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사람에겐 누구나 두 얼굴이 있다
랑부예 구휼원에서 일어났던 일촉즉발의 상황은 결국 무력 진압으로 끝이 났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와 이폴리토 데 마레가 칼까지 꺼내 들고 빈민들과 대치하는 가운데 랑부예 구휼원 직원들이 뛰쳐나와 일단락된 것이다.
구휼원 직원들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찬물을 끼얹으며 빈민들을 난폭하게 진압했고, 어린이와 그 어머니, 아니면 십 대들이 대부분이었던 배식줄 사람들은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이 횃불과 마주친 쥐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현재 랑부예 구휼원의 책임자인 알바니 씨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은십자 부녀회’의 회장인 발조 백작 부인에게 깍듯하게 사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서거 이후 랑부예 구휼원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알바니 씨는 원장 자리를 제외한 구휼원 관리 중에서는 가장 높은, 구휼원의 사무처장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수용자들에게 베푸신 여러분께 이렇게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게 하다니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자세를 취하는 알바니 씨에게 로레단 남작 부인은 뭐라고 더 쏴대려고 했다.
하지만 발조 백작 부인이 짐짓 우아하게 한 손을 들어 로레단 남작 부인을 막았다.
“비올레타. 거기까지 해요.”
“하지만⋯⋯!”
“못 배운 것들이 사고를 쳐도 너그럽게 넘겨주는 것이 우리 같은 귀족의 미덕이야.”
사무처장 알바니 씨 뒤에 서 있던 기획재정담당관 카몬도는 발조 백작 부인을 한 대 치고 싶은 자신을 가까스로 눌렀다.
사고는 자기들이 다 쳐 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고고하게 사과까지 받아가려고 드는 꼴에 속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알바니 씨는 한 점 흔들림 없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귀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이폴리토가 거만하게 끼어들었다.
잘난 척할 기회와 부인들에게 잘 보일 기회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주동자는? 주동자는 그대로 내버려 둘 건가? 여기 오타비오 군이 아니었으면 우리 이사벨라가 다칠 뻔했어!”
억눌려 있던 로레단 남작 부인이 이때다 하고 튀어나왔다.
“맞아요. 주동자는 처벌을 내려야지요! 막돼먹은 가난뱅이들!”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하겠습니다.”
사무처장 알바니 씨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뒤에서 보다 못한 카몬도 씨가 한마디 얹었다.
“빈민들의 특성상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긴 쉽지 않기는 하지만⋯⋯.”
하지만 알바니 씨가 카몬도 씨의 말을 끊고 바로 붙였다.
“철저하게 뒤져서 엄정하게 처벌하겠습니다!”
책임자의 박박 기는 자세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폴리토는 으스대듯이 발조 백작 부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발조 백작 부인은 고상하게 이폴리토를 한번 바라봤을 뿐이었지만 로레단 남작 부인이 대신 무릎을 살짝 굽혀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장의 인정을 받지 못해 약간 기운이 빠졌지만 남작 부인도 나쁘진 않다. 이폴리토는 씩 웃었다.
발조 백작 부인은 거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그럼. 알바니 씨를 믿고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구휼원 직원들이 정문까지 에스코트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흥.”
귀족들이 요란하게 알바니 씨의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카몬도 씨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사무처장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원인 제공은 죄다 본인들이 했으면서 주동자를 잡아다 처벌을 하라고요? 그날 정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굶을까봐 화낸 것 외에는 죄가 없어요!”
알바니 씨는 심드렁한 얼굴인지 우울한 얼굴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표정으로 카몬도 씨를 제지했다.
“너무 그러지 마, 카몬도. 자네는 너무 대쪽같은 게 흠이야.”
그는 피곤이 더께처럼 앉은 굽은 어깨로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 소중히 넣어놨던 아몬드 비스코티를 꺼냈다.
겉에는 설탕이 두텁게 뿌려져 있었다.
- 와그작!
터질 듯이 단 과자를 입안 가득히 우물대며 알바니 씨가 말했다.
“주동자를 어떻게 잡어. 귀족님네들이 저 깽판을 쳐서 지금 빈민들이 저녁까지 걸렀는데 앞에 나선 사람 잡아갔다간 진짜 폭동 나.”
빈민에게 ‘저녁’이란 보통 사람의 ‘가족’이나 ‘집’ 같은 것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잘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게 치사하다거나 쩨쩨하다고 볼 수도 없다.
소중하게 여기는 단 한 가지를 앗아가면 누구라도 난리가 날 것이다.
알바니 씨는 비스코티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알바니 씨는 카몬도 씨에게 과자를 권하지 않았지만 카몬도 씨는 양해했다.
구휼원에서 일하는 관리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비싼 과자였는데, 저건 알바니 씨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원이다.
나눠 먹자고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조만간 죽어서 실려 나갈 사람들 있잖아. 엄청 아픈 사람들.”
“⋯⋯항상 있지요.”
“거기서 연령대 비슷한 사람 나오면 그 사람이 주동자라고 하고. 잡긴 잡았는데 불운하게 죽었다고 해. 귀족 나으리들은 그냥 분풀이하는 거니까 죽은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그 양반님네들은 아무런 관심 없어.”
알바니 씨는 두 입 만에 비스코티를 대부분 다 먹어버린 채였고, 마지막 세입째에 깔끔하게 비웠다.
그는 입안 가득 과자를 우적거리며 카몬도 씨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고, 카몬도 씨도 굽은 등으로 상사의 사무실을 떠났다.
* * *
랑부예 구휼원에서 그 난리를 친 일행은 구휼원 앞에서 해산했다.
이사벨라와 이폴리토는 마차 한 대로 추기경 자택으로 돌아갔고, 오타비오는 말을 타고 콘타리니 대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침에 바톨리니 가에 들렀다가 클레멘테의 마차를 함께 타고 구휼원까지 온 카멜리아는 클레멘테와 함께 일단 바톨리니 백작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
카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분에 겨워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기색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오타비오의 행동을 반복해서 곱씹었다.
그녀의 약혼자, 오타비오는 빈민들의 소요가 정리되자마자 카멜리아를 윽박질렀다.
“카멜리아! 어떻게 이사벨라를 그 거렁뱅이들 앞으로 밀어 넣을 수가 있어? 당신 친구 아니야?”
오타비오는 눈이 뒤집어진 상태였다. 그는 평소에 떨던 점잔이라고는 모두 까먹은 채 카멜리아를 몰아붙였다.
카멜리아는 오타비오에게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할지 몰라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걔가 왜 내 친구예요? 내가 위험한 게 먼저지 이사벨라가 먼저인가요?
결국 카멜리아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오타비오⋯⋯!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
“무슨 유령 빵 먹는 소리야? 당신이 잘못했는데 이게 왜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이야기로 변해?”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가만히 계셨던 주제에 이사벨라가 위험해지니 잘도 검을 뽑으셨잖아요!”
“보자마자 달려온 거야! 어쩜 그렇게 속이 좁아? 내가 설마 당신을 보고도 모른 척했으려고?”
“비명도 질렀는데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나요? 게다가, 내내 바로 근처에 있었잖아요! 내가 위험해졌을 때 곧장 칼을 뽑으려면 뽑을 수 있었다고!”
“당신이 검에 대해 뭘 알아? 모르면서 의심만 하면 다야? 사람을 뭐로 보길래 이런 소리를 찍찍 해대? 아니, 그리고, 나더러 멀리 가 있으라고 했던 건 애초에 당신이었다고!”
카멜리아는 남들 앞에서 약혼자와 이렇게 싸워대는 꼬락서니를 보이는 이 상황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정숙한 부인의 자랑거리는 남편의 존중이었다.
무엇보다, 이사벨라가 큰 보라색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이 모든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라비인 이폴리토 옆에 찰싹 붙어 가엽다는 표정으로 카멜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청순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에는 곤란함, 안타까움, 미안함이 엿보였지만 이사벨라 데 마레의 속성을 속속들이 아는 카멜리아로서는 그게 같잖게 보일 뿐이었다.
‘속으로는 신나게 비웃고 있을 거면서!’
이사벨라는 과연 노련했다.
오타비오와 카멜리아가 대판 싸우는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구경한 주제에, 발조 백작 부인과 로레단 남작 부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끝까지 끼어들지는 않은 것이다.
오타비오가 씩씩대며 이폴리토의 손에 이끌려 저쪽 구석으로 자리를 피하자 이사벨라는 그제야 카멜리아에게 다가와 옆에 앉더니 시원한 찬물을 한 잔 건넸다.
카멜리아는 날카롭게 이사벨라를 째려보았다. 찬물을 이사벨라의 면상에 끼얹을 기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카멜리아가 가해자처럼 보일 것이다.
이사벨라는 조심스레 카멜리아의 등을 톡톡 쓰다듬었다.
전혀 몸에 손을 댈 사이가 아닌데도 급작스럽게 와닿는 터치에 카멜리아는 소름이 끼쳐 몸을 움찔 옆으로 뺐다.
카멜리아가 티 나게 몸을 옆으로 빼자, 이사벨라는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잠시 앉은 채로 기다렸다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카멜리아의 옆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그리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멀리 구석으로 떠났다.
카멜리아가 이사벨라를 박대하는 모습은 발조 백작 부인과 로레단 남작 부인의 눈에 여과 없이 보였다.
“쯧쯧쯧.”
발조 백작 부인과 로레단 남작 부인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카멜리아의 귀에까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보나 마나 어린 여자애의 또래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처신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뻐서 욕을 먹는 가련한 이사벨라 같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카멜리아는 분에 겨워 몸을 떨었다.
바톨리니 가의 마차 안에 입을 꾹 다물고 앉은 카멜리아는 땅 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오타비오의 누나와 같은 마차에 타고 있어야 하는 이 순간은 지옥이었다.
“⋯⋯카멜리아.”
클레멘테가 그녀를 부르자, 카멜리아는 날카롭게 클레멘테를 바라보았다.
오타비오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 거라느니, 남자들은 무뎌서 잘 모를 수 있으니 네가 좀 보듬어 주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 마차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가 꺼낸 이야기는 전혀 의외의 이야기였다.
“⋯⋯이사벨라가 태도가 안 좋은 건 다들 알아⋯⋯.”
카멜리아는 토끼같이 빨개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클레멘테를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발조 백작 부인과 로레단 남작 부인도 알고 계시나요?”
카멜리아의 입장에선 나름 머리를 쓴 질문이었다.
실세인 부인들이 이사벨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는데, 정직하게 물어보기는 지나치게 꼬치꼬치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클레멘테는 그저 곤란한 듯이 미소를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클레멘테 혼자만의 생각이고, 발조 백작 부인과 로레단 남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카멜리아는 지금으로서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언니도 보셨죠! 걔가 꼬리 치는 거!”
“⋯⋯.”
“솔직히 다 알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전 그 계집애의 여우 짓이 정말로 지긋지긋해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에게 있어서 이사벨라 데 마레는 손톱 밑의 나무가시이자 목에 걸린 생선가시였다.
이사벨라는 그녀의 주변을 돌면서 그녀 때문에 자기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죄책감을 주입했고, 그걸 기화로 클레멘테에게서 사소한 이득들을 뜯어냈으며, 클레멘테가 순순히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닐 때마다 자기는 언제든지 바톨리니 백작에게 불륜을 폭로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소심한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도저히 먼저 떨치고 일어나서 이사벨라를 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
카멜리아가, 뭔가 제대로 된 한 건을 해내서 이사벨라 데 마레를 실각시켰으면 좋겠다.
수도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아니, 아예 오지의 수녀원에 처박혀 버리게.
* * *
이사벨라는 아주 좋은 기분으로 귀가했다.
중간에 사건이 생겨서 더러운 빈민 비렁뱅이와 잠깐 닿을 뻔했지만, 다 좋게 끝났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자기 약혼녀 앞에서 그녀에게 빌빌 기었고, 괘씸한 카멜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오타비오를 들이받고 말았다.
‘쯧, 참을성 없기는.’
얼굴이 아무리 예뻐 봤자 남자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른다면 하수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이사벨라보다는 떨어졌지만—조목조목 뜯어보면 분명히 예쁜 구석들이 있었다.
조형미가 뛰어나고 체구 자체가 가녀린 이사벨라와 다르게, 카멜리아는 볼살이 통통하게 붙어 있고 몸에도 살집이 좀 있는 편이라서 귀여운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도 있었다.
‘그럼 뭘 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남자 체면은 생각도 안 하고 자기 남자한테 바가지를 그렇게 박박 긁으면 볼살은 돼지 같아 보이고 볼륨은 베이컨으로 보일걸.’
발조 백작 부인 앞에서 착한 척을 한 이사벨라는 자리를 옮겨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는 양 오타비오와도 대화를 나눴다.
- “약혼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그렇지만⋯⋯. 절 구해주신 건 기뻐요.”
오타비오의 얼굴이 멍해지는 걸 보며 이사벨라는 확신했다.
이교도 사랑의 신 에로스가 오타비오의 심장에 화살을 제대로 꽂았다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인 이폴리토도 오늘만큼은 그녀의 수완에 조용히 박수를 쳤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오늘이 환상적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데 마레 대저택이 들어와서 배다른 여동생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언니.”
갈까마귀처럼 시커먼 머리카락이 우중충한 그녀의 사생아 여동생은 이사벨라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큰 훤칠한 키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분간 봉사활동은 그만둬요.”
이사벨라는 하루 종일 좋았던 기분이 와장창 깨지는 걸 느끼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니가 뭐길래 감히 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