 양처럼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난 너그러운 군주지.”

알폰소가 조만간 그에게 안겨 줄 것들을 생각하면 사실, 기사 하나쯤은 내주건 말건 상관없었다.

미레이유 공작 살해의 범인으로 받아온 자라 풀어준다면 공작 일파의 반발이 예상되긴 했지만, 공작 본인이 죽은 뒤로는 그 일파는 세 규합에 실패한 채 오합지졸이 된 터였다.

삼촌인 외드 대공도 딸인 라리에사를 에트루스칸에서 빼내는 무리를 한 이후로는 그에게 목줄이 잡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였다.

지금 필리프는 여유로웠다.

“그가 타국의 고위 귀족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의혹은 벗겨지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사촌의 수하를 위하는 마음을 높이 사네.”

알폰소 왕자는 묵묵히 필리프 4세의 나머지 단어들을 기다렸다.

“자네에게 돌려주지. 처소로 보내겠네.”

알폰소 왕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오귀스트 공주의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에트루스칸 왕궁은 감사 인사를 가르치지 않나요? 오라버니께서 죄인을 풀어주시는 은혜까지 베푸시는데!”

알폰소는 여기에서 ‘엘코 경은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적국의 정중앙이다.

게다가 지금 막 엘코 경을 돌려주겠다는 언질을 받은 차였다.

자기 좋은 대로 들이받다가는 엘코 경은 갈리코 왕국의 지하 감옥에서 영영 썩을지도 모른다.

인질로 잡혀 온 왕자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을 뱉었다.

“필리프 4세,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필리프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닐세, 어린 사촌의 군주로서의 한걸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참으로 뿌듯하지 뭔가. 좋은 예삽교 군주가 되어 주게.”

“⋯⋯예.”

그리고 이 필리프 4세와 오귀스트 공주가 한패가 되어 벌이는, 에트루스칸 왕자에 대한 굴욕 주기를 슈테른하임의 율덴부르크 대공이 관조하는 눈초리로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 * *

엘코 경은 그날 저녁 늦게, 만찬이 끝나자마자 바로 알폰소 왕자에게 인계되었다.

엘코 경이 돌아올 거라는 언질을 받은 만프레디 경도 알폰소 왕자의 방에서 함께 엘코 경을 기다렸다.

알폰소는 엘코 경을 만나면 자신이 곧장 그를 껴안으리라 생각했다.

엘코는 알폰소에게는 없는 친형 같았다.

여섯 살 위의 기사인 그는 언제나 참을성 있게 어린 알폰소를 기다려 주었고, 알폰소가 미처 챙기지 못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묵묵히 처리해 주었다.

그런 형 같은 친우를, 얼싸안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돌아온 것을 축하하리라고 알폰소는 다짐했다.

하지만 처소로 들어서는 엘코 경을 보며 알폰소는 축하는커녕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간 고초를 겪었는지 절뚝, 절뚝 다리를 절며 균형을 놓친 걸음을 걸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엘코⋯⋯. 자네의 팔이⋯⋯.”

검사로서 드높던 그의 자존심은 빠르고 정교한 팔놀림에서 나왔었다.

타고나길 팔이 길어 리치가 좋고 근육이 빼곡하게 붙어 힘 역시 좋았던 엘코 경의 오른팔은⋯⋯. 어깨 아래에서부터 절단되어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눈도?”

뒤에서 만프레디 경이 부자연스럽게 감은 엘코 경의 왼눈을 보며 놀라 중얼거렸다.

눈두덩에 지방이 있고, 그 밑에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가 푹 꺼져 있었다.

엘코 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는 상태로 눈을 한번 깜박, 떴다 감았다.

말라 붙은 왼쪽 눈꺼풀 아래의 안와는 텅 비어 있었다.

알폰소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놈들이, 그놈들이 자네를 고문한 건가!”

“오른팔은 고문이었습니다.”

깊게 잠긴 목소리였다. 가래가 끓는 것 같기도 했다.

“갈리코의 원수들이 손끝부터 차근차근 저며나갔지요. 그놈들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엘코 경의 목소리는 어린아이가 놀라서 울 정도로 낮았고 생명력이 빠져나간 것처럼 나직했지만 동시에 기묘한 힘이 있었다.

“왼 눈은 꼭 그놈들 탓만은 아닙니다. 몽둥이로 얻어맞다가 나무 조각이 튀어 눈에 들어갔는데, 감염이 되어 앓다가 잃었습니다.”

엘코는 원체 차분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안의 뭔가가 죽어버린 것 같았다.

“필리프 이 천하의 후레자식—!!!”

감시하고 있을 갈리코 측의 인원에는 아랑곳도 없이 알폰소 왕자가 분노의 외침을 질렀다.

소리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그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썩을, 육시랄, 하늘을 같이 일 수 없는 철천지원수!”

만프레디 경은 말을 잊고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눈을 껌벅일 뿐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엘코 경을 위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잃고도 성공적으로 전투에 복귀하는 기사들도 있다.

우수(右手)를 잃고 좌수(左手)로 무기를 쓰는 기사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둘 다 장애를 입은 후 전장에 복귀하는 기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검사로서의 엘코의 인생은 끝났다.

“왕자님.”

엘코 경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폰소를 불렀다. 알폰소가 새빨개진 눈으로 엘코 경을 바라보았다.

“저는 만족합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살아남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엘코 경의 하나 남은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더 이상 검을 쥘 수는 없지만, 목숨을 건져 나온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그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갈리코의 후레자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습기는 이윽고 눈물이 되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왕자님께서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신 데에 대하여. 감읍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알폰소는 그만 여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엘코⋯⋯!”

그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다시피 엘코 경에게 다가가, 그의 몸통을 껴안았다.

“자네가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나에게 고마워하다니, 당치도 않아. 내가 평생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해.”

엘코 경은 고개를 저었다.

앙상하게 마른 목덜미와 움푹 팬 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갯짓에는 열병 환자 같은 기이한 힘이 있었다.

“왕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셨죠.”

그의 단어 선택은 이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분’에서 ‘그 여자’로.

“수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주군이 얼마나 많은지 전 잘 알고 있습니다. 알폰소 왕자님을 향한 저의 충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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