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80화 (180/733)

<제180화> 다른 가능성

네가 왜 우리 집에 있냐는 이폴리토의 질문에 대한 라파엘의 대답은 지극히 냉담했다.

“이폴리토 데 마레. 너는 자기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구나?”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 있었을 때의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과 180도 달랐다.

그는 차갑게 빈정거리며 이폴리토의 아픈 곳을 바늘처럼 찔렀다.

“뭐, 이 새끼가?”

발끈하는 이폴리토에게, 라파엘은 속사포처럼 들이부었다.

“평민 가주면 집안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야지.”

“이⋯⋯. 이⋯⋯.”

이폴리토는 라파엘을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여동생을 상대로 했을 때와 달리 손이 쉽사리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눈이 라파엘의 허리춤에 걸린 사브르를 훑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달리, 미친 쾌검이다.

이폴리토는 어려서 검술 사범의 교실이며 청소년 대회 등에서 발데사르 가의 둘째와 어울릴 때 단 한 번도 라파엘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손을 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이폴리토가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비수처럼 한마디를 더 꽂았다.

“어차피 평민이 밖에 나가서 할 대단한 일도 없는데, 집안 관리라도 자기 손으로 해야지.”

“이 새끼가!”

여기에서 이폴리토의 끈이 툭, 끊겼다. 그는 벌컥 성이 나 라파엘에게 덤벼들었다.

이폴리토가 전력으로 쇄도하는 와중에 라파엘은 여동생의 어깨를 껴안은 채 옆으로 단 한 걸음 비켜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깔끔하게 이폴리토의 공세를 피했다.

전력을 향해 달려들고도 상대를 치기는커녕 허공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인 이폴리토는 쪽팔림에,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었다.

“왜, 뽑게?”

라파엘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저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눈이다.

이폴리토는 차마 발검하지 못하고 손을 검 손잡이 위에 올린 채 씨익씨익 숨만 내쉬었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줄리아였다.

“오빠, 우리 이만 가자.”

피를 보지 않고 헤어지려면 대충 이쯤에서 양자의 체면을 세워주고 갈라지는 게 낫다.

줄리아가 오라비의 팔을 당겼다.

“친구네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실례야.”

그 말을 듣자 라파엘은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이 빨간 눈을 깜박거렸다.

라파엘이 싸울 태세를 풀고 자세를 바로 하자 비로소 여유가 생긴 이폴리토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정거렸다.

“토끼 눈깔 새끼.”

오빠의 눈이 다시 뒤집어지기 전에 줄리아는 이폴리토를 살짝 노려보고는 경고를 건넸다.

“데 마레 영식. 일전에 무도회에서 뵈었었지요.”

이폴리토는 흠칫해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다시 뵈어야지요. 오빠, 가자.”

여기서 더 개기면 평판을 난도질해줄 테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에 이폴리토도 입을 다물었고, 라파엘도 순순히 여동생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으로 나와 일 도메스티코의 안내를 받으며 기품 있는 발데사르 가의 마차에 올라탄 줄리아는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쉬며 오빠를 책망했다.

“난 오빠가 그 성질머리 고친 줄 알았지!”

“내가 뭘?”

“그 망할 귀족부심! 어휴! 아리랑은 잘 지내더니 오빠는 왜 또 갑자기 그래?”

라파엘은 이름 높은, 어찌 보면 악명 높은 귀족주의자였다.

그는 수도에서 명망 높은 후작가의 적통 아들이었고 이제는 유일한 후계자로, 최근 부상하고 있는 평민 출신이거나 하급 귀족 출신 인텔리나 상인 계급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서부터 소름 끼치게 싫어했다.

“시뇨라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스스로를 증명하셨고.”

아세레토의 사도와 정면으로 맞붙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의 사건.

이를 파두아 신학대학의 기숙사 방에서 전해 들었던 라파엘은 당시에 그녀가 댔던 교리와 근거들을 모조리 읽어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책걸상에서 촛불을 켜고 샅샅이 훑은 문헌들은 또래 소녀가 집대성했다고 생각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고 수준이 높았다.

처음에는 어린 대학자의 재목을 향한 동경이었다.

“대부분 인간은 타고난 토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 ⋯⋯하지만 간혹 잘못된 계급에 갇힌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경탄을 자아냈다.

사회성 떨어지는 책상물림 안경잡이를 상상했던 라파엘 앞에 나타난 ‘진실을 꿰뚫어 보는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생기롭고, 재기발랄했으며,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대고 서 있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난 그걸 알아보는 상대방에게는, 그런 사람이 제대로 된 싹을 틔우도록 더 좋은 토양으로 옮겨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 새싹과 토양의 알레고리는 이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산 카를로에서는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흔히들 꽃으로 비유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아리아드네가 그 어떤 꽃과도 다르다고 느꼈다.

이 여자는, 식물에 비견되기에는 지나치게 활력이 넘친다.

주체적으로 걸었고, 동물처럼 기민했으며, 사람처럼 생각했다.

그가 옮겨심어 주지 않더라도 제 발로 건너갈 위인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첫 발견자가 되고 싶었다.

혼자서도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잡고 걷는다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게 될까.

단 하나 걸리는 것은, 그의 친우인 알폰소 왕자가 아리아드네에게 푹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보았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람?’

갈리코 왕국에 결혼 협상을 위해 건너간 왕자는 아마 아리아드네를 자신의 비로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결국엔 갈리코의 밀가루 반죽이 왕비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왕의 정부 따위로 살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웠다.

‘발데사르 후작 부인.’

추기경의 사생아 따위보다는 훨씬 낫다.

옆에서 동생이 뭐라 뭐라 잔소리를 계속했지만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교단에 투신하려고 했다.

성황청의 종복이 되어 속세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높은, 영적인 세계에서 사색하는 삶이 살고 싶었다.

평범한 인간들과 부대껴 살 생각이 추호도 없던 그는 천신의 구도자, 사제로서의 미래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다른 가능성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 * *

“국왕 폐하. 몽펠리에 중장기병대장으로부터 온 보고입니다.”

필리프는 냉담한 눈길로 신하를 바라보았다.

“고하라.”

“보병 3개 연대와 중장기병대 1개 연대의 가에타 접경지역 추가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대리석처럼 창백한 필리프 4세의 볼에 홍조가 퍼져나갔다. 명백한 감격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그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때가 왔구나! 설욕을 할 때가 왔어!”

국왕의 옥좌 발치에 호화로운 푸른 벨벳 스툴을 놓고 앉아 있던 오귀스트가 오라버니의 흥분에 반색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께서 참 여러모로 도움이 되시네요.”

버릇없는 오귀스트의 어조에도 필리프는 책망하는 기미가 전혀 없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하하! 암, 고모님은 효녀시지! 제 한 몸 에트루스칸 떨거지들에게 팔아 갈리코에 역적 도당을 이길 기틀을 마련해 주시더니, 이제는 제 한 목숨 바쳐 에트루스칸을 홀라당 먹을 바탕까지 마련해 주시지 않았느냐!”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필리프 4세는 흰 뱀 같은 눈초리에 기쁨을 가득 담고 웃었다.

“뭐, 자발적으로 바치신 건 아니지만 결과는 똑같지.”

옆에서 오귀스트 공주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자, 에트루스칸 왕국의 알폰소 왕자님을 모셔와라.”

필리프 4세는 빈정거리는 어투를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협상’을 시작하지.”

미뤄뒀던 일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 * *

알폰소 왕자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필리프 4세의 부름을 받았다.

항상 어떻게든 본격적인 협상을 미루려고 들던 필리프 4세에게서 연락을 받은 것도 오랜만이었고, 실무진을 데리고 오라는 언질을 받은 것은 최초였다.

호화로운 죄수의 처소는 갑갑해서 욕창이 돋을 지경이었다.

갈리코 왕국 측의 회의 참석 통보가 약간 급박한 감이 있기는 했으나 알폰소는 항의하는 대신 따르기로 했다.

모처럼 생긴 협상장에 일단 들어서고 싶었다.

그는 협상 실무를 맡은 마르케즈 백작과, 전반적인 조율을 담당할 베르나르디노 경을 대동한 채 필리프 4세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의 입구를 통과한 알폰소 왕자는 우선 상대방의 머릿수에 놀랐다.

“어서 오시게나,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알폰소 왕자가 단 두 명만을 대동한 채 나타난 것에 반해, 창백한 피부에 미소를 얹고 기다란 손가락을 꼬나 쥔 채 중앙에 앉은 필리프 4세의 왼쪽에는 우선 오귀스트 공주가 있었다.

그리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 외에도, 양옆으로는 30여 명에 달하는 궁정 신하들이 착석해 있었다.

필리프 4세는 일어서서 에트루스칸의 왕자를 맞이하지 않았고, 필리프의 신하들 역시 앉은 상태로 알폰소 왕자를 맞이했다.

알폰소는 첫 시작부터 이를 갈며 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필리프 4세 폐하께서.”

억누르려고 해도 절로 곱지 못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알폰소가 흥분한 것을 본 필리프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자자,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나. 일에는 다 때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니겠나.”

왕은 바로 옆에 앉은 신하에게서 양피지 한 묶음을 건네받았다.

필리프는 이를 한두 장 넘겨서 확인하더니, 이를 손수 알폰소에게 건넸다.

“우리도 내부적으로 협상 세부사항을 어떻게 내놓아야 할지 몰라서 토의할 시간이 필요했어. 자, 우리의 요구 조건일세.”

알폰소 왕자는 양피지를 넘기며 갈리코 왕국 측의 제안사항들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커졌고, 아직 솜털이 송송한 목덜미에 핏줄이 섰다.

당장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꾹 참은 채, 그는 양피지를 옆에 앉은 마르케즈 백작에게로 밀어주었다.

알폰소의 기색을 살피고는 안절부절못하던 마르케즈 백작은 황급히 양피지를 받아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 무슨⋯⋯.”

노련한 외교관마저도 신음을 내게 한 양피지의 내용은⋯⋯.

“우리 갈리코 왕국은, 곱게 키워 보낸 사랑하는 적통 왕녀인 마르그리트 데 브리앙 공주의 사망에 원통함을 금할 수가 없네.”

필리프 4세가 친히 입을 열었다.

“이건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어. 에트루스칸 국왕의 한낱 정부가 감히 정비(定妃)를 독살하다니!”

전혀 슬퍼하지 않는, 국왕의 가면 같은 얼굴이 과장된 애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희극 배우들이 쓰는 피앙기(piangi) 마스크 같았다.

“마르그리트 드 브리앙 공주는 그 부덕(婦德)함으로 명성이 높으셨네. 갈리코 왕국이 곱게 사랑으로 키워 보낸 왕녀였어. 그런 그녀의 이런 처참한 죽음은⋯⋯. 이건 전적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잘못일세.”

필리프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친아들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청산유수로 혓바닥을 놀렸다.

“그래서 요구하네. 에트루스칸 왕국은 갈리코 왕국에게 공식적인 사죄의 념을 발표하고⋯⋯. 배상금 50만 두카토를 지불하게.”

50만 두카토!

마르그리트 왕비가 결혼하며 에트루스칸 왕국으로부터 받은 신부대가 10만 두카토였다.

이번에 3만 5천 명의 군사를 예사크 지방에 2년간 파견하기 위해 율덴부르크 대공이 스스로 마련한 금전이 5만 두카토였고, 그것으로는 모자라 추가적으로 갈리코의 필리프 4세에게 후원을 부탁한 금액이 15만 두카토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1109년, 남서쪽의 살라만타 왕국이 그레도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후 요구했던 전쟁 배상금도 25만 두카토에 불과했다.

갈리코 왕국이 지금 에트루스칸 왕국에게 요구하고 있는 배상금은 나라 간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전국에게 요구할만한 배상금의 두 배가 넘었다.

- 탁.

알폰소 왕자가 양피지 묶음을 대리석 탁자 위에 내리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제안이외다.”

그는 두툼한 입술을 고집 있게 일자로 다물고 필리프 4세를 노려보았다.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국모인데, 갈리코 왕국에서 되려 전쟁배상금 급의 액수를 요구한다니. 협상하실 생각이 없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알폰소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케즈 백작과 베르나르디노 경이 주군의 행동을 따랐다.

“잠깐.”

필리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우리 어린 사촌이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알폰소의 등 뒤에 필리프 4세의 목소리가 메다 꽂혔다.

“지금 그대들의 사랑스러운 조국의 국경에는 우리 몽펠리에 중장기병대 6000 기와 정예 보병대 약 1만여 명이 웅크리고 있다네.”

알폰소 왕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필리프 4세의 회의실 한가운데 등을 보인 채 우뚝 서 있었다.

“내 파발 한 통이면 내 귀여운 정예병들은 그대의 아름다운 국토를 한바탕 유린하게 될 거야.”

입을 다물고 알폰소의 대답을 기다리는 필리프 4세의 음성이 잦아든 대신, 웃음기 가득한 오귀스트 공주의 청량한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자아, 친애하는 왕자님. 이제 ‘협상’에 임하실 마음이 조금은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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