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88화 (188/733)

<제188화> 알을 깨고 나오다

‘나의 유일한 후계자. 내 뒤를 이을, 단 하나뿐인 왕위계승권자.’

레오 3세가 알폰소를 애지중지 아낄 때 항상 하던 말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던 부분이기도 했다.

왕의 애정은 없어도 내 아들은 이 나라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이며, 나는 차기 왕의 어머니라는 슬픈 자부심.

그리고 그 두 분의 날개 아래에서 알폰소는 평생, 자신이 에트루스칸의 다음 세대 군주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힘든 교육도, 어려운 시험도, 괴로운 일상도 모두 참아낼 수 있었다.

그는 왕이 될 사람이었고, 왕이 될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니까.

하면 안 되는 일들도, 숨 막히게 많은 규칙도 모두 자신이 참아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아리아드네를 향한 마음을 처음에 애써 눌렀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왕의 후계자는. 자신의 사랑만을 좇을 수 없으니까.

왕조의 중흥과 나라의 번성을 위해, 합당한 혈통을 타고났고 급에 맞는 지참금을 지니고 오는 군주의 딸과 결합해야 하니까. 그런데…….

‘체자레 데 카를로. 레오 3세의 장자, 알폰소 데 카를로의 형.’

투둑.

알 껍질이 깨어진 느낌이었다.

알폰소는 더 이상 유일무이하지 않았다. 왕좌를 책임져야 하는 단 하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그가 타고났다고 생각했던 의무와 특권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라는 사람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 하나가 지금 허물어져 내렸다.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알폰소 왕자를 본 라리에사 대공녀의 입가에 천진하고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상대에게 영향력을 끼쳤다는 데에 만족한,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유아적인 이기주의.

레오 3세가 체자레에게 인정한 것은 사실 ‘왕자’로서의 인지가 아니라 ‘왕자의 사촌’이라는 신분이었다.

체자레 데 카를로는—그 새로운 성씨에도 불구하고—그저 알폰소 왕자의 뒤에 따라오는, 2순위 왕위계승권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알폰소를 상처입히고 싶은 마음에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말하지 않고 숨겼다.

알폰소는 산 카를로에서, 타란토에서 그녀를 박대하고 하대하고 눈물짓게 했다. 이제는 그가 괴로워할 차례였다.

전부 다 갚아 줄 것이다. 그녀가 아팠던 것만큼, 아니, 거기에 이자까지 붙여서 더욱.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당신 형에게 계승권이 생겼으니 이제 당신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라리에사가 외드 대공의 집무실에 있는 수첩을 몰래 펼쳐봐서 알게 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외드 대공의 이 말은, 중간에 2순위 계승권자인 체자레 공작이 생겼으니, 알폰소 왕자를 살해하고 비앙카 공녀와 결혼해서 적법한 계승 순서에 따라 에트루스칸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필리프 4세의 계획에 지장이 생겼다는 뜻으로 한 필기였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그 깊은 뜻까지 다 파악할 정도로 현명하지도 못했고,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녀는 알폰소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앞뒤 맥락에 대한 정보를 차단당한 알폰소 역시, 라리에사의 이 말을 외드 대공이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레오 3세에게 더는 효용이 없다’고 평가한 것이라고 알아들었다.

심장이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에 그는 소리치거나 드러내놓고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마치 풍화된 조각상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꺼풀과 그 아래에 있는 물기 있는 눈동자가 아니라면 모두 빨려 나간 생기에 알폰소가 사람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힘들었을 것이다.

라리에사는 그런 알폰소 왕자를 앞에 두고 쐐기를 박듯 선언했다.

“당신을 구해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그녀는 알폰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요.”

그리고 한참 동안 방 안을 고요한 침묵이 덮쳤다.

일생일대의 제의를 한 라리에사에게 이 침묵은 죽음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알폰소⋯⋯?”

그녀는 희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보일 수 있었던 대범함이었다.

라리에사가 신분과 작위를 빼고 알폰소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힘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알폰소는 답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라리에사는 이제는 숫제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필리프 4세 폐하께서는 당신을 여기에 가둬놓고 죽여버릴 생각이에요!”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와서도 내 손을 선뜻 잡지 않는 것인가.

“나와 결혼해. 나와 결혼하면 발로아 대공저로 옮길 수 있어요! 아니, 수도 몽펠리에에 남아 있는 게 싫다면 발로아 영지로 나와 함께 내려가면 돼요. 이 감옥에서 빼내 줄게요. 내 손을 잡으면, 그럴 수 있어요!”

알폰소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지만 라리에사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가시처럼 마른 손을 알폰소에게 내밀었다.

알폰소의 눈앞에 하얗고 깡마른 손과 손목이 들이밀어졌다.

그는 이것과 비슷한 것을 갈리코로 출발하기 직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아리아드네.’

가슴 아프게 말랐었던 그의 하나뿐인 여인.

라리에사는 푸석푸석한 피부 아래로 대나무 마디처럼 길쭉한 손마디를 가지고 있었다.

알폰소는 지금이라도 그 위에 아리아드네의 손을, 가녀린 손목을 덧그릴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 가지처럼 낭창낭창하고 부러질 듯하면서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알폰소의 상념을 라리에사의 뾰족한 목소리가 끊었다.

“혹시, 에트루스칸에 두고 온 그 추기경의 사생아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정답이었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들킨 알폰소의 동공이 커졌다.

그리고 그 동요를 잡아챈 라리에사는 자신의 의심을 확정적으로 굳혔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로 알폰소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기의 유일한 구명줄을 눈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에요? 어디서 굴러먹었을지도 모르는 서출 잡것 때문에⋯⋯!”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

라리에사 대공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오 3세가 자신을 버렸다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말을 끊지는 않았던 알폰소 왕자다.

그랬던 그가, 추기경의 서녀를 입에 올리자마자 견디지 못했다. 라리에사의 충격은 찰나에 불과했다.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녀의 입가는 심술궂은 미소를 띠며 칼날 같은 단어들을 내뱉었다.

“불쌍한 사람.”

지금 알폰소 왕자를 가장 상처입힐 수 있는 말들이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당신을 배신한 건 양국의 국왕이신 당신 아버지와 당신의 사촌뿐이 아니야. 바보 같기는⋯⋯.”

“⋯⋯!”

흔들리는 알폰소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라리에사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때려 넣었다.

잔인한 쾌감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 뇌를 두들겼다.

“당신의 배다른 형님이 도대체 어떻게 국왕 폐하의 인지를 받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알폰소는 망부석처럼 멈춘 채 라리에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라리에사는 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온전하게 주목받는 기분을 즐기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외쳤다.

“당신의 ‘사랑’이 국왕 폐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답니다! 체자레 백작을 아들로 인지하셔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들어본 보고 문서에 ‘미확인 정보’로 추가 기재된 사항이었지만 라리에사는 그 진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진실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알폰소만 믿는다면 그것은 진실보다 더 강한 진실이 되리라.

“그뿐만이 아니에요!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체자레 데 카를로의 인지 기념 무도회에서 그와 첫 춤을 함께 추었지요!”

첫 춤.

알폰소가 라리에사와 봄의 왕실 무도회에서 첫 춤을 추었을 때 아리아드네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몹시 서운해했다.

그래서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무도회의 ‘첫 춤’에 얼마나 큰 의미부여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라리에사는 여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지금 산 카를로에는 체자레 데 카를로의 약혼 상대가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될 거라는 풍문이 파다하답니다!”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왜 그대를 배신한 자들에게 목을 매고 있나요? 당신에게 남은 건 저, 라리에사뿐이라고요!”

그녀는 품에서 양피지로 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전 당신을 구할 수 있어요!”

라리에사는 그 종이를 알폰소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서명해요.”

알폰소의 흐려진 눈에 서류에 적힌 글씨의 일부가 보였다.

“⋯⋯약서.”

“혼인서약서예요.”

양피지에는 ‘에트루스칸의 왕자이자 레오 3세의 장자인 알폰소 데 카를로와 발로아 대공 외드의 장녀인 라리에사 드 발로아가 혼인을 하며, 지참금과 신부대는 향후 상호 합의 하에 결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목은 혼인서약서지만 실질은 당신의 구명줄이에요. 유일한.”

그녀는 펜에 잉크를 찍어 자기의 이름 란을 채우고 그 뒤에 자필 서명을 했다.

“자, 저는 이제 당신과 한배를 탔어요.”

그녀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움직이지 않는 알폰소를 바라보며 호소했다.

“저도 쉽게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일. 저와 혼인서약서를 써야 우리 아버지께서 움직이실 거라고요!”

라리에사는 깃펜에 잉크를 찍어 알폰소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알폰소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길었고 깃펜 끝 묻은 잉크가 말라가고 있었다.

펜촉 끝의 잉크가 덩어리질 때쯤 알폰소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핑계일 뿐이지. 아닌가, 발로아의 대공녀? 그대는 그저 나를 갖고 싶은 게 아닌가?”

라리에사는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돌렸다. 대놓고 아니라고 말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와 혼인하지 않는 이상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위해 국왕 폐하와 대치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외드 대공과 협의는 된 일이고?”

알폰소의 눈이 드디어 천천히 깜박였다. 황금빛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흔들렸다.

어렸던 왕자는 지금 고치를 깨고 나온 나비 같았다.

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이 나왔다.

“발로아 대공녀 라리에사. 난 당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 당신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어. 일단 내가 이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면 그때부터 어떻게 당신 아버지를 설득할지 고민하려고 했을 거야.”

정답이었다. 라리에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한다손 쳐. 과연 당신 아버지가 날 무사히 꺼내줄까?”

“어떻게든 하게 만들게요! 어떻게든⋯⋯!”

아버지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건, 어머니 앞에서 목숨으로 협박을 하건, 어떻게든 성사시키고야 말 것이었다.

라리에사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지금처럼 뭔가를 강렬하게 원해본 적이 없었다.

언니 수잔느에 대한 질투도, 오귀스트 공주에 대한 미움도, 그녀의 매일을 채웠던 권태와 무력감도 알폰소 데 카를로를 손아귀에 넣기 직전까지 온 지금 이 상황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폰소를 제외하면 라리에사에게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알폰소 왕자는 깃펜을 집어 들었다.

“라리에사 대공녀. 난 여기서 나가기를 원하오. 하지만 발로아 대공저로는 안 가.”

“그럼 발로아 대공령으로⋯⋯!”

“갈리코 국왕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아.”

알폰소의 손에 쥐인 흰 깃털이 가을바람에 흔들렸다.

라리에사는 목이 탔다. 저 깃펜이 이 종이에 사인만 해준다면⋯⋯!

“난 국경을 넘어 나갈 거야. 당신이 당신 아버지와 상관없이 날 국경 밖으로 빼 줄 수 있는 날, 이 서류에 서명하도록 하겠소.”

알폰소는 달칵, 깃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피지 서류를 두 손으로 들어, 북 찢으려고 했다.

“잠깐!”

라리에사가 그를 제지했다.

“⋯⋯아버지의 조력 없이도 당신은 갈리코 왕국을 떠날 수 있어요. 오늘 밤에. 기회는 오늘 밤뿐이에요.”

왕자의 청회색 눈이 대공녀의 창백한 피부를 훑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초리였다.

“율덴베르크 대공이⋯⋯. 내일 새벽 일찍 왕궁을 떠나요. 후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예사크로 출정한다고 해요.”

율덴베르크 대공은 그의 기사단 300여 명과, 보병대 1000여 명을 대동하고 몽펠리에 궁을 찾았다.

그는 수도 몽펠리에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라미앙에서 주둔시켜놓은 나머지 병력과 합류해, 캐러밸과 코그선으로 구성된 범선함대를 타고 예사크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팔레 드 몽펠리에는 그 자체로 미로이자 성채이고 수도 몽펠리에는 궁전의 연장선이에요. 단독으로 달아나면 절대로 수도를 떠나지 못할 거에요. 율덴베르크 대공의 군대가 떠나는 혼잡한 틈에 섞여서 나가요.”

라리에사가 생각한 것은 군대의 소요를 틈타 알폰소가 단신으로 몽펠리에 궁을 탈출하는 거였다.

하지만 알폰소의 그림은 달랐다.

“그럼.”

알폰소가 요구했다.

“당신이 오늘 새벽 네 시에 이곳에 와서 우리를 어떻게든 풀어줘. 나만 나가면 안 되고 내 기사들까지 함께 나가야 해.”

“그, 그런⋯⋯.”

알폰소를 여장이라도 시켜서 몰래 데리고 나갈 작정이었던 라리에사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에게는 건장한 기사 십여 명을 몽펠리에 궁 바깥으로 빼낼 수완이 없었다.

알폰소 왕자는 차가운 눈으로 라리에사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매수할 재간이나 자기 사람을 부릴 능력이 없으면⋯⋯.”

사랑이라고는 1 온시아조차도 들어 있지 않은 냉랭한 시선이었다.

“당신 손으로 궁전에 불이라도 질러. 날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알폰소 왕자는 양피지 서류를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밀었다.

“이건 오늘 새벽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인하겠어.”

라리에사는 성물함이라도 받는 것처럼 남편의 서명란이 비어 있는 혼인서약서를 받아들었다.

“성사시키지 못하면. 다시는 날 볼 생각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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