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85화 (185/733)

<제185화> 가장 바라던 것

아리아드네는 왕궁에서 행사가 열릴 거라는 소식을 전날 저녁에 전달받았다.

“⋯⋯우리 가문은 모두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을 펼쳐 보니, 행사의 내용은 오후에 있을 예식과 저녁에 있을 무도회였다.

하지만 예식이 무엇 때문에 열리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와! 아빠, 이거 귀한 거던데, 어떻게 구했어요?”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금 막 듣게 된 이사벨라는 얼굴에 희색을 띤 채 물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러운 짓을 한 대가이기는 하지만, 가문에 엄청난 득이 되는 일인 데다 큰딸마저 저렇게 좋아하니 약간 뿌듯하기는 했다.

“큰 행사이니 잘 준비하거라.”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어떤 내용의 행사인가요?”

추기경은 애매모호한 답만 내놓았다.

“꼭 정해진 특정 형식의 행사는 아닌데⋯⋯. 일종의 복권(復權)? 축하할 일이니 화사하게들 꾸며도 된다.”

“아이 좋아!”

이사벨라의 비명만 데 마레 가문의 저녁 식탁을 울렸을 뿐이었다.

* * *

행사의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데 마레 추기경의 말은 참말이었다.

일행은 궁전에 들어서서야 ‘예식’이 ‘태양의 홀’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양의 홀’은 팔라지오 카를로의 메인 홀, 즉 국왕이 국가 중대사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를 하거나 왕위 수여식, 후계자 지명 등을 공식 발표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최근의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그러한 국가 중대사가 없었다.

장식이나 격식 또한 그런 큰 행사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나 여기 처음 들어와 봐.”

예식의 상당히 앞쪽 줄에서 국왕의 선포를 듣게 된 이사벨라가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옆에 선 이폴리토에게 속삭였다.

‘태양의 홀’은 큰일이 없으면 닫혀 있었기에, 10여 년씩 사용되지 않은 상태로 지나가기도 일쑤였다.

이사벨라가 들어와 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오늘 데 마레 추기경 일가는 발데사르 후작가보다도 앞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사벨라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국가 중대사에 참여하게 되어 흥분한 것은 이폴리토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는 국왕의 선포가 흘러나왔다.

“우선. 조사 결과부터 발표하고자 한다.”

레오 3세가 입을 열자, 초대객들은 일제히 국왕을 주목했다.

그리고 국왕의 좌측에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불쑥 나타났다.

입장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나 선언 따위는 없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챘다.

엄숙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좌중이 소리죽여 웅성대기 시작했다.

- “루비나 백작 부인이잖아?”

- “‘태양의 홀’에 루비나 백작 부인이⋯⋯?”

- “설마 왕비 책봉?!”

‘태양의 홀’에 루비나 백작 부인이 주인공으로 나설 일이라고는 왕비 책봉식 정도밖에 없었다.

레오 3세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선포문을 계속 읽어나갔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가장 훌륭한 조사관들의 심층적인 조사 결과, 고인이 된 마르그리트, 에트루스칸 왕비의 사망과 루비나 백작 부인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군중의 술렁거림은 눈에 띄게 커졌다.

하지만 레오 3세는 소요에 눈살만 조금 찡그렸을 뿐, 양피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이에 짐은 그간 루비나 백작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백작 부인의 결백을 명명백백히 밝히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람들의 의구심은 이 정도로 잦아들지 않았다.

- “이게 다야?”

- “고작 이거 때문에 ‘태양의 홀’을 열었다고?”

- “이거, 혹시 그거 아니오? 갈리코 왕국 측이 루비나 백작 부인을 내놓으라고 했다지 않소. 갈리코 왕국에 보내는 외교적인 제스쳐인 거지!”

- “그래도 그렇지, 그건 칙령 하나 발표하면 되지 ‘태양의 홀’을 열겠소?”

“또한!”

레오 3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고 국왕의 말에 집중했다.

“오늘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하나 바로잡고자 한다. 이는 데 카를로 혈통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모두가 긴장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루비나 백작 부인을 왕비로 책봉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새로 낳겠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체자레 백작을 설마 적자로 인정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레오 3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짐에게는 죽은 남동생이 있네.”

이것은 사교계 호사가들에게도, 왕실 족보 연구가들에게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사람들의 술렁임이 커졌고 레오 3세는 짜증을 감추지 못한 채 인파를 제지해야만 했다.

“그만!”

소요가 뚝 그쳤다.

고요해진 ‘태양의 홀’을 만족스럽게 좌우로 훑으며, 레오 3세는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건강이 안 좋아 공식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네. 결국 젊어서 죽었어.”

- ‘이게 말이나 되나!’

‘태양의 홀’ 안에 있는 모든 초대객의 심정이었다.

적통 왕자가 태어났는데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출생 자체를 은폐하는 경우는 없다.

죽기 전에 세례를 주기 위해 서두르는 경우는 있어도.

하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태양의 홀’까지 열어 이런 헛소리를 해댄다는 것은 국왕이 단단히 작심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서서 토를 달 간 큰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나에게 다 방도가 있다’는 레오 3세의 호언장담 외에는 사전에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한 마르케즈 백작, 발데사르 후작, 콘타리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국왕은 무대에 올랐고 쇼는 시작했다.

이 호랑이가 어디까지 달릴지, 무대 아래에 선 관객은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국왕은 한 손을 내밀었다.

레오 3세가 선 단상 바로 아래에 서 있었던 데 마레 추기경은 양피지 한 장을 공손하게 국왕에게 건넸다.

40여 년 된 양피지를 구하기 위해 옛날 출생기록부의 이름 없는 귀족 한 명을 깎아내고 그 위에 오래된 잉크로 정성 들여 가필한, 특급 모조품이었다.

레오 3세는 산 카를로 교구 성직자 서법의 정수가 담긴 이 출생기록부를 높이 들어 초대객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내 남동생, 비아조의 출생기록부요.”

국왕은 못내 찔렸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까지 산 카를로 교구 성황청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진품이지.”

사람들은 일제히 데 마레 추기경을 쳐다보았으나, 추기경은 표정에 미동조차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기왕에 친 사기, 끝까지 동티나지 않는 게 남는 장사다.

“내 가여운 남동생이 그간 공식적인 행사에서 인지되지 않는 것이 가슴이 아파,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의 존재를 공식 공표하기로 하였네.”

사람들은 ‘태양의 홀’이 왜 열렸는지 슬슬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오늘 국왕의 공표는 왕실 족보를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행사의 실익을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후계 구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간 ‘비아조 데 코모 백작’이라고 알려져 있던 내 남동생을, 정식으로 ‘비아조 데 카를로’로 정정하네.”

이 말을 들은 인파는 그제야 ‘태양의 홀’이 열린 이유를 깨달았다.

이것은 새로운 가짜 동생을 창설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가짜 동생의 승급이다.

“그리고 죽은 남동생의 가족을 정식으로 왕실 가족으로 인정하네. 루비나 데 코모 백작 부인, 체자레 데 코모 백작.”

루비나의 뒤에서 흰 예복과 보라색 망토를 예스럽게 차려입은 체자레 백작이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각같이 잘생긴 모습이었지만, 어딘가가 평소와 달랐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샅샅이 훑어보다 이내 깨달았다.

오늘 체자레 백작의 가슴팍에는 왕가를 상징하는 월계수와 사슴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국왕의 폭탄 선언이 이어졌다.

“그대들은 비아조 데 카를로의 정식 혼인을 한 부인과 적통 자식으로서, 당당한 데 카를로 왕가의 일원일세.”

아리아드네는 어지러움에 휘청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쓰러질 자유조차 없었다.

지금 여기서 쓰러진다면 만인의 주목을 한 몸에 모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중심을 다시 잡았다.

‘국왕 폐하는 알폰소 왕자를 버린 거야⋯⋯!’

백번 선해한다면 비앙카의 왕위계승권을 후순위로 미뤄 필리프 4세가 알폰소 왕자의 목숨을 앗아갈 이유를 없앤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레오 3세를 아주 잘 알았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현 위정자는 그런 세심한 고려로 통치하는 자가 아니었다.

아들의 탈출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왕국을 보전하기 위해서 벌인 짓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리고 국왕이 이 웃기지도 않은 광대극을 벌인 이유는⋯⋯. 그녀가 레오 3세를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깨달음에 몸서리쳤다. 내가, 내 손으로 알폰소의 왕위계승권에 흠집을 냈다.

내가, 내 이 두 손으로 전생에서 일어났을 일에 일조했다.

아리아드네의 전율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뻔뻔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간 이 모자가 내 부덕함 때문에 고생이 많았네.”

순식간에 제수씨와 조카로 둔갑한 내연녀와 사생아가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하기 위해, 내 작위를 내림세.”

사생아라면 몰라도 왕의 조카라면 고작 백작위만 가지고 있는 것이 격에 맞지 않기는 했다.

“얼마 전에 친애하는 대귀족, 피사노 공작이 서거하면서 그 영지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었네.”

피사노 영지는 가에타 지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에트루스칸 최북단에 있는 변경 영지로서 유서 깊은 피사노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피사노 공작이 숙환으로 별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영지에 후계자가 없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에게는 적통 아들은 없었지만 시집간 딸도 있었고, 시집간 딸이 낳은 외손자도 있었으며, 사생아들은 한 다스쯤 되었고, 작위에 대한 권리 주장이 가능한 방계는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득시글했다.

그러나 적통 아들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권력으로 어떻게든 밀어낼 수 있다.

“이에 체자레 데 카를로에게 국고로 환수된 피사노 영지를 내리고, 피사노 공작위를 수여하니, 왕가의 일원으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국력을 증진키 위해 한 몸 불사를 것을 당부한다.”

체자레 백작, 아니 피사노 공작은 레오 3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오 3세는 예식용 보검을 들어 체자레의 왼쪽 어깨에 한 번, 머리에 한 번 대어 작위 수여의 예식을 수행했다.

간단한 몸짓 두 번에 불과했지만 그 함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체자레 데 카를로. 에트루스칸의 지배자, 데 카를로 왕가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 * *

‘태양의 홀’에서 체자레 데 코모, 아니, 체자레 데 카를로의 피사노 공작위 수여식을 마친 뒤, 왕궁 행사는 2부인 ‘거울의 방’ 무도회로 이어졌다.

바깥에선 슬슬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열린 회랑을 지나 ‘거울의 방’으로 향하며, 타이밍을 잘 봐서 일찍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혀 무도회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 따라란, 다라란, 단단!

국왕이 무리해서 불러모은 성대한 오케스트라가 오프닝 곡의 첫 소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도회장 안의 장식이며 준비 면면을 살핀 아리아드네는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이건 못 해도 2만 두카토 짜리 연회였다.

‘태양의 홀’을 열고, 급하게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고, ‘거울의 방’에 각종 오너먼트를 호화롭게 매달아 둔 것을 보면 3만 두카토에도 육박할지 모른다.

그것은 알폰소 구명에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다가, 하녀 안나가 있는 솜씨를 모두 부려 땋아 올린 머리를 깨닫고 이내 손을 내렸다.

‘빠져나가야겠어.’

그녀는 무도회장을 쓱 둘러보았다.

데 마레 가문의 두 딸은 무도회장 상당히 앞쪽, 댄스플로어 바로 옆에 준비된 테이블 자리를 배정받았다.

아리아드네의 바로 맞은 편에 앉은 이사벨라는 오늘 오랜만에 제대로 꾸미고 나온 참이었다.

시골 처녀 콘셉트로 항상 수수한 리넨 드레스만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은 지긋지긋했다.

‘태양의 홀’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는 그녀가 사랑하는 공단 드레스를 입기에 딱 좋은 핑계였다.

루크레치아가 집안에 군림하던 시절처럼 의류비를 펑펑 지출할 수는 없었기에 이사벨라의 드레스는 전처럼 디테일이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인 그녀답게 세련된 연한 청록색 옷감을 맵시 있게 재단해 무도회장에 있는 500여 명의 귀빈 사이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었다.

이사벨라는 무도회장의 중앙을 바라보다가, 아리아드네 쪽을 슬쩍 쳐다보고는 눈이 마주치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더 예뻐.’

붉은 장미색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아리아드네와 연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이사벨라는 색상 대비로 인해 더더욱 인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사벨라가 원하는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다시금 배다른 여동생을 자신의 액세서리로 취급하던 과거처럼 굴고 있었다.

자기보다 예쁘지 않은 아리아드네는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무도회장 정중앙에 서 있는, 체자레에게 고정된 채였기 때문이다.

‘이 무도회장 안에서 가장 빛나는 건 나야. 당신 눈에도 보이잖아?’

체자레 공작이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 데 마레 가문의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이사벨라의 예쁜 얼굴에 생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도회장 중앙 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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