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서명
“⋯⋯왕자님.”
야심한 밤에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만프레디 경은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더는 참지 못하고 알폰소 왕자를 불렀다.
긴장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진 지 오래였다.
“그 대공녀님이 과연 오늘 밤에 나타날까요?”
여기서 가장 긴장했을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알폰소 왕자였겠지만, 왕자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젊은이가 아니라 달관한 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기다려 봐야지.”
알폰소 왕자의 곁에서 우울한 표정의 엘코 경과 침중한 표정의 베르나르디노 경이 대기를 지속했다. 모두 군장을 갖춘 채였다.
다행히 그들의 기다림은 답변을 받았다.
새벽 네 시를 10여 분 앞둔 시점에, 바깥에서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왕자와 기사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바깥의 소란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군인들이 뛰쳐나가는 무거운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저건 분명히 실크 신발을 신고 궁전을 사뿐히 돌아다니는 시녀나 시종의 발소리와는 달랐다.
“경비 인력이 빠진 것 같지?”
끄덕.
기사들이 일제히 긍정했다.
“나가자.”
알폰소 왕자는 검을 빼어든 채 고요히 처소의 문을 열고 복도로 한 발을 내디뎠다.
원래 귀빈용 숙소인지라 문에 별도의 잠금장치는 달려 있지 않았지만 숙소 주변으로는 알폰소 왕자를 감시하는 군인들이 가득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이 났다는 소리에 그들 중 상당수는 불을 끄러 뛰쳐나갔고, 복도에는 단 세 명의 간수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푹!
알폰소 왕자의 검이 가장 가까운 곳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간수의 등을 찔렀다. 그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챙강!
만프레디 경은 그보다 더 바깥쪽에 있던 두 번째 간수의 목을 날렸고,
- 퍽!
- 콰앙!
손발이 불편한 엘코 경과 나이 든 베르나르디노 경은 합심해서 둔기로 세 번째 간수의 머리통을 부쉈다.
그들 뒤로는 나머지 기사들이 조용히 따라 나왔다.
좁은 복도라 열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고, 어려서부터 손발을 맞춰온 그들은 대화 없이도 알아서 최적의 위치를 찾아 들어갔다.
알폰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몽펠리에 궁의 지리에 익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궁전은 다 그 구조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율덴부르크 대공의 기사 300명과 보병대 1000명이 궁 내에 주둔해 있을 만한 곳은 한 곳뿐이었다.
궁전의 후원. 평소에는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주로 열병식 등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후원 쪽으로 가자.”
“저⋯⋯. 왕자님.”
베르나르디노 경이 알폰소를 멈췄다.
“저기 길잡이 양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달려오는 중이었다.
정말로 자기 손으로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기름을 덮어쓰고 손에 부싯깃을 든 그녀는 원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기어이, 가시는군요.”
알폰소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간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라리에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가실 땐 가시더라도 약속은 지키고 가세요.”
알폰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라리에사는 품속에 곱게 갈무리해뒀던 양피지를 꺼내어 알폰소에게 대뜸 내밀었다.
양피지를 받아든 알폰소는 잠시 머뭇거렸다.
옆에 서 있던 만프레디 경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이런, 펜과 잉크가 없네.”
굳이 갈리코 어로 말했으니, 라리에사 대공녀 들으라는 소리였다.
라리에사는 입술을 깨물며 만프레디 경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이빨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물어뜯었다.
피가 튀겼고, 선혈이 흘렀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알폰소에게 내밀며 재촉했다.
“자, 여기요.”
이쯤 되니 더 이상 뒤로 뺄 요량도 없었다. 알폰소는 이를 악물고 라리에사의 피를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묻혔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느낌에 라리에사는 전율했다.
상처가 닿아서 아픈 것인지, 아니면 운명적인 만남으로 전류가 통한 것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라리에사의 희열은 무시한 채, 알폰소는 서류의 기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정자체로 쓰고, 날인란에 사인을 했다.
‘됐다!’
라리에사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억지로 받아낸 혼인서약서지만, 혼인서약서는 혼인서약서다.
그녀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그녀의 ‘남편’에게 말했다.
“부군, 저를 따라오세요. 율덴베르크 대공의 군대는 몽펠리에 궁 후원에 주둔하고 있어요.”
알폰소 왕자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혼인서약서에 서명까지 했는데 라리에사에게 추가적인 효용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짜증이 나게 했고,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에 적지않이 놀랐다.
‘부군’의 속도 모르고, 라리에사는 밝게 물었다.
“후원까지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기사분들이시니까, 아무래도 기병대 사이에 섞이는 게 낫겠지요?”
알폰소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저열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고, 라리에사와 감정을 교류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병대는 인원이 적으니 보병대의 짐 속에 숨는 편이 나아. 두 부대가 따로 숙영하고 있다면 보병대 쪽으로 안내해 주시오.”
“네!”
그녀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라리에사는 아무래도 기뻤다.
그녀의 길 안내를 따라 일행은 묵묵히 몽펠리에 궁의 샛길을 빠르게 주파했다.
가는 길에 타인의 눈에 뜨였을 경우 알폰소 왕자의 검은 망설이지 않았다.
미레이유 공작을 죽이고 괴로워했던 것은 마치 전생쯤의 일이기라도 했던 듯이, 왕자의 검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순찰하는 근위병은 물론이고 야간에 심부름 가던 시종이나 하인까지 죽어 나가는 상황에 새파랗게 질렸지만 일부종사를 결심했는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저기에요!”
라리에사의 지목에 일행은 드디어 발걸음을 멈췄다.
수많은 텐트가 쳐진 대규모 숙영지였다.
밤에 더 가까운 이른 새벽이라 아직은 보초병을 제외하고는 다들 잠에 취해 있었지만 삼십 분 안에 곧 기상하고 출병 준비를 한 뒤 두 시간 안에 이 광장을 뜰 것이다.
“어디가 좋을까요?”
베르나르디노 경이 물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숙영지를 훑은 만프레디 경이 의견을 냈다.
“군장을 싣는 수레 쪽이 가장 출입이 적지 않겠습니까? 식량 수레는 아침을 만든다 뭐 한다 하며 사람이 들락날락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만프레디 경에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엘코 경이었다.
“⋯⋯북쪽 사람들은 행군 시에는 아침에 곡물을 먹지 않습니다. 우유에 육포로 때우고 행군하더군요.”
갈리코 야만인들에게 반년 가까이 포로 생활을 하고 얻게 된 깨달음이었다.
“행군 당일 아침에는 곡물 수레를 건들지 않을 겁니다. 다만 오늘이 출발 당일인 만큼 군장 수레는 마지막 점검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정은 알폰소 왕자의 몫이었다. 그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음. 곡물 수레 쪽으로 숨어들기로 하지. 그쪽이 대수도 더 많고 외곽이라 안 들키고 들어가기도 좋겠어.”
기사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세 명씩 네 팀으로 갈라지기로 하십시다. 엘코 경은⋯⋯. 나와 함께 가지.”
몸이 불편해서 온전하게 한 사람 몫을 하기 힘든 엘코 경을 배려한 구성이었다.
- “예! 왕자 전하!”
기사들이 목소리를 죽인 채, 하지만 힘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세 명씩 소그룹으로 갈라져 각자 은신할 수레를 골라 떠났다.
알폰소 역시 보초병의 눈을 피해 들어갈 수레를 찾고 있었다.
이때 헤어질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한 라리에사 대공녀가 알폰소 왕자를 불러 세웠다.
“왕자님.”
알폰소는 대답 없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낭군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라리에사는 그 차가운 눈빛에 차마 그 호칭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꼭 할 말은 있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알폰소 왕자는 이번에도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에사에게는 거짓말할 심력조차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라리에사도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혼인서약서가 있지 않은가. 알폰소 왕자는 이제 그녀의 남자였다. 그녀만의 남자.
그가 갈리코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왕국의 임금으로 즉위하더라도 그는 언젠가 라리에사를 불러들여야만 했다.
예삽교 세계에서 파문당하지 않고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기능하려면 천신의 축복 아래에서 이루어진 혼인을 존중해야 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갈리코의 대공녀 신분이라면.
“몸 건강하세요, 낭군님.”
라리에사는 기어이 입 밖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알폰소 왕자는 굳은 표정으로 라리에사 대공녀를 뒤로 한 채 율덴부르크 대공의 병영 속으로 숨어들었다.
* * *
- “출발한다!”
왕자와 그 일행은 알아듣지 못하는 슈테른하임 어로 출발을 알리는 군령이 한 차례 울린 후, 왕자와 기사들을 태운 곡물 수레는 천천히 포장된 돌길을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 별이 떠 있을 시간이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상황 전달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알폰소는 알지 못했지만, 숨어들 장소로 보병대를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율덴부르크 대공의 기병 100기는 오전 일찍 대공과 함께 갈리코의 국왕과 출정식 행사를 치른 후 뒤늦게 출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행군 속도가 느린 보병대는 새벽같이 출발해 먼저 항구도시 라미앙으로 향하고, 대공과 기병대는 행사 이후 말을 달려 라미앙에서 만난다.
한 시라도 시간이 아까웠던 대공의 복안이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왕자와 그 일행은 각기 불안에 떨었다. 만약 탈출하는 길에 들키거나 잡히면 어떡하지?
그들은 도망쳐 나오는 길에 이미 열 명이 조금 안 되는 갈리코 궁정 인사들을 죽였다.
탈출했다는 사실이 지금쯤은 들통났을 것이었다.
갈리코 국왕의 손에 잡히면 다음번은 귀빈의 탈마저 벗겨진 채 지하 감옥행이다.
‘배에 오른 뒤로도 안전하진 않아. 바다 위에서 일주일 정도는 지난 후에 잡혀야 하는데.’
출항하자마자 잡힌다면 율덴부르크 대공은 알폰소 왕자를 다시 필리프 4세에게 돌려보낼지도 모른다.
함대 전체가 출발해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들켜야 대공에게 갈리코로 회항한다는 옵션이 사라진다.
‘제발. 무사히 출항할 수 있길.’
그들의 염원 속에 일행은 수레 위에서 네다섯 시간은 족히 흔들렸다.
라미앙까지는 140 미글리오(약 30 키로미터) 정도 된다고 하니 슬슬 항구에 도착할 때였다.
- 덜컹!
수레가 크게 흔들리더니, 멈췄다.
알폰소는 하늘에 대고 기도했다.
제발, 수레째로 범선에 싣자고. 알폰소 왕자와 만프레디 경, 엘코 경은 각자 곡식 포대를 하나씩 뜯고 그 안에 들어가 숨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감쪽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수레 안쪽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은 없었다.
왕자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바깥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 모두에 촉각을 세웠다.
- 흔들!
다시 한번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배에 실으려나 보다!’
알폰소는 간신히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제발, 제발, 이대로⋯⋯!
- “단장님, 마차가 뭐에 걸려서 안 움직이는데요?”
- “무게가 다른 마차들이랑 다른 거 아냐? 아까 한 대도 그러더니만⋯⋯.”
- 덜컹!
마차가 한쪽으로 푹, 꺼졌다.
- “바퀴 축이 빠졌습니다!”
- “이런! 마차를 통째로 들어서 옮기긴 너무 무거워. 이 마차만이라도 안에 있는 짐을 따로 빼서 실어야겠다!”
- “예! 인부들을 데려오겠습니다.”
- “인부는 무슨! 아직도 본국에 있는 줄 알아? 너희들이 직접 해! 대공 각하께서 도착하셨다. 빨리 출항 준비를 완료해야 해!”
알폰소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마차 주변을 왁자지껄하게 메웠다.
그리고 마차의 두꺼운 방수포 휘장을 젖히고 빛이 확,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으윽!”
신음소리가 들렸다. 엘코 경의 목소리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포대 안에 숨어서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알폰소 왕자는 초조하게 귀만 기울였다.
- “단장님! 여기 사람이⋯⋯. 기사가 숨어들어 있습니다!!”
마차의 축이 빠지며 엘코 경이 숨은 포대가 굴러떨어졌고, 갑옷의 일부가 바깥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 “뭐라고?!”
군인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포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