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 없다’는 남편의 말에, 베르나데트 대공비도 외드 대공의 의중을 바로 알아차렸다.
“라리야. 그거, 혹시 알폰소 왕자님께도 한 부가 있니⋯⋯?”
라리에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계약서 실무를 잘 모르고 책에서 본 대로만 했던 그녀는 혼인서약서를 한 장만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생각과 달리, 설령 두 장을 만들어 한 부를 알폰소가 가지고 있었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관계를 묻어버릴 수 있다면 묻어버리려고 들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며 지었던 그의 똥 씹은 듯한 얼굴을 기억했다.
“이리 온, 착하지. 아빠한테 내놓지 않으련⋯⋯?”
외드 대공이 한 발짝 딸에게 다가갔다. 라리에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소리 질렀다.
“지금 저에게 이러셔도 소용없어요!”
“그러지 말고. 그 양피지만 찢어버리면⋯⋯.”
“전 이미 이 서류를 몽펠리에 교구에 제출했다고요! 성황청에서도 알아요!”
“뭐라고?!”
몽펠리에 교구라면 몽펠리에 대주교 휘하다. 그리고 몽펠리에 대주교는 입이 싸기로 유명한, 정치 주교다.
당장 필리프 4세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치고도 남을 위인이다.
외드 대공이 기겁해서 딸을 추궁하자 라리에사 대공녀는 또 울고불고를 시전했다.
“으아아아앙!”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남편을 원망하며 필사적으로 딸을 달랬다.
갓난쟁이 울음 달래는 것과 비슷한,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거의 한 시간여가 지나서야 그들은 라리에사의 입에서 유의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대주교에게 낸 건 아니라고?”
“⋯⋯소성황당의 사제님께⋯⋯.”
“여봐라! 당장 나가서 소성황당 사제님을 모셔오거라!”
입막음을 하기 위해 즉각 사람을 보낸 외드 대공은 한숨을 쉬었다.
“성황청 목록에 올라간 건 막을 수 없다는 거군.”
아직도 안 나가고 버티고 있던 법학박사가 답했다.
“성황청의 관리대장에 올라간 문서는 누구든 그 내용을 주장할 수 있지요. 약혼은 공식입니다.”
“약혼 파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약혼 파기의 방식은⋯⋯.”
말이 길어질 기색이 보이자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바로 법학박사를 노려보았다.
상전들의 업무 스타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박사는 결론만 내놓았다.
“양 당사자 합의가 필요합니다. 알폰소 왕자님이 일단 나타나셔야 합니다.”
외드 대공은 다시금 머리를 굴렸다.
“약혼남이 죽어버리면⋯⋯.”
법학박사가 ‘오, 그런 방법이!’ 같은 탄성을 지르며 맞장구쳤다.
“그것 또한 맞습니다. 한쪽이 죽으면 약혼을 요구할 수는 없지요.”
“아빠!”
법학박사가 외드 대공의 방침에 찬성한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딸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베르나데트 대공비의 품을 벗어나 아버지에게로 달려와 대공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 알폰소 왕자님이 죽어버리면 저도 따라서 죽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허튼짓하지 마세요!”
“라리!”
대공비의 째진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외드 대공 역시 어이가 없어서 딸에게 외쳤다.
“라리에사야, 전쟁터에 나간 남자가 죽으면 너도 따라 죽겠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예사크는 곧 전쟁터로 변할 예정이었다. 십자군의 승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예삽교 진영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고는 무사히 귀환했지만, 제2차 십자군은 예사크 근처에는 접근조차 해 보지 못한 채 광야에서 전멸당했다.
“그 남자는 지금 전쟁터로 가는 길인데 전쟁에 참전한 사람 목숨을 누가 무슨 수로 보장해!”
“아버지께서! 여자는 일부종사라면서요!”
라리에사는 지금 합리적인 대화가 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예사크가 위험하면 아빠가 책임지고 알폰소 왕자님을 살려내요. 살려서 데리고 돌아와요!”
“라리에사, 억지는 거기까지만 부려!”
“억지든 아니든 난 그런 거 몰라요!”
라리에사 대공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전 알폰소 왕자님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는 제 모든 것이에요!”
“라리! 그분을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그러니!”
참지 못한 베르나데트 대공비마저 라리에사를 질타했다. 어머니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알폰소 왕자를 길어봤자 1년 미만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에게 1년은 영원과도 같았다. 꿈꾸던 왕자님과의 1년이라면 더더욱.
“저를 에트루스칸 왕국에 보내셨으면서!”
분개한 라리에사는 째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거, 결혼하라고 보낸 거 아니었어요? 남의 나라 왕궁에서 외간 남자와 1년이나 보내고 온 공녀가 어디로 시집갈 수 있어요?”
외드 대공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딸을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보낸 것은 실수였다.
필리프 4세의 강권에 못 이겨 보냈던 것인데, 보낼 때까지만 해도 그는 국왕이 정말로 라리에사를 알폰소와 짝지어 주려는 줄 알았다.
“엄마와 아버지가 내 인생 다 망쳐 놓고! 이제와서 난 손 떼고 얌전히 있으라고요? 못 해요, 그렇게는 죽어도 안 돼요!”
“라리에사야.”
외드 대공이 딸을 달랬다.
“우리가 설마 너 하나 좋은 혼처 못 구해 주겠느냐.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엄마아빠 말 들어.”
“좋은 혼처?”
라리에사 대공녀는 홱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눈알이 숫제 돌아가 있었다.
“하! 좋은 혼처! 그 남자가 군주의 아들이겠어요? 물려받을 왕국이 있겠어요? 기껏해야 어디 백작 아들 나부랭이쯤 데려와서 짝지어 주시겠지요!”
“라리에사!”
외드 대공은 딸을 질타했지만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리에사는 사실 결혼상대의 작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를 가든 영원히 대공녀일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부모님께 대들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못 할 소리가 없었다.
“알폰소 왕자님은 내 목숨이고 신앙이고 미래예요! 절대로, 절대로 못 놔!”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천신님이 아니라 남자가 신앙이라는, 딸의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에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어머니의 신앙심을 지렛대 삼아 더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알폰소 왕자님이 죽어버리면 저도 같이 죽을 거예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자는 어디로 가죠?”
“8층의 무간지옥에서 영원히 불탄다고 하지요.”
가족끼리 대환장 파티를 여는 와중에 멀뚱히 끼여 앉아 있던 대공령 법학박사가 눈치도 없이 대뜸 대답했다.
외드 대공은 나가지도 않고 집안의 치부를 죄다 구경한 저 양반을 어디 대공령 최북부 땅끝마을쯤으로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일단 딸의 발광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다.
“라리에사!”
옆에서 베르나데트 대공비마저도 자지러졌다.
“왕자님이 돌아가시면, 내 손으로 목을 매달 거예요! 왕자님이 돌아가시면, 엄마 딸은 내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거라고요!”
“세상에!”
반복되는 ‘지옥’ 언급에, 신앙심 깊은 대공비는 머리에 손을 대더니 졸도했다.
대공은 솔직히 아내가 진짜로 기절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손쉬운 탈출방법을 취했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가장의 의무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 난장판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일단 들어가거라.”
“아버지!”
“진정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약속해요, 아버지! 알폰소 왕자를 지켜주겠다고!”
예사크로 떠난 십자군은 슈테른하임 공국의 군대다.
갈리코 왕국은 군자금을 후원한 것 외에는 표면적으로 제3차 십자군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갈리코 왕국은 이번 성전과 관련해 십자군에 물자를 수송하고 기타 후방지원을 맡은 포르토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포르토 공화국과의 조율 책임자는 외드 대공이었다.
즉, 외드 대공은 마음만 먹으면 알폰소 왕자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약속해요!”
라리에사는 재차 울부짖었다. 외드 대공은 딸이 어디까지 알고 이러는지 몰라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말을 하지 않자, 흥분한 라리에사는 협탁에 올려져 있던 촛대를 들어 위에 꽂혀 있는 초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촛대 끝의 뾰족한 부분을 자기 목에 들이댔다.
“약속하라고!!”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던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여보!! 애가 죽겠다잖아요!”
결국 미친 딸과 분노한 아내에게 협공당한 외드 대공은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보마!”
라리에사는 그제야 씩씩대면서도 촛대를 내려놓았고,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다시 제자리에 픽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 가족 안에서는 최약체인 외드 대공은 답답한 마음을 희생양에게 풀기로 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흘겼다. 대상은 이 모든 난장판을 나가지도 않고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지켜보고 있던 법학박사였다.
“자네, 각오하게.”
“?”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법학박사였다.
* * *
알폰소 왕자가 구사일생으로 갈리코 땅을 탈출했을 때, 에트루스칸 왕국은 본격적인 흑사병의 창궐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아가씨. 중부 도시 베카리아가 흑사병에 완전히 무너졌다고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서재에 앉은 카루소 대표가 침중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베카리아의 행정력이 마비되었습니다. 도시 자체는 거대한 병동으로 변했고 아직 움직일 여력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도시에서 달아나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베카리아는 산 카를로에서 도보로 기껏해야 반나절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베카리아에서 탈출한 흑사병 감염자들이 산 카를로로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니, 산 카를로가 아직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베카리아의 상황을 보고한 상회 사람들은 다 안전하게 격리해 두셨나요?”
“예, 성안으로 진입을 아예 못 하게 했습니다. 보고 자체도 야외에서 받았고, 남쪽에서 올라온 우리 상회 사람들은 산 카를로 바깥에 있는 상회 건물에 지시하신 수칙대로 따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 외로는 산 카를로 내부에서의 감염 에피소드는 없나요?”
카루소 대표가 ‘없다’고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저기⋯⋯. 아가씨⋯⋯.”
아리아드네의 서재 입구 쪽에서 울 듯한 산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니, 산차?”
산차는 이런 식으로 중요한 일 중간에 난입하는 법이라고는 없는 아이였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해 봐, 괜찮아.”
“⋯⋯랑부예 구휼원에서 폭동이 날 것 같대요. 아니, 이미 났을지도⋯⋯.”
아리아드네의 눈이 커졌다.
“왜, 어쩌다가?”
“식량이 모자라서 3일째 배급이 중단됐던 모양입니다. 지금 수용된 빈민들이 안뜰에 집결해 시위를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시위의 양상이 심상치 않아서⋯⋯. 당장이라도 대문을 뚫고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다고⋯⋯.”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에 긴장감이 담겼다.
전생의 랑부예 구휼원은 산 카를로에 흑사병이 돌게 된 최초 진원지였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한 빈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구휼원을 탈출했고, 그사이에 섞여 있었던 흑사병 환자들이 산 카를로 전역으로 퍼져 산 카를로의 방역을 망쳤다.
“산차. 내 겉옷을 챙겨라. 당장 구휼원으로 가자.”
“예? 아가씨께서 직접이요?”
말을 꺼낸 산차도 거기까지는 기대조차 안 했었던지 깜짝 놀라 아리아드네를 말렸다.
“거기는 비위생적인 데다가 이제는 위험하기까지 해요! 아가씨께서 가실 만한 곳이 아니에요. 지시를 내리시면 제가 가서 전달할게요.”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랑부예 구휼원의 사태는 수습이 안 돼. 주세페를 불러.”
아리아드네가 독대를 끝마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루소 대표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아가씨. 가시기 전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오늘의 본론이었다.
“지금 곡물가가 이미 1.5배는 치솟은 상태입니다. 이제 슬슬 시장에 밀을 풀까요?”
아리아드네는 당신의 기국이 이렇게 작았냐는 듯이 카루소 대표를 바라보았다.
“카루소 대표님.”
“예, 예?”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