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90화 (190/733)

<제190화> 자비

- “단장님,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슈테른하임의 기사가 가쁜 목소리로 윗선에 보고를 올렸다.

부대 내에 외부인이 숨어들어왔다는 이야기에 삽시간에 긴장감이 흘렀다.

- “외국인 기사 같습니다!”

상대가 군인이라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파이? 적군?

- “대공 각하께 바로 보고드려!”

- “예!”

보병들이 마차 주변을 원형으로 에워쌌다.

포위망이 완성되자마자 슈테른하임의 기사 네 명은 마차 위로 뛰쳐 올라가 곡물 포대째로 엘코 경을 잡았다.

- “잡았다, 요놈!”

- “한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 샅샅이 뒤져!”

만프레디 경, 알폰소 왕자가 차례대로 마차 안에서 끌려 나왔다.

- “포박해라!”

기사 여럿이 밧줄을 들고 달려들었다. 알폰소 왕자는 눈을 감았다.

내 운은, 여기까지인가.

“출항도 하기 전에 이게 무슨 일이냐!”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찬에서 한 번 만났던 슈테른하임의 군주, 율덴부르크 대공이었다.

그리고 알폰소 왕자를 먼저 아는 체한 것은 율덴부르크 대공 쪽이었다.

“당신은⋯⋯? 알폰소 왕자 전하⋯⋯?”

라탄 공용어였다. 밧줄에 꽁꽁 묶여 항구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알폰소 왕자가 고개를 쳐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엉클어진 금발과 짙은 청회색 눈이 율덴부르크 대공의 시선과 마주쳤다.

“율덴부르크 대공 각하.”

언제나 단정한 율덴부르크 대공은 지금 적지않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예삽교 군주국, 즉 오랑캐를 대상으로 한 성전(聖戰)에서의 동맹국인 에트루스칸 왕국의 후계자가 말을 탄 자신의 발밑에 포박당한 채 꿇어 앉혀져 있다.

동맹의 왕자이니 당장 풀어주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성전의 후원자인 갈리코 왕국의 ‘국빈’이자⋯⋯. 인질이었다.

그리고 율덴부르크 대공과 그의 군세는 아직 갈리코 땅에 있다.

“왕자 전하. 여기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율덴부르크 대공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자신이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저희는 예사크 땅으로의 출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왕자 전하께서는 몽펠리에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후원자를 거스를 수는 없다.

“대공 각하.”

알폰소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예사크로 데려가 주십시오.”

율덴부르크 대공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

“예사크로 출정해, 이교도 오랑캐 놈들을 깨부수는 성전에 동참하도록 해주십시오.”

당황한 대공을 앞에 두고, 왕자의 맑은 청회색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갈리코의 국빈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초대한 집주인에게 돌아가셔야지요. 그대의 아버지께서도 아들이 믿을만한 손에 있기를 바라지 전쟁터로 달아나버리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의 아버지는!”

쉬어버린 알폰소 왕자의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며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가닥가닥 조각난 그의 믿음과도 같았다.

“애첩을 위해 나를 버렸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던 율덴부르크 대공은 침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이 젊은 왕자도 드디어,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레오 3세가 에트루스칸의 배상금 요구를 거절한 것은 여러 층위가 있었지만, 결론만 떼어 보자면 정부(情夫)인 루비나 백작 부인을 갈리코 왕국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적장자를 갈리코에 남겨둔 것은 맞다.

애첩의 아들까지 왕위계승권을 인정해 주었으니 저 해석에 더더욱 힘이 실렸다.

“대공께서 ‘믿을 만한 손’이라고 칭하시는 나의 사촌은.”

알폰소 왕자는 시의적절하게 입을 열었다.

“신의를 잃고 제 목숨을 노리고 있나이다.”

“뭐라고요!”

율덴부르크 대공은 크게 놀랐다.

알폰소 왕자는 필리프 4세의 친척이자, 외교관으로서 파견된 알폰소 왕자를 맞이한 국왕이기도 했다.

알폰소 왕자의 살해 모의는 둘 중 어느 입장에서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금기였다.

“설마 필리프 4세가 그렇게까지⋯⋯. 그도 당당한 예삽교 군주의 한 명입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알폰소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나의 사촌은 자신의 죄악을 전시하며 한 점 부끄러움을 모르고, 훌륭한 예삽교 군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에게는 천신님을 향한 두려움이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을 저는 그 만찬장에서 알았습니다.”

필리프 4세와 오귀스트 공주의 모습을 상기한 율덴부르크 대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수치를 모르는 작자들이었다.

색에 무딘 대공의 눈에도 그들의 관계는 우애 좋은 오누이보다는 확실히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관계였다.

알폰소 왕자는 대공을 향해 호소했다.

“그가 제 식사에 미량의 비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만한 출처로부터 들었습니다.”

라리에사는 성품이 믿음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접할 수 있는 정보량을 고려해 보았을 때 믿음직한 출처이기는 했다.

“대공, 제 세계가 무너졌습니다. 신실하다 믿었던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한 악덕을 즐기고 있었고, 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제 등에 칼을 꽂았나이다.”

율덴베르크 대공에게 간청하는 알폰소 왕자의 낮게 가라앉고 쉬어버린 목소리에는 간절한 호소력이 있었다.

“제가 천신님께 죄를 지은 것일까요?”

물기 어린 젊은 왕자의 눈길에, 사십 줄의 대공은 사려 깊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귀한 자의 아들이여, 천신께서는 간혹 우리에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 젊은 왕자는 지나치게 많은 시련을 한 번에 맞이하는 중이었다.

인생에는 가끔 안 좋은 일이 몰려올 때가 있다.

율덴베르크 대공은 인생 선배로서, 젊은 왕자를 위로하고 싶었다.

“고난은 꼭 우리가 이미 지은 죄의 죗값이 아니라, 천신께서 우리를 좀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 크게 쓰시고자 하는 안배의 일환일 경우도 많습니다.”

‘안 좋은 일’로 묶어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엄중한 사태들이긴 하지만, 인간에 의한 배신은 왕위계승권을 쥔 자가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겪어내야 하는 숙명이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헤자즈 사람 이요브의 우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나 천신께서는 신실함의 증거를 요구하셨습니다.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식들마저 병마에 희생당한 후 본인조차 죽을병에 걸려 절체절명의 처지에 처한 이요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천신께서 내리시는 그 어떤 고난에도 그분의 선한 뜻이 깃들어 있을지니, 끝까지 굴하지 말고 천신의 구원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알폰소 왕자는 율덴부르크 대공의 마지막 말에 답했다.

“대공 각하. 제게, 천신님의 고난을 제가 더 큰 그릇으로 클 수 있게 해줄 시련으로 바꿀 기회를 주십시오.”

“⋯⋯.”

왕자의 청회색 눈이 간절하게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제가 예사크 땅으로 가 이교도들의 목숨을 거둬 천신께 봉사하고 부역할 기회를 주십시오.”

율덴부르크 대공은 말이 없었다. 알폰소 왕자는 재차 대공에게 읍소했다.

“저는 제 한 목숨뿐만이 아닙니다. 제 기사들이 제게 딸려 있습니다.”

알폰소 왕자의 뒤에는 함께 묶여 있던 왕자의 기사 두 명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애꾸에 한쪽 팔이 없었다.

율덴부르크 대공은 자신이 예사크로 출정하며 집에 남겨두고 온 십대 초반의 아들에게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아비가 없는 동안 슈테른하임 공국의 방향타는 네가 잡는다.

네 신하와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라. 장애인과 불구, 과부와 노인을 잊지 말고 항상 네 가족처럼 챙겨라.’

대공비의 손을 꼭 잡은 열두 살 난 그의 아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나는 과연 내 눈앞의 젊은 왕자를 갈리코 왕국으로 돌려보낸 후에 내 어린 아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제발, 율덴부르크 대공 각하. 이것이 천신께서 내리신 고난이라면 그 행간에는 구원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곤께서 태어나신 땅으로 가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기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다음 목표를 찾아 헌신할 수 있도록 손길을 내밀어 주십시오!”

에트루스칸의 왕자는 그 푸른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 애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율덴베르크 대공의 눈에는 그것이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이 젊은 왕자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수하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앞에는 자존심이고 아집이고,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고 없었다.

“⋯⋯기사단장.”

율덴부르크 대공은 고국에 남겨두고 온 그의 장남이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할지가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이도, 지금 눈앞의 알폰소 왕자처럼 침략자에게 애걸하게 될까.

아니면 군주의 혈통으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버틸까. 나의 아들도, 남 앞에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울부짖게 될까.

대공은 천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슈테른하임 공국을 무방비 상태로 두고 실익 없는 원정길에 올랐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후대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알고는 있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슈테른하임 공국은 자신의 출정으로 국력이 많이 상한 상태라는 것을. 그의 아들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출항까지 몇 시간 남았나.”

“길면 세 시간, 짧으면 두 시간입니다!”

“이 주변 입단속을 하고 가급적 빨리 모든 짐을 싣게. 우리는 바로 출항한다.”

대공은 결코 자신의 아들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오늘 베푼 선행이 언젠가 자신의 혈육에게도 돌아오길 기도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모선(母船)으로 옮겨. 왕자 전하에게는 1급 선실을, 기사들에게는 2급 선실을 내주게.”

알폰소 왕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지시를 마친 대공은 왕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왕자. 가 보십시다. 선지자께서 처음 강림하셨던 땅, 예사크로.”

* * *

팔레 드 몽펠리에는 새벽의 화재로 난리가 났다.

이내 알폰소 왕자 일행이 달아났다는 사실이 들통났고, 이 사실이 필리프 4세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왕자 일행을 찾고 싶었던 경비 담당자들은 궁 안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실패했다.

알폰소 왕자는 경비 담당자의 손이 닿지 않는, 율덴부르크 대공의 부대 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엄한!”

아침의 출정식을 마치고서야 알폰소 왕자의 탈주를 보고받은 필리프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감히 이 나에게 이 궁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숨겨?”

그는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미친 듯이 경비 담당자에게 화를 냈다.

“그, 그것이⋯⋯. 국왕 폐하께서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계셨기 때문에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지 않고자⋯⋯.”

화재는 새벽 네 시 경에 났다. 필리프 4세에게 이 사태가 보고된 것은 오전 열 시였다.

고작 여섯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필리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위대장!”

“예! 폐하!”

“내 자네의 수하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몽펠리에 근위대의 대장은 자신의 목숨이 이 대답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바로 바닥에 부복해 큰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죽여 주십시오! 저놈은 사지를 찢겨 죽어도 싸고 저 또한 관리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나이다! 죄를 청합니다!”

필리프 4세는 흰 뱀 같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부대장.”

“예, 폐하!”

잔뜩 굳은 근위대의 이인자가 답했다. 필리프는 건조하게 지시를 내렸다.

“귀빈 처소 경비대 책임자는 사지를 찢어 죽이고, 근위대장은 교수형에 처하라.”

근위대장이 청한 그대로였다. 방 안의 모두가 숨을 들이켰지만 감히 티를 낼 만큼 대범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부턴 자네가 근위대장이야. 잘 해.”

“추⋯⋯. 충성!”

* * *

오늘 오전에 근위대장이 교체되었고—전임자는 형장의 이슬로 신속하게 사라졌다—그 사유는 새벽에 궁전에서 난 화재와 알폰소 왕자의 탈출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외드 대공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보, 베르나데트. 라리에사는 자기 방에 잘 있소?”

몽펠리에 궁에서는 화재의 원인이 알폰소 왕자와 그 일행의 재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외드 대공으로서는 분명히 밖에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리에사요? 자기 방에서 자고 있겠지요?”

베르나데트 대공비의 태평한 대답에 외드 대공은 욱, 하려던 성질머리를 참고 직접 딸의 방으로 가보기로 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대공녀님께선 지금 목욕을 마치시고 주무시러 들어가셨는데요.”

하지만 그가 받은 대답은 기상천외했다. 외드 대공은 참지 못하고 딸의 측근 하녀에게 물었다.

“라리에사는 원래 아침에 목욕하고 점심나절에 낮잠을 자나?”

“아기씨께서 게을러 빠지시기는 했지만.”

대답한 것은 유모인 유지니 부인이었다. 그녀는 심술궂게 덧붙였다.

“아침에 목욕을 하시고 이런 시간에 낮잠을 주무실 만큼 제가 막 키우진 않았습니다요.”

심기가 불편해진 외드 대공은 외쳤다.

“라리에사를 데려오게,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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