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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79화 (179/733)

<제179화> 졸업장

추기경이 장남 대신 작은딸을 서재로 부른 것은 어느 정도 즉흥적이었다.

그는 수다를 떨고 싶은 기분이었고, 아들은 수다 상대가 되어 줄 기분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작은딸이 눈앞에 있었다.

추기경은 자리에 앉아 바에서 그라파를 한 잔만 넓은 유리잔 바닥에 깔리게 따라 자신의 손에 쥐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장남이었다면 두 잔을 따랐겠지만, 이제는 막내딸이 된 작은딸에게 도수 높은 주류를 건네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아리아드네는 익숙하게 아버지에게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섭정공 체자레의 낮술을 수발들던 가락이었다.

추기경은 어린 딸이 어디서 이런 걸 배웠지, 라고 생각하며 미지근한 물을 타 독주의 농도를 조절했다.

“국왕이 제3차 십자군 전쟁에 후원을 하지 않겠다는구나.”

추기경은 ‘짠돌이 같으니’라며 욕설을 조금 중얼거리고는 그라파를 한 모금 넘겼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국경에 온 중장기병대는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이랍니까?”

“글쎄다. 중장기병대뿐만이냐? 이제는 보병대가 충원되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갔다. 좋지 않다.

“그럼, 갈리코 왕국에서 펼칠 알폰소 왕자님의 외교 역량에만 기대고 있는 건가요?”

“발데사르 후작이 내게는 비밀로 한 기똥찬 새 계획이 팔리지오 카를로에 없다면, 그런 셈이겠지.”

추기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보기에는 딱히 솟아날 구멍이 없는데. 국왕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추기경이 대낮 음주를 불사하며 나라 꼴에 대해서 탄식을 하는 동안, 아리아드네는 곰곰이 지난 생애와의 차이를 곱씹어 보았다.

전생에서 레오 3세가 데 마레 추기경을 불러서 구조 요청을 했던 시점은 지금보다 약 반년 뒤였다.

그때는 이미 필리프 4세가 제3차 십자군 전쟁에 금화를 대부분 지불한 이후였다.

그래서 루도비코 법황이 안면을 싹 바꾸어 필리프 4세를 압박할 수 있었고, 데 마레 추기경은 성황청을 움직인 대가로 이사벨라를 왕자비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불가능해.’

아리아드네가 손쉽게 왕자비가 될 기회 역시 날아갔다. 속이 쓰렸다.

그녀는 아버지가 마시는 독주 한 모금이 간절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뇌를 찌르는 알코올 한 잔이면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을 텐데.

‘이번 생에서 저번 생과 비교해 좋아진 것이라고는, 가에타 지방이 에트루스칸 왕국에 온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 정도로군⋯⋯.’

순간 아리아드네의 오른손 끝에 흩뿌려진 빛무리가 다이아몬드 같은 광채를 내뿜었다.

손톱 위에서 반딧불이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추기경의 눈치를 흘긋 살폈지만, 그는 반짝이는 것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뭐야, 잘했다고?’

빛무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황금률에 대해 생각하는데 문득 추기경의 한탄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도대체 그렇게 걷은 세금은 다 어디다가 썼담.”

“세금이 여유분이 있었나요?”

아버지의 투덜거림에, 아리아드네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썩 자연스러웠는지 데 마레 추기경은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걷어가고도 여유분이 없으면 그게 제대로 된 위정자냐! 귀족들한테서 닥닥 긁어간 지는 이미 15년이 넘었고, 최근에는 그걸로도 성에 안 찼는지 수도원이나 성황당에도 슬금슬금 간접세를 매기려고 들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곤의 것은 곤에게. <명상록>에 쓰인 그 기치 아래, 중앙대륙에서는 교회 재산에 과세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과세하지 못했다.

그 어떤 국왕도 기세등등한 성황청과 법황을 거슬렀다가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도해 볼 만한 담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오 3세는 발발이 강아지처럼 그 주변부를 돌아다니며 교회 재산 비과세 원칙을 잠탈하려는 시도들을 했다.

민가에서도 하지만 수도원에서 부수입원으로 널리 행하는 양잠에 고율의 세금을 먹인다던가, 교회라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물건, 예를 들어 ‘우물세’ 같은 것을 신설하는 식이었다.

“하여간에, 그런 짠돌이는 처음 봤다. 죽을 때 두카토를 관짝에 넣고 가려고 하는 건지, 에잉.”

남은 그라파를 단번에 마신 데 마레 추기경은 딸을 바라보았다.

“참, 손님이 왔다고.”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도 물어보시네.

“예.”

“얼른 가서 챙겨 봐라. 내가 실례를 했구나.”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 * *

“오셨어요, 아리아드네.”

데 마레 가문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발데사르 남매들이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현관에서 있었던 드잡이질까지 모두 들어버린 상태였다.

“⋯⋯제가 실례를 했네요.”

아리아드네는 응접실에 들어서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축 늘어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그녀의 목례는 손님을 앉혀놓고 장시간 자리를 비운 데에 대한 사과였지만, 이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도 읽혔다.

“아니요, 좋은 구경 했습니다.”

라파엘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답했다.

“추기경 예하의 자식 사랑이 참 대단하군요.”

줄리아가 오빠의 발을 밟았다.

- “오빠, 쫌!”

하지만 라파엘은 당당했다.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말해 보세요 아리아드네. 우리가 이런 이야기 못 할 사이입니까?”

아리아드네가 쓰게 웃었다.

심정적으로는 줄리아 쪽에 좀 더 가까웠지만, 이미 이 꼴 저 꼴 다 보인 판에 내외하는 것도 의미 없었다.

탁 터놓은 다음에 속이라도 시원한 편이 낫겠지.

“맞아요, 저희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시죠. 특히 장남 사랑이요. 저라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내쫓아 버렸을 텐데.”

“우리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라파엘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주 내밀라는 뜻 같아 아리아드네도 똑같이 집게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라파엘은 검지와 검지를 콕, 찍어 인사하듯 건드렸다.

“그리고 우리가 소수 의견만은 아닐 겁니다.”

“솔직히 우리 집이었으면 시뇨르 이폴리토는 아버지한테 쫓겨났을 거야.”

이폴리토의 이름 앞에 격에 안 맞는 경칭을 붙여 주는 줄리아가 친구의 오빠를 추켜 올려 주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집이면 내쫓겼다고 이야기하면서 내리까는 것인지 모호했다.

욕하고 싶은 마음과 친구의 친형제를 험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충돌이었다.

“대학교에서 그 난리를 치고 산 카를로로 돌아갔는데, 제가 그랬으면 저희 아버지는 정말로 절 호적에서 파셨을걸요.”

“⋯⋯네? 이폴리토 오빠가 파두아에서도 무슨 짓을 했나요?”

이번에는 라파엘이 놀랄 차례였다.

“모르셨어요? 아버님도 모르시나요?”

아리아드네는 두 눈만 껌벅거렸다.

“무슨 일인가요? 일단 저는 몰라요.”

“맙소사.”

라파엘은 유쾌하게 박수를 쳤다.

“이폴리토 데 마레는 파두아 대학에서 기말고사를 치지 않고 도망쳤어요. 군사학 학장님께서 대체 시험을 칠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고, 이폴리토가 그마저도 힘들어하자 보충수업 후 레포트로 대체할 기회까지 주셨는데 보충수업에 나타나지 않고 사라진 거죠.”

“예?”

그럼 졸업을 못 했다는 이야기인가⋯⋯?

“그레코 학장님께서 방학에 교실에 나와 하루 종일 이폴리토를 기다리셨어요.”

아리아드네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몹시 이폴리토가 칠 만한 사고였다.

“여섯 시간 동안 빈 강의실에 앉아서 기다리시고는, 얼굴이 시뻘게지시며 외치셨답니다. ‘이놈은 갱생 불가능이야!’”

“방학에 여섯 시간이나 기다려주시다니 참 교육자시네⋯⋯.”

줄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아리아드네는 집에서 알고 있는 버전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오라버니는 본인이 학생 대표로 시위를 주도해 기말시험을 단체거부했기 때문에 학사 일정에서 기말이 아예 없어졌다고 하시던데요⋯⋯.”

“하하하하!”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들은 라파엘이 박장대소했다.

“정말 그랬다고요?”

“게다가 졸업식 축사를 자기가 하게 되어 있었다고⋯⋯. 인기투표로 결정된 거라던데요.”

“맙소사.”

라파엘은 손으로 이마를 쳤다.

“이폴리토의 꿈과 희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화로군요.”

“⋯⋯다 거짓말이야? 자기가 되고 싶은 걸 읊은 거야?”

옆에서 줄리아가 물었다.

“나름대로 양심은 있네. 희망 사항을 다 읊었는데, 그래도 현실에 맞게 조금씩 고쳤어.”

라파엘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졸업식 축사는 원래 수석 졸업생이 낭송하는 거거든요.”

아리아드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수석이라고 거짓말하기엔 그나마 양심에 찔렸나 봅니다.”

“오빠가⋯⋯. 공부를 잘한다고 했으면 우선 부모님부터 의심하셨겠죠.”

데 마레 추기경과 죽은 루크레치아가 아무리 이폴리토를 애지중지했어도 그들은 아주 최소한의 진실을 가릴 능력은 있었다.

내 아들이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속은 착하다고 믿을 수는 있어도, 정량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거짓말도 7할의 진실을 섞어서 해야 설득력이 있는 법이고 거짓말은 명징한 증거 앞에서는 그 힘을 잃는다.

“그럼, 이폴리토 오빠는 졸업을 못 한 거네요?”

“그렇죠. 학점을 다 채운 게 아니니 수료생조차 아니고⋯⋯. 글쎄요. 지금쯤은 제적되었을 테니 아마 중퇴생?”

아리아드네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에게 물었다.

“이런 부탁드리기 민망하지만⋯⋯.”

정말 우애 없어 보이겠군. 형제의 뒤통수를 치려는, 속이 음흉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혹시, 오빠의 학적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걱정은 완전한 기우였다. 라파엘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알아 오면 되겠습니까?”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기필코 성사시키리라.

“아주 급하진 않아요⋯⋯.”

“최대한 빨리 알아 오겠습니다.”

라파엘은 덧붙였다.

“아, 참고로 졸업장은 이미 모든 졸업생에게 교부 완료되었어요. 이폴리토한테는 졸업장이 아마 없을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라파엘은 아리아드네가 무엇 때문에 이폴리토의 학적을 찾는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폴리토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정보도 찰떡같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 참 일 잘하는 친구야.

* * *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을 떠난 발데사르 남매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걸었다.

“오빠답지 않게 웬일이야?”

“응? 무슨.”

“귀찮은 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잖아. 오빠가 나서서 남한테 뭐 해주겠다는 거 처음 봤어.”

라파엘은 골똘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동생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기 머릿속에 굴러다니던 이야기를 불쑥 말했다.

“있잖아, 내가 수석 졸업이라는 얘기, 할 걸 그랬나?”

“뭐?”

“이폴리토 데 마레가 제가 축사 읽을 예정이었고 거들먹거리고 다닌다니 너무 웃기잖아. 내가 수석 졸업이고 내가 대표 축사했는데.”

“이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설마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내 입으로 ‘내가 수석 졸업인데요’ 하면 너무 거만해 보였을 거야. 그렇지?”

줄리아는 터무니없는 곳으로 생각이 튀어 버린 오빠를 질타하려다가, 그냥 마음 넓게 그가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그것도 욕이었으니까.

“재수가 좀 없긴 하지. 오빠치고도 좀 심하게.”

“그래, 역시 입 다물길 잘 했⋯⋯.”

- 쿵!

줄리아와 이야기를 하느라 앞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던 라파엘은 앞에서 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아!”

“꺅!”

부딪힌 상대방은 호리호리한 라파엘보다 덩치가 컸고 팔다리가 길었다.

오빠가 앞에서 급작스레 멈추자 걷다가 오빠에게 부딪칠 뻔한 줄리아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보호하듯이 여동생의 어깨를 부둥켜안은 라파엘은 사납게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앞 좀 보고 다니지?”

맞은편의 남자는 사납게 대답했다.

“니가 왜 우리 집에 있어?”

이폴리토 데 마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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