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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78화 (178/733)

<제178화> 가주가 될 자식과 아닌 자식

“언니. 저는 이 집의 안주인 대행이에요.”

“언니? 네가 날 언니라고 생각을 하기는 해?”

사교계에서 슬슬 다시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자 이사벨라는 과거의 기세를 되찾았다.

아직 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태도가 돌아오는 것은 빨랐다.

“말이야 똑바로 하자, 넌 안주인 대행이 아니고, 금전 출납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야. 네가 정말로 무슨 우리 엄마라도 되는 줄 알아?!”

“아버지 돈으로 잘난 척하지 마라.”

이사벨라와 함께 귀가한 이폴리토 역시 험악한 표정으로 친동생의 편을 들었다.

현관에서 큰 소리가 나자 사용인들이 슬금슬금 모여 싸움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는 슬슬 이 상황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사용인들 기강을 철저하게 잡아놨다고 생각했더니 식구들끼리 언성을 높인다고 대번에 와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니. 제대로 훈련된 상태가 아니다.

집에 손님들이 와 계셔서 더 신경이 쓰였다.

이사벨라와 이폴리토가 저렇게 구는 것에 대해서는 의외로 큰 짜증이 나지 않았다.

개가 똥을 먹고 돼지가 청결하지 않은 것처럼, 저 남매는 그저 저 남매답게 굴고 있을 뿐이다.

“전 두 분의 모친은 아니지만 집안사람들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 안팎을 단속할 의무가 있어요.”

그녀는 차분하게 이사벨라와 이폴리토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타란토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는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북상 중이고요. 구휼원은 병마에 취약한 곳입니다. 언제 어디서부터 감염이 터질지 몰라요. 당분간은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이 마땅하고, 구휼원 봉사활동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집안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아요.”

“타란토의 역병? 여기서 타란토까지는 280 미글리오(약 500 키로미터)도 더 떨어져 있어!”

이폴리토가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너, 계집애라 집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 거리 개념이 없나 본데 역병이 타란토에서 산 카를로까지 올라오려면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기는 하냐? 그냥 순전히 꼬투리 잡는 거잖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쿠데타 당시에 군사 이동의 속도를 모두 확인하며 취합했던 적이 있다.

이폴리토의 빈정거림은 그저 웃기는 얘기였다. 그녀는 추호의 미동조차 없이 저 남매를 노려보았다.

“너, 내가 그렇게 미워⋯⋯?”

하인들이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이사벨라가 돌연 태도를 바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제 친오빠를 거드는 것이었다.

“네?”

밉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번 일은 미워서 벌인 일이 아니다.

“내가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했다가, 이제 드디어 보람찬 일을 하면서 내 생활을 되찾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까지 방해하고 싶었어⋯⋯?”

이폴리토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그래, 너 이사벨라가 발조 백작 부인과 친분이 생기니 견제하는 거 아니야!”

발조 백작 부인은 산 카를로에서 나름의 입지를 잡은 부인이지만 아리아드네에게 그렇게까지 절실한 인맥은 아니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더니, 오라버니와 언니는 생각이 그렇게밖에 안 돌아가나요? 이건 정말로 안전 문제예요. 그런 줄 아시고 외출은 자제하세요.”

아리아드네는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 니콜로를 호명했다.

“니콜로.”

“예, 작은 아가씨.”

“앞으로 한 달간, 이사벨라 언니와 이폴리토 오빠에게 말이나 마차를 내주지 말아요.”

이사벨라와 이폴리토는 동시에 발칵, 화를 냈다.

“뭐라고?”

“장난하냐?!”

아리아드네는 침착하게 그 둘을 바라보았다.

“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전 언니와 오라버니의 모친도 아니고 웃어른도 아니니 언니와 오라버니를 외출 금지시키거나 집에서 내쫓을 수도 없어요.”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겠어요. 말과 마차를 이용하지 못하실 겁니다. 필요하시면 걸어 다니세요.”

산 카를로에서 자기 발로 걸어서 집 밖으로 나가는 대귀족은 없다.

“야! 야!”

아리아드네는 발걸음을 돌려 손님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폴리토가 발을 내밀어 아리아드네의 앞을 막았다.

“이 계집애야, 이렇게 나대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한 대 칠 기세였다.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그녀의 직속인 주세페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이폴리토에게 덤벼들 기세였지만 집사 니콜로를 비롯해 대부분은 현재의 실세와 미래의 주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주세페가 집 안에서 칼을 꺼내 이폴리토를 제압한다면—사실 이폴리토는 운동신경이 상당했기 때문에, 주세페가 그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뒷 일이 커지게 된다.

아리아드네는 차갑게 이폴리토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 자신의 위세가 드러난 것이라고 여긴 듯 썩 으스대며 말했다.

“넌 내 가문을 대신 맡아서 관리하는 거야, 이 쥐방울만 한 것아.”

이사벨라가 이폴리토의 등 뒤에 숨어서 빠끔히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눈에 고소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이 집안을 물려받으면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뭐? 이폴리토 도련님께 말을 내주지 말라고?”

그는 이복 여동생을 때릴 듯이 주먹을 치켜들고 을렀다.

“건방진 것. 늙은 귀족의 후처로 들여보내 버리기 전에 처신 똑바로 해.”

이폴리토는 덧붙였다.

“네 왕자님이랑은 물 건너간 것 같으니까.”

뒤에서 이사벨라가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아비가 뭐 어떻게 된다고?”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그는 추기경의 정복을 입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아, 아버지!”

이폴리토는 놀라며 위협하고 있던 주먹을 대번에 내리고 등 뒤로 숨겼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이사벨라도 양순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가시면 보통 해가 져야 돌아오시니까, 오늘도 늦으실 줄 알았어요.”

“오늘은 대성황당이 아니라 왕궁에 다녀왔으니까.”

추기경은 발데사르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은 상태로 귀가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조용할 틈이 없어!”

이사벨라는 아버지의 한탄을 놓치지 않았다.

“다 아리아드네 때문이에요!”

추기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큰딸을 바라보았다. 그도 이제 슬슬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트러블은 둘째 딸이 아니라 큰딸이 일으켰다.

이사벨라는 아버지가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은 눈치챘으나, 그래도 들을 의향이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

“집안 관리를 맡았을 뿐이면서 마치 자기가 우리 엄마라도 된 양 굴잖아요!”

“아버지, 쟤가 우리더러 외출을 하지 말랍니다!”

일부 발췌와 왜곡은 이 친남매의 주특기였다. 아리아드네는 해명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 그냥 저 인간들이 다 땅속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해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국 마지못해 입을 뗐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 권한이 없는 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건 왜 나온 소리냐?”

“요새 이폴리토 오빠와 이사벨라 언니가 봉사활동을 다니고 계시는 것, 알고 계시나요?”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너희가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장남과 장녀를 바라보았다.

“요사이 남쪽에서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북상하는 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기세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음.”

이건 들어본 이야기였다.

남쪽 교구의 주교며 사제들이 아우성을 치며 산 카를로로 구휼을 요청하고 있었다.

“역병은 빈민가에서부터 도는 법입니다. 당분간은 집 안팎을 단속하고 위험한 곳에는 출입을 금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래서, 이폴리토와 이사벨라에게 빈민가에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좋게 설득해 보았니?”

아리아드네는 순간 말문이 막혀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랬죠.”

“거짓말하지 마!”

이사벨라의 뾰족한 목소리가 현관 천장을 찔렀다.

“네가 다짜고짜 이사벨라에게 ‘봉사활동은 그만두시죠’라고 했잖아!”

이폴리토가 동생을 거들어 그 틈을 타 일러바쳤다. 이사벨라가 곧장 거기에 양념을 얹었다.

이럴 때만 손발이 척척 맞는 남매였다.

“그리고 ‘그걸 왜 네가 정하느냐’라고 했더니 이폴리토 오빠와 이사벨라 언니에게 집안의 마필과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집사에게 일렀지!”

“하녀 소생 계집애가 제 주제를 몰라!”

이폴리토가 씩씩거렸다. 데 마레 추기경은 혀를 찼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지 그림처럼 보였다.

“아리아드네.”

“⋯⋯네.”

“네 판단력은 좋아. 나이답지 않아.”

다음에 나올 말이 필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렇지.

“너무 강성이야. 마치 공성추(攻城椎)를 보는 것 같구나.”

“⋯⋯.”

“어린 여아는 성인 여성이 되면서 유순함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 가정의, 한 가문의 어머니가 되어 식솔들을 덕으로 이끌고 네 남편, 네 가주를 제대로 보필할 수 있는 것이다.”

데 마레 추기경이 아리아드네에게 거의 최초로 알려주는 인생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자다운 온순함을 갖추라고 한다.

데 마레 추기경이 전생의 이사벨라를 끼고 가르쳤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건 둘의 성정이 다르기 때문일까, 두 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차별일까.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에게 한 소리를 한 후, 이폴리토와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아리아드네가 한 말이 거칠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없다.”

“아빠!”

“아버지!”

“이폴리토, 이사벨라. 당분간 빈민가 방문은 삼가도록 해라. 역병이 가라앉았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전까지는 금지야.”

“말도 안 돼요!”

이사벨라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항의했다.

“발조 백작 부인과 교우 관계를 지속하려면 봉사활동을 다녀야 한다고요!”

데 마레 추기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 그렇지.

그의 큰딸이 맨입으로 빈민가 봉사를 다닐 리가 없었다.

“제 사교계 입지는요! 이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저는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뭐라고 하건 이런 기회 못 놓쳐요! 제가 좋은 가문에 시집 못 가면 이건 다 아리아드네 탓이에요!”

“누가 망친 사교계 입지인데, 네 사교계 입지가 엉망인 걸 남의 탓을 하느냐?”

“아빠!!”

캄파 후작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마레 추기경의 말에 이사벨라는 대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차갑게 말했다.

“네 동생이 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 이해가 가는구나.”

“⋯⋯흑!”

이사벨라는 급기야 눈물을 쏟으며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아빠⋯⋯. 너무해요⋯⋯!”

그녀는 중앙 계단을 날 듯이 달려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이사벨라가 퇴장하자, 이폴리토도 사나운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면서 따라 올라가려고 했다.

“이폴리토.”

데 마레 추기경의 피곤에 쩌든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네, 추기경 예하.”

이폴리토의 사소한 반항이었다. 추기경은 이를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아들에게 말했다.

“넌 앞으로 가주가 되어야 할 아이다. 생각을 신중히 하고, 처신을 똑바로 하고, 다른 가족들에게 어질게 굴어야 한다.”

뭐야, 이 예사크의 곤님같은 말씀은. 이라는 생각이 이폴리토의 얼굴 위에 그대로 다 떠올라 있었다.

추기경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아들에게 추가 설명을 했다.

“그리고 잘 대해 주어야 하는 가족에는 네 작은 여동생도 포함이야.”

“⋯⋯.”

“다시는 주먹을 치켜들거나 이런 짓, 내 집 안에서 보고 싶지 않다. 알아들어?”

“⋯⋯예, 아버지.”

“그럼 가봐.”

추기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들을 보내 주었다.

그는 사실 장남을 데리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더라도,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 놓아야 나중에 큰일을 하게 될 때 경거망동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지금 망둥이처럼 날뛰는 저 녀석을 억지로 잡아다 서재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한들 이폴리토는 관심 없는 남의 얘기라거나 어른들 잔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아리아드네, 넌 날 잠깐 따라와라. 그라파나 한 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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