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상황 반전을 위한 노력
아리아드네가 돈이 엄청나게 많다, 정확하게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곡식을 매집해 놓았으며 수도에 사는 데뷔탕트를 마친 아가씨 중 제일로 부유하다는 소문이 퍼지는 동안, 알폰소는 예사크에서 정반대의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 중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었다.
율덴부르크 대공의 배에 타고 있을 때에는 숙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잠은 선실에서 잤고, 끼니는 승선 인원 모두에게 제공되는 식사를 함께하면 됐었다.
하지만 예사크 근처, 라트갈린 지방에 배가 정박해 모두가 내린 이후 그들은 자신들만의 천막도, 여분의 식량도, 그렇다고 현지에서 물품을 조달할 금화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왕자 전하. 율덴부르크 대공께서 보내신 물품들입니다.”
엘코 경이 침울하게 보고했다.
그는 등에 약간의 식량을 짊어지고 왔고, 추가로 천막 몇 개가 더 도착할 거라고 고했다.
에트루스칸 왕자의 일행은 총 12명이었는데, 그들이 아껴 먹어도 삼 주 정도를 겨우 버틸 양이었다.
엘코 경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라트갈린에서 행군을 시작하면 예사크까지는 한 달이 넘게 걸릴 겁니다. 보병 속도도 있고, 중간중간에 주둔하는 곳도 있을 거고⋯⋯.”
만프레디 경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로는⋯⋯.”
턱도 없다.
그럴듯한 전투가 일어나서 전공을 세워 약탈품을 나누어 받게 된다면 또 모르지만, 알폰소 왕자에게 말석을 겨우 내준 율덴부르크 대공의 전략회의에 따르면 그들은 당분간 그럴듯한 전리품이 나올만한 도시 공격을 할 계획이 없었다.
공격할 계획이 없다면 시설이라도 이용할 수밖에.
“이 근처에 교역할만한 도시가 있나?”
“예. 대도시까지는 아니지만 준수한 규모의 도시인 발리안티가 바로 근방입니다.”
“⋯⋯이걸 전당포에 맡기고 금화로 바꿔오게.”
알폰소 왕자는 차고 있던 주머니를 끌러 그 안에 들어 있던 장신구며 귀금속을 탈탈 털어 꺼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깨의 견장을 고정하고 있던 황금 브로치까지 떼내어 귀금속 무더기에 얹고 만프레디 경에게 건넸다.
왕자가 남긴 값나가는 것은 손에 낀 에트루스칸 왕국 왕자의 인장 반지뿐이었다.
“⋯⋯왕자님.”
만프레디 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엘코 경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고, 베르나르디노 경도 코끝을 훔쳤다.
알폰소왕자는 담담하게 기사들을 위로했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야. 본국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더 구할 수 있는 걸세.”
그는 부러 기운찬 척을 하며 그들을 북돋웠다.
“살아 있기만 하면 돼. 목숨이 이어지는 게 가장 중요해. 입에 밥이라도 넣어야지. 나머지는 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야. 알겠나?”
“⋯⋯그런 거라면.”
만프레디 경이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멋쟁이인 만프레디 경이 사용하는 상아로 만든 빗이며, 은으로 만든 단추, 보석 커프스 따위의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이것도 보태십쇼.”
만프레디 경은 그 안에서 황금 로켓 하나만을 꺼내어 목에 걸었다.
“저는 삼남이라 남길 인장 반지도 없고⋯⋯. 약혼녀가 준 정표는 처분했다가는 맞아 죽을 거 같으니 이것만 남기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자네를 죽이고도 남지.”
만프레디 경의 약혼녀를 상기한 베르나르디노 경이 낄낄댔다.
“자네가 가진 장신구도 다 자기 미래 재산인데 자기 허락 없이 처분했다고 화내지 않을까?”
“시뇨라 베델리아는 그런 여자 아닙니다!”
만프레디 경이 짐짓 화를 냈다.
“그렇게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니 노총각 되신 거라고요!”
“어허!”
입으로는 만프레디 경에게 벌컥 화를 내며, 베르나르디노 경도 주섬주섬 주머니를 꺼냈다.
“⋯⋯전 인장 반지도 없고 약혼녀도 없습니다. 그냥 통째로 가져가십쇼.”
옆에서 만프레디 경이 깐족거렸다.
“이야, 묵직하네. 이건 내가 술 바꿔 먹어야지.”
“허, 심부름은 제가 가겠습니다! 왕자님! 저 양반 못 믿겠네.”
갈리코 포로 생활 중에 이미 알뜰하게 털려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었던 엘코 경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십시일반 귀중품을 갹출해서 알폰소 왕자에게 내밀었다.
“이걸 써 주십쇼, 왕자 전하!”
알폰소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려 눈을 깜박였다.
얼마나 못났길래 수하들의 개인 재산을 털어 써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이를 눈치챈 만프레디 경이 왕자를 어깨로 쓱 밀었다.
“빌려 드리는 거라고요.”
베르나르디노 경도 알폰소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려서부터 삼촌처럼 왕자를 끼고 다니던 측근만이 가능한 스킨십이었다.
“이자까지 다 쳐서 갚으십시오.”
“⋯⋯그래.”
알폰소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십시일반으로 모여든 주머니를 받았다.
“잘 처리해서 버텨 보자.”
그는 엘코 경에게 물었다.
“아직 본국에서 온 연락은 없지.”
“아직⋯⋯.”
만프레디 경이 재빠르게 분위기를 띄웠다.
“오가는 시간 생각하면, 답장이 올 시간은 아니긴 하지요.”
알폰소 왕자는 첫 기항지에서 고국에 편지를 보냈다.
부왕께 갈리코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한 후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율덴부르크 대공의 제3차 십자군에 섞여 예사크로 향하고 있음을 말씀드리는 편지였다.
거기에는 추가로, 부왕의 판단으로는 언제쯤 에트루스칸으로 귀국하는 것이 올바를지 여쭙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왕자는 군대와 갈라져서 귀국하려면 이동수단이 필요하니 가급적 군함의 파견을 청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위험하지 않게 귀국할 수 있도록 여행자금을 넉넉히 보내 달라고 청원했다.
국경 밖으로 나와서 적국의 배와 해적선이 횡행하는 공해를 떠도는 유일한 왕위계승권자는 참 드문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해적한테 나포되어 몸값이라도 내게 된다면 국가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한 번 더 서신을 보내자.”
부왕에게 독촉 서신을 한 번 더 쓴다고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당시엔 급해서 부치지 못했던 나머지 편지도 마저 써서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산 카를로에서는 아리아드네가 그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라리에사가 했던 말—당신의 여인은 그대를 배신하고 당신 형과 한패가 되었다—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리 본인으로부터 따듯한 편지를 받고 싶기도 했다.
“저번 주에 우리를 내려준 포르토공화국의 배가 이번 주 후반에 귀환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간대?”
“온 김에 현지 무역을 하고 간다네요. 누가 장사치 아니랄까 봐.”
포르토 공화국은 운송 담당자로서 제3차 십자군을 라트갈린까지 태워다 주는 것의 대가를 죄다 두카토 금화로 받아갔다.
나머지 참가국들처럼 신을 위해 종군한 것이 아니었다.
“뭐, 우리한테는 다행이로군. 그들이 복귀할 때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말이야.”
알폰소는 지시를 내렸다.
“베르나르디노 경, 발리안티에 가서 전당포에 다녀와.”
“아니, 절 보내시는 거 아니었어요? 진짜로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만프레디 경이 발끈했다. 알폰소는 웃으며 그에게 농을 건넸다.
“자네한테 맡기면 금화가 아니라 죄다 술로 바꿔올 것 같아서 그래.”
알폰소가 기사들을 보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기운이 날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향에 보낼 편지를 쓰게. 포르토 상인들이 귀환하는 길에 집으로 다 같이 보냄세.”
기사들의 얼굴이 다 함께 밝아졌다. 한 명만 빼고.
“아니, 저는 편지 안 써요?”
이번에는 베르나르디노 경이 발끈했다. 알폰소는 웃는 낯으로 답했다.
“자네는 쓸 사람도 없지 않나?”
“왕자님!”
지금같이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도 서로가 있으니 웃을 수 있었다.
웃는 동안에는 시름이, 굶주림에 대한 공포가, 다른 번듯한 군인들의 비웃음이 잊혔다.
이 또한, 언젠가는 웃으며 나눌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했다.
* * *
그 시각, 에트루스칸 왕국에서는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는 왕자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었다.
“이놈은 왜 감감무소식이야!”
레오 3세는 자신의 내실에 앉아 한탄했다.
가벼운 로브만 걸친 국왕의 옆에는 루비나 백작 부인, 아니, 피사노 공작 부인이 여상스럽게 앉아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걱정되시겠어요, 국왕 폐하.”
그녀는 탐스러운 포도를 레오 3세에게 건네며 은근슬쩍 덧붙였다.
“율덴부르크 대공의 서한은 잘 도착한 걸 보면, 편지 자체를 못 보내는 상황은 아닐 텐데요.”
알폰소 왕자를 데리고 예사크로 출항한 율덴부르크 대공은, 갈리코 왕국을 떠나고 약 한 달여가 지난 후 에트루스칸 왕국에 공식 서한을 썼다.
‘사전에 계획된 바는 아니었으나 에트루스칸의 왕위계승권자, 알폰소 왕자가 성전에 참여코자 하는 의지가 강하여 자비를 더욱 널리 흩뿌리고자 예사크 현지로 동행 중이다, 에트루스칸 국왕의 너른 해량 바란다’라는 서한이었다.
“글쎄나 말이야! 아비한테 편지 한 통 쓰는 게 그렇게 어렵나?”
자기가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전혀 성찰과 반성이 없이 당연히 편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레오 3세였다.
“⋯⋯그래도, 기특하긴 하단 말이야.”
하나 아들의 기지는 그에게도 반가웠다.
알폰소 왕자가 성공적으로 갈리코 왕국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날, 에트루스칸 왕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왕실에 남은 사람이 없으니 정확히는 레오 3세 혼자 들떴다.
갈리코 왕국 측은 알폰소 왕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에트루스칸 측에 끝까지 숨겼으나, 이상한 정황까지 모두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은 몇몇 소식통을 통해서 알폰소 왕자의 공식 석상 참여가 뚝 끊겼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알폰소 왕자의 편지 또한 초반 몇 번을 제외하면 고국에 전달되지 않았다.
레오 3세와 그의 대신들은 설마 갈리코 왕국이 정말로 왕위계승권자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율덴부르크 대공의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제 수완으로 탈출도 하고. 이 아비 걱정을 덜어 줬어. 아직 애새끼인 줄 알았는데 어엿한 일국의 후계자 감이야.”
루비나는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최대한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다 크셨네요.”
“그래서 말인데.”
레오 3세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놈한테 뭐라도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혈혈단신으로 십자군 사이에 끼어 있을 텐데, 얼마나 눈치가 보이겠어?”
왕은 다국적 군대가 모여 있을 때 적은 인원으로 얹혀 간 왕자의 처지를 걱정했다.
“갈리코에는 사절로 보냈던 터라, 머릿수도 적고 군자금이랄 것도 딱히 없지 않나?”
“그렇겠지요.”
“전쟁터에 가면 숨 쉬고 움직이는 게 죄다 돈인데.”
레오 3세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늠을 해 보았다.
“작게나마 기사단을 파견해 주는 게 나을까, 아니면 군자금을 보내주는 게 나을까?”
왕자가 현지에서 활동하다 돌아오길 원한다면 소규모 기사단을, 그게 아니라 바로 귀국을 희망한다면 금화를 보내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놈은 연락이 돼야 의논이라도 하지! 답이 없어, 답이!”
레오 3세가 재차 분통을 터트리자, 루비나 공작 부인은 가볍게 미끼를 던졌다.
“아효, 국왕 폐하. 너무 자비로우셔요.”
내가, 자비롭다고?
루비나 공작 부인은 의외의 칭찬에 얼떨떨해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레오 3세를 본격적으로 부추기기 시작했다.
“부왕께 보고 한마디도 없이 제멋대로 달아나서 라트갈린 땅에 있다는 아들에게 군자금이며 기사단을 보내주실 생각을 하시는 아버지는 세상에 국왕 폐하밖에 없을 거예요.”
그녀는 은근슬쩍 그의 어깨선을 주무르며 한마디를 더 얹었다.
“갈리코 왕국을 무사히 탈출했는데도 아버지에게 편지 한 통 없다니, 불효막심한 자식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