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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94화 (194/733)

<제194화> 언니가 제일 잘하는 거

“입이 열 개라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랑부예 구휼원 사무처장, 알바니 씨는 아리아드네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알바니 사무처장은 귀족님네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을 숨 쉬는 것보다 쉽게 했지만, 오늘만큼은 진심이었다.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서 아직 어린 아가씨를 빈민들 앞에 내몰고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는 죄책감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이 아가씨는 구휼원의 천여 명 수용자를 두 주일은 먹일 만큼의 곡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건 레오 3세조차도 해주지 못한 쾌거이다.

지금 알바니 사무처장 눈에 아리아드네는 국왕보다도 더 중요해 보였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게끔⋯⋯.”

옆에서 세모 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는 자기 딸 만한 하녀 아이를 보고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곡식과 돈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면 그럴 만하다. 그럴 수 있다. 예산 앞에 장사 없었다.

랑부예 구휼원은 이대로라면 직원들을 내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아니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던가.

“사과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알바니 사무처장을 제지했다.

알바니 사무처장에게 권한 없이 지시를 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지만, 사무처장은 깊이 탄복했다.

‘자비로우시기까지!’

그리고 그다음 말은 사무처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저는 앞으로 당분간 이 구휼원에 식량을 댈 예정입니다.”

사무처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제껏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내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기부하는 귀부인들은 그 기부를 통해 자신의 훌륭함을 만방에 내보여 칭송받고 싶어했다.

사무처장이 아부와 마음에 없는 소리의 달인이 되는 것은 직업적 훈련의 결과였다.

왕궁도 다르지 않았다. 궁에서 나오는 예산은 빈민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목적이 있다. 그게 인간 세상이다.

“대신⋯⋯.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대신’이라는 단어를 들은 사무처장은 도리어 안심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그 뒤에 따라 나온 말들은 사무처장을 더 큰 혼란에 빠지게 했다.

“⋯⋯열이 나는 빈민들을 격리 수용하고, 물은 끓여 마시고, 잠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구휼원 사람들 모두 얼굴에 수건을 쓰고 다니라고요?”

아리아드네는 간단하게 긍정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외부인과의 격리는 사무처장님을 비롯한 구휼원 직원 전원이 해주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랑부예 구휼원 전체를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거대한 성채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아가씨께서 대시겠다고요?”

“맞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산뜻한 긍정으로 돌아왔다. 알바니 사무처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가씨께서는 성황청의 뜻을 대리하고 계신지요?”

데 마레 추기경이 빈민 구휼을 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랑부예 구휼원은 왕비의 직속 기관이니, 결국엔 국왕의 행사인데 거기에 끼어드는 것을 꺼려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데 마레 추기경이 딱히 빈민 구휼 따위에 관심이 없고, 스스로를 숨기는 스타일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럴듯한 추리였다.

하지만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알바니 사무처장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아닙니다. 제 사재입니다.”

이 나이 또래의 아가씨가 개인 재산이 이렇게 많은 것도 놀랍고, 그 개인 재산을 자신의 지참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빈민 구휼에 쓴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알바니 사무처장은 놀라움에,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반쯤은 입에서 헛나간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그러게요.”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곡식을 전부 다 움켜쥐고 비싼 가격에 팔아버리면 그만이다.

국왕이 탐을 낸다면 반쯤 뚝 떼어 국왕에게 바치면 나머지의 고가 처분은 봐주겠지.

그편이 랑부예 구휼원에 원조하는 것보다 공을 세우기에도 더 좋았다.

‘하지만 모두가 죽어 나갈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나는 미래를 알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아리아드네는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자기 오른손 끝에 내려앉은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도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빛나는 빛무리는 마치 긍정한다는 듯이, 한 차례 춤추듯 소용돌이를 쳤다.

* * *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랑부예 구휼원에 식량을 댔다는 이야기는 산 카를로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산 카를로에 소문이 퍼진 다음 날 저녁, 그는 당장 둘째 딸을 불러오라고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아버지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귀가 이후로 스스로 문을 꽁꽁 닫아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 1주일, 가급적 열흘.’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날 랑부예 구휼원에 들어갔었던 수행원들은 전부 다 열흘간 별채에 묵게 되었다.

외출도 불가능했고 식사는 본관 부엌에서 준비해 별채의 문 앞까지 날라다 주었다.

아리아드네 본인만 몸가짐에 대한 설왕설래를 염려해 수행원들과 함께 별채 격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산차만 데리고 본채의 자기 방에 콕 틀어박혀 나머지 집안사람들과 철저하게 분리된 채 지냈다.

‘추기경께서 원하시는 건 뻔하지.’

‘그 돈이 어디서 났냐’는 추궁일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적당히, 예전에 사 두었던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아 생긴 돈 등으로 개인적으로 사 모았던 곡식과 밀랍이 시세가 크게 올라, 그걸 처분해서 생긴 돈과 아직 남아 있던 곡식으로 지원한 것이라는 메모를 써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직접 검토해 보시라고, 데 마레 대저택의 관리 장부를 통째로 함께 넘겼다.

데 마레 추기경은 몹시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데 마레 가문의 집안 살림에 손을 댄 것만 아니라면 자기 재량으로 무엇을 하건 그는 크게 터치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리아드네가 가진 것이 수도 전체를 먹일만한 압도적인 물량의 곡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추기경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에게 거기까지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집안에서 ‘네 것은 네 것, 내 것만 내 것’이라는 합리적인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리아드네를 제외하면 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너! 당장 나와!”

“지금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되십니다, 큰 아가씨!”

“비켜!”

아리아드네의 내실에서 본의 아니게 쫓겨나 바깥에서 심부름 담당이 되어 버린 마리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있던 아리아드네와 산차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 벌컥!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온 것은 이사벨라였다.

“야! 앞뒤가 달라도 어떻게 이렇게 달라?”

씩씩대며 들어온 그녀는 증오의 눈초리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죠, 언니?”

이사벨라는 오늘 오후에 ‘은십자 부녀회’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돌아온 길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랑부예 구휼원에 방문해 수용자들의 폭동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거기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일전에 체자레 공작의 작위 수여 기념 무도회에서 이사벨라가 창피를 당한 이후로 발조 백작 부인은 조금 냉담해졌고, 로레단 남작 부인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그 사건을 자기가 본 양 굴었다.

그 이후로 남작 부인의 언행은 미묘하게 도발적으로 변했다. 오늘의 티 파티에서도 그랬다.

- “어머, 이사벨라 양. 랑부예 구휼원 이야기 처음 들어요? 같은 집 살잖아. 동생이 말 안 해 줬어요? 자매끼리 진짜 사이가 안 좋은가보다.”

여기서 이사벨라를 편들어 주어야 했을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설상가상으로 발조 백작 부인은 모르는 척 한 마디를 얹었다.

- “그 여동생? 신앙심이 깊고 신실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뿐만인가요! 현명하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수도에 슬슬 식량난이 오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곡식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지 뭡니까?”

- “어린 아가씨가 대단하네요. 선견지명이 있어.”

그 말을 하며 발조 백작 부인은 이사벨라를 흘긋 쳐다보았다.

착하고 명성 높은 네 여동생이 널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걸 보니 넌 이상한 애가 틀림없다는 무언의 타박이었다.

‘아, 안 돼⋯⋯!’

이사벨라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발조 백작 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결국 이사벨라는 우리도 봉사활동을 가자고, 아리아드네 같은 개인도 좋은 일을 하는데 발조 백작 부인이 이끄는 ‘은십자 부녀회’ 같은 명성 높은 조직이 나라에 공헌할 길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아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원히 자기편일 줄 알았던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의 배신을 맞닥뜨렸다.

- “그렇지만 이사벨라⋯⋯. 요새는 분위기도 흉흉하고⋯⋯.”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요새 무서워요⋯⋯.”

- “저는 굳이 그런 곳을 찾아다닐 시기는 아닌 것 같아요.”

네가 누구 덕분에 ‘은십자 부녀회’에 들어왔는데! 이사벨라는 레티시아를 향한 노여움이 확 솟구쳤지만 지금 성질머리대로 대거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배제되는 것은 결코 이사벨라가 익숙하거나 잘 견디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무리의 리더였고, 소녀들의 맨 앞에 서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사벨라는 생전 처음으로 이를 갈며 분을 삭이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분은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아리아드네에게 쳐들어왔다.

어떻게든 해소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넌! 나한테 그렇게나 잘난 척을 하면서 당분간 빈민가 출입은 삼가라고 하더니.”

이사벨라의 보라색 눈에는 분노가 번뜩였다.

“똑같은 규칙이 왜 본인한테는 예외야?”

사람은 굶주리는 것은 참아도, 내가 맨 빵을 먹는데 옆 사람이 고기를 뜯는 것은 참지 못하는 법이다.

난민촌 출입 따위 평소의 이사벨라에게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역병이 너만 피해가? 네가 그렇게 잘났어? 뭐가 이렇게 불공평해?!”

아리아드네도 여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진실을 따지자면 그녀는 산 카를로에 퍼질 역병을 막으러 간 것이고, 그것은 이사벨라의 소꿉장난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일의 경중에 따라 각오해야 할 위험부담도 다른 법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걸 이사벨라에게 조리 있게 설명할 방도를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설령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들을 마음이 없는 이사벨라가 수긍할 리도 없었다.

‘권력 좋다는 게 뭐람.’

아리아드네는 이 상황을 그냥 뭉개기로 했다. ‘권력’이란,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강요할 수 있는 힘이다.

딱히 이사벨라까지 좋게좋게 납득을 시켜 단합해서 앞으로 나아갈 필요 따위는 없었다.

“마리아!”

아리아드네는 목청을 돋웠다.

“네! 아가씨!”

방문 밖에서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이사벨라 언니께서는 당분간 몸이 좋지 않아 자기 방에 칩거하실 예정이시다.”

“뭐, 뭐라고?”

“열흘 동안 언니가 본인 처소를 벗어나시지 않도록 잘 감시해!”

이사벨라의 당황에도 불구하고, 문밖에선 낭랑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사벨라 언니를 방까지 모실 때 언니에게도 얼굴 수건을 둘러드리는 것 잊지 말고.”

“예!”

마리아가 잠시 이사벨라를 위한 얼굴 수건을 가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사벨라는 거칠게 아리아드네에게 달려들었다.

“야! 보자 보자 하니까!”

신체적으로 덤비는 이사벨라는 그 자체로도 아리아드네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아리아드네까지 갈 것도 없었다.

산차가 다부지게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산차는 치켜든 이사벨라의 손목을 단단하게 붙잡고 경고했다.

“큰 아가씨,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하! 이제는 한낱 몸종 계집애까지 날 무시해?!”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산차에게 붙들린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교양 없게 몸으로 덤비니 아랫사람한테 막히는 거예요, 언니.”

“저게⋯⋯. 뚫린 입이라고!”

아리아드네는 차갑게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언니. 충고 하나 할게요. 바람이 거세게 불 땐 엎드리는 게 상책이에요. 언니 이렇게 허술한 사람 아니잖아요.”

전생의 이사벨라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높은 산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치졸하고 하찮아서 상대하면서 스스로가 지루해질 지경이었다.

“언니가 제일 잘하는 거 있잖아.”

남자에게 속살거리기. 뒤에서 판 짜기. 자기는 착한 사람인 척, 여론 몰아 사람 묻어버리기.

“난 언니가 이거보다는 더 고단수일 줄 알았어.”

아니, 평판이 망가진 상태에서는 이사벨라의 주특기를 쓸 수가 없나?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두고 몸을 돌렸다.

“힘내요.”

그리고 그녀는 이사벨라를 남겨둔 채 응접실에서 아예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야! 야!!”

이사벨라는 몸부림을 쳤지만 아리아드네의 몸종은 꽉 잡은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이거 놔!!!”

그녀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 똑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마리아? 저 산차인데요, 지금 문 열게요! 큰 아가씨 바로 받아 주세요!”

이사벨라는 자신이 짐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마리아라는 하녀는 자기 얼굴에도 수건을 두르고 안으로 들어와 이사벨라의 얼굴에 강제로 수건을 씌우더니, 자기가 데려온 하녀 두 명에게 눈짓했다.

하녀들은 무슨 죄수라도 호송하는 것처럼 이사벨라의 양팔에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라고!!”

하지만 하녀들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이사벨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사벨라는 하녀들에게 끌려가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뭔가 반전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안 됐다.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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