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이해상반
새벽에 다 못 잔 잠을 보충하려던 라리에사는 침대에 눕자마자 아버지, 외드 대공의 호출을 받았다.
그녀는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채 눈을 비비며 침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외드 대공은 다들 나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사용인을 물려 딸과 단둘이 남은 그는 대놓고 물었다.
“알폰소 왕자 일행을 내보내 준 게 너냐?”
그는 딸이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라도 할 줄 알았다.
당연히 아니라고 할 테고, 자신이 ‘그럼 왜 아침에 씻은 거냐’, ‘새벽에 뭘 했길래 낮에 자냐’ 등등 추궁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큰딸이 일찍 죽고, 이제 그에게 하나 남은 딸이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불을 질렀어요. 왜요?”
외드 대공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 네가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지금!”
라리에사는 난데없는 아버지의 추궁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게 왜 잘못됐지요?”
“세상에!”
적반하장이었다. 외드 대공은 딸의 현실 인식에 기겁했다. 좀 특이한 아이란 건 알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궁에 불을 지르다니! 잡히면 국왕 모해 혐의로 처벌받을 수도 있어! 반란죄다, 반란!”
라리에사는 피곤이 가시지 않은,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위험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뭐? 네가 정녕 미쳤느냐?”
“여자는 지아비를 위해 그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건 아버지셨어요!”
“뭐라?”
자기가 제대로 들은 건지 귀를 의심하고 있는 외드 대공에게, 라리에사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다시 읊어 드렸다.
“지. 아. 비.”
외드 대공은 뒤집어졌다.
“그놈이 왜 네 지아비야!”
그는 정신이 꽃밭에 가 있는 딸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에트루스칸 왕자를 몹시 좋아했다는 사실은 알겠다. 하지만 너와 그 사이에서 오간 건 혼담뿐이고, 그 혼담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어!”
외드 대공은 딸을 설득하기 위해 약간의 비밀을 풀기로 했다.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국왕 폐하의 의중 상 이 혼사는 이루어지기 힘들 거다. 국왕 폐하께서 널 알폰소 왕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시더라도 그걸 받으면 안 되고! 이 아비를 믿고 정신 차려라!”
라리에사는 도도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국왕 폐하께서는 알폰소 왕자님을 죽인 후에 타란토의 비앙카와 결혼해서 에트루스칸 왕국의 왕좌까지 브리앙 왕조로 가져오려고 하셨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라리에사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경악한 아버지를 상대로 음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래서 알폰소 왕자님을 탈출시킨 거예요!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내 남편인데!”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남편이야! 정신 차려!”
라리에사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뇨, 결혼했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화내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시면 찬찬히 말씀드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
흥분한 외드 대공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라리에사의 눈에는 아버지가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거로 보였다.
아버지의 분노에 라리에사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소파 뒤로 숨었다.
- 덜컹!
이때 라리에사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여보? 여보?”
베르나데트 대공비였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 들어와 라리에사를 껴안고 남편에게 항의했다.
“지금 우리 라리한테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엄마!”
라리에사는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대공비는 남편을 준엄하게 혼냈다.
“애가 울잖아요!”
“여보!”
외드 대공은 속이 끓는 심정으로 외쳤다.
“애가 자기가 유부녀라고 하오!”
“예?”
라리에사를 품에 안고 있던 어머니마저 동그래진 눈으로 딸을 밀어내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었던 구석이 사라진 라리에사는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울부짖었다.
“엄마! 아버지! 나빠요! 아무도 내 행복에는 관심도 없어!”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딸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니? 유부녀라니? 남편이 있다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세요!”
라리에사는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혼비백산해서 딸을 열심히 달랬고 외드 대공은 당황한 나머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라리에사가 진정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끈기 있게 계속 등을 두들겨주는 어머니의 품에서 간신히 눈물을 멈춘 그녀는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엄마, 나 알폰소 왕자님이랑 결혼했어요.”
“!”
일단 식겁했지만, 바로 이십여 분 전에 딸에게 질문했다가 한 번 홍역을 치른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딸을 살살 달래가며 물었다.
“왕자님? 그거참 잘됐구나! 언제?”
“어젯밤에.”
뒤에서 외드 대공이 목덜미를 잡았다. 그는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끈기 있게 다 큰 딸을 얼렀다. 그녀는 자기 자식이 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다.
“로맨틱했어?”
차마 ‘결혼식은 올렸니’라고 물어보지는 못한 대공비였다. 상대가 알폰소 왕자라면 도주 와중이었을 것이고, 결혼식 따위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딸이 무드 있는 고백조차 받지 못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해서 던질 수 있었던 용감한 질문이었다.
“으, 으으⋯⋯.”
라리에사는 다시금 울먹였다. 더는 참지 못한 외드 대공이 호통쳤다.
“식도 못 올렸어, 로맨틱하지도 않아, 부모 허락도 없어! 그게 무슨 결혼이냐! 소꿉장난을 너 혼자 착각한 거겠지! 결혼이 무슨 풀 반지 하나 나눠 끼는 거로 되는 줄 알아?”
풀 반지 하나조차 나눠 끼지 못한 라리에사는 거세게 반발했다.
“아니에요!”
그녀도 할 말이 있었다.
“우리는 혼인서약서에 정식으로 서명한 사이라고요!”
“뭐?!”
서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리에사는 오기에 차서 방 안으로 들어가, 혼인서약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이거 보세요! 우리는 부부예요!”
외드 대공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딸이 내민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길⋯⋯. 철없는 딸이 벌인 소꿉장난 같은 소동이길⋯⋯.
「혼인서약서.
에트루스칸의 왕자, 알폰소 데 카를로는 갈리코 왕국, 발로아 대공령의 라리에사 드 발로아 대공녀와 혼인한다. ⋯⋯(후략).」
내용은 정식 문서의 형식을 정확히 갖추고 있었고 아래의 서명란에는 신랑과 신부의 기명날인이 모두 올바른 칸에 들어가 있었다.
날짜의 기재며 뭐며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안 돼⋯⋯. 그럴 리 없어⋯⋯. 어딘가 서식에 문제가 있을 거야⋯⋯.”
아버지의 넋이 나간 듯한 중얼거림에 라리에사는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확인 후에 작성한 혼인서약서라고요.”
미레이유 대공에게 계약서를 한 번 써주고 톡톡히 마음고생을 해 본 라리에사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외드 대공은 고개를 저으며 바깥에서 사람을 불렀다.
“여봐라! 대공령의 법학박사를 모셔와라! 지금 당장!”
* * *
출생신고서, 혼인서약서, 사망신고서 등 생로병사와 관련된 경조사의 처리는 원칙적으로 성황청의 업무다.
즉, 이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성직자다.
그러나 발로아 대공령의 법학박사는 그만큼의 전문성은 없었지만 성황청의 성직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그가 완전히 발로아 대공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라리에사 대공녀와 알폰소 왕자의 혼인서약서라는 대폭탄을 보여주어도 바깥으로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50대의 법학박사는 외알 안경을 들어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라리에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대공녀님은 유부녀가 아니십니다.”
외드 대공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베르나데트 대공비도 딸에게 입으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적잖이 안도한 기색이었다.
딸이 결혼식조차 올리지 못하고 도둑 결혼을 했으며 사위는 행방불명이라는데 기꺼워할 어머니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라리에사 대공녀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거짓말! 당신은 아버지의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지!”
그녀는 법학박사에게 덤벼 혼인서약서를 물리적으로 빼앗아왔다.
이 종이는 그녀와 알폰소 왕자를 잇는 단 하나의 끈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라리에사!”
“라리, 그러다가 다쳐!”
양친이 기겁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히 상전을 몸으로 쳐낼 수 없었던 법학박사는 혼인서약서를 순순히 뺏길 수밖에 없었지만 대공녀가 뭉갠 자신의 직업적 자존심에 화를 냈다.
“대공녀님! 저를 그런 간신배로 몰지 말아 주십시오! 이 혼인서약서는 정말로 혼인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외드 대공이 반색하며 법학박사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 라리에사야. 박사님 말 들어. 이보시게, 서명이 잉크가 아니라서 그런 거지? 역시 제대로 된 서명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갈색 서명으로는 이름도 알아볼 수가 없고⋯⋯.”
“서명 문제는 아닙니다. 서류 자체로는 완벽해요.”
법학박사의 대쪽같은 직업적 자존심은 딸 상대로든 아비 상대로는 꺾이지 않았다. 무안해진 외드 대공은 헛기침을 했다.
“뭐⋯⋯. 내 딸이 외간남자한테 매인 몸만 아니라면야⋯⋯.”
“오, 대공 각하. 라리에사 대공녀님께서 알폰소 왕자님께 매이신 몸인 것 맞습니다.”
부녀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표정을 짓고 법학박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분노, 딸은 환희.
본의 아니게 고용주들을 감정적 폭풍 속으로 몰아넣은 법학박사는 느긋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에—. 혼인서약서의 구성요건이라 함은⋯⋯.”
“결론만 말해요!”
가장 앙칼진 것은 베르나데트 대공비였다.
대공비의 일갈에 깜짝 놀란 법학박사는 사모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두괄식 답변을 내놓았다.
“성직자의 동석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혼인은 무효입니다!”
외드 대공은 위장병이 모두 다 나아버린 표정으로 명치를 쓸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님은 저에게 매인 몸이라면서요!”
“그, 그렇습니다.”
법학박사는 설명을 계속했다.
“에—. 혼인서약서 작성 시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요식행위가 다섯 가지 있는데⋯⋯.”
“결론만 말하시오!”
“결론만!”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세 식구의 구박을 한 몸에 받은 법학박사는 법학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성직자가 서명 순간을 증명해주지 않았으니 혼인으로서의 효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혼인서약서의 내용을 보면 양 당사자의 혼인하겠다는 의사의 합치가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는 바⋯⋯.”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법학박사를 째려보았다.
그는 찔끔해서 얼른 결론을 내놓았다.
“결론적으로 이 서류에는 약혼으로써의 효력은 있습니다.”
그는 혹시나 저 우매한 자들이 못 알아들었을까 봐 쐐기를 박았다.
“두 분은 공식적으로 약혼하신 사이십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표정이 그나마 밝아졌다. 약혼녀라면, 가능성이 있다. 약혼녀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많았다.
“그러면 박사님. 왕자님은 이제 저 말고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실 수 없는 거지요?”
법학박사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습니다. 약혼남이 약혼녀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하게 되면 약혼녀는 성황청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그들의 결혼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왕자님께 저와의 결혼을 빨리하자고 요구할 수 있나요?”
“에⋯⋯. 그것은 좀 까다로운데. 관행상으로는⋯⋯.”
“아니, 잠깐만.”
법학박사의 장황한 설명을 끊은 것은 외드 대공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공식’이라니? 이 혼인서약서는 아직 그 어디에도 발표된 적이 없잖은가?”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딸의 품에 소중히 들어있는 양피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