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98화 (198/733)

<제198화> 부러지지 않는 (1)

“오?”

레오 3세는 루비나 공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왕에게 체자레 데 카를로의 새 작위를 상기시켰다.

“피사노 영지는 가에타 바로 옆에 붙어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레오 3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피사노 공작은 사병을 양성할 권한이 있었고요.”

“확실히 그랬지.”

국왕이 한사코 피사노 노공작을 각양각색의 세금과 창의적인 칙령으로 괴롭힌 것은 그가 위협적인 규모의 사병을 양성할까 두려워서였다.

“이제 피사노 노공작은 저세상 사람이고, 노공작이 양성한 군대는 믿을 만한 사람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까?”

“⋯⋯!”

국왕은 한 번도 체자레를 가용 가능한 군사력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체자레는 알폰소와 다르게 검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고 태양 아래서 땀 흘리는 것을 질색했다.

그나마 주색잡기는 모조리 잘해서 사냥에는 능하다 정도?

무엇보다, 서자였다.

유능하지 않은 것이 미덕인, 궁정 광대처럼 같이 있을 때는 즐겁고 화사하고 집에 보낸 이후로는 무해한 사생아.

그의 첫 번째 자식은 그 역할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수행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루비나의 말이 맞았다.

피사노 노공작이 몰래 양성해 두었을 사병은 이제 체자레의 것이다.

“폐하. 체자레를 북쪽으로 보내세요. 그 아이도 이제 ‘자기 영지’를 둘러볼 때가 되었습니다.”

루비나는 확신을 가지고 레오 3세를 부추겼다.

‘체자레 공작’은 영지를 하사받고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영지를 시찰조차 하지 못했다.

수도의 한량 노릇을 그만둬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을 사리는 아들에 비해 그 어머니는 훨씬 대담한 승부사였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자기 아들이 알폰소 왕자를 제치고 선두에 나설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왕자가 고립되어 있는 사이에 전공을 올려야 한다.

“체자레 백⋯⋯. 아니, 피사노 공작께서도 이제는 어엿한 한 사람 몫을 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사전에 약조가 있었는지, 콘타리니 백작이 루비나 공작 부인을 거들고 나섰다.

“왕실의 남자는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하는 법입니다.”

왕실의 남자라. 그래, 그놈도 이제는 왕실의 남자지.

체자레를 이제껏 뒷방에 처박아놓게 만들었던 신분상의 문제는 치유된 것 아닌가! 국왕은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피사노 공작을 영지로 올려보내 군대를 꾸리게 하자.”

피사노 영지의 돈으로, 믿을 만한 친혈육이 지휘하는 군대가 생긴다.

이것은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레오 3세가 가장 좋아하는 구도였다.

* * *

“예? 저더러 내일 피사노 영지로 올라가라고요?”

“그래! 잘되지 않았니?”

루비나 공작 부인이 기대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본인과 꼭 닮은 아들을 을렀다.

“이 어미가 힘들게 만든 기회다. 망치면 가만 안 둬.”

“어머니. 일을 저지르기 전에 아들과 상의 좀 하면 안 됩니까?”

“은쟁반에 전공을 따다 얹어 줬는데 넌 또 뭐가 불만이야?”

“이겨야 전공이지!”

체자레는 욕심은 많고 현실 인식은 떨어지는 어머니에게 홱 짜증을 냈다.

“어머니, 제가 무슨 경마장의 말입니까? 마주(馬主)인 어머니는 사료만 대고 우승은 말이랑 기수가 알아서 하고요?”

“체자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확실히 루비나 공작 부인은 체자레에게 사료 이상의 것들을 성심성의껏 대기는 했다.

하지만 아들의 역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피사노 영지에 사병이 뭐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들을 거기다 갖다 박아요? 지금 그거 갈리코 중장기병대 막으라고 보내는 거잖아!”

“하면 되지! 내 아들인데 왜 못 해!”

“하! 속도 편하셔!”

그는 답답한 마음에 붉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피사노 노공작의 사병이 뛰어나단 얘기 들어 봤어요? 정확하게 몇 명인인지는 아세요?”

“내가 다 확인하고 널 거기 보낸 거지! 콘타리니 백작이 확보한 영지별 사병 명부에 따르면 보병 6000명이 있다고 하더라!”

“그건 만든 지 10년도 더 넘었어요! 그 병사들이 아직도 거기 있을 것 같아요?”

대귀족들이 중앙정부에 협조를 꺼리게 되면서부터 영지별 사병 명부는 갱신되지 않았다.

아무도 국왕에게 자신의 정확한 상황을 알리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리코 군대는 1만 6000여 기의 최정예 군사라고! 아들을 죽일 생각이야?”

“설마 죽겠니?”

“어머니!”

루비나는 아들의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폐하를 어르고 달래서 널 에트루스칸 군의 총사령관으로 만들게!”

순진해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지, 욕심이 눈 앞을 가린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모친을 두고 체자레는 원망을 쏟아부었다.

“총사령관은 무슨 총사령관이에요! 유령 밀알 까먹다 창문 두드리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어미 능력 못 믿니?”

“아니, 그리고 총사령관 달면 뭐 해요? 총사령관 아들의 첫 이력을 ‘무슨 무슨 전투 패배’로 쓰게 만들면 퍽이나 어머니 야심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야심이다. 나의 야심이 아니다.

선을 긋는 아들의 발언에 루비나 공작 부인은 급기야 발칵 성을 냈다.

“넌 애가 왜 그렇게 비관적이니? 설마 엄마가 너 망하라고 그랬겠어? 다 어련히 생각이 있으니 그런 거야!”

“생각? 무슨 생각이요?”

체자레는 어머니 머리에서 제대로 된 생각이 나오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루비나는 자신이 퍽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레오 3세의 비위를 귀신같이 맞추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일 뿐 전략을 잘 짜거나 현명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현명했다면 비소 사건을 그렇게 처리하진 않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래 고위 귀족은 사로잡아도 몸값을 받고 교환하지, 죽이는 법은 없지 않니. 네가 총사령관만 되면⋯⋯.”

“친엄마 맞아요?”

갈리코 왕국의 필리프 4세는 정식 왕위계승권자인 알폰소 왕자마저 감금해버리는 미친놈이다.

자기가 사로잡히면 그 왕이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해 본 체자레는 등골에 오한이 들었다.

“하여간! 폐하의 명은 이미 떨어졌어. 내일 당장 출발해.”

그러나 이 관계의 키는 체자레가 아니라 루비나가 쥐고 있었다.

체자레는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레오 3세의 명이라니 거역할 수도 없다.

제발, 피사노 영지의 상태가 자기 예상보다 준수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어길 수 없는 명령 때문에 고생하는 남자는 또 한 명 있었다.

“디노 경, 갑옷이 그래서 불편하지 않아?”

알폰소 왕자는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물었다.

그들은 중장기병용 제식 갑옷을 일부만 걸치고 장화를 신고 걷는 중이었다.

“왕자님도 똑같은 무게를 다 짊어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폰소 역시 기병용 갑옷을 걸친 채 도보로 걷고 있었다. 보병인지 기병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매무새였다.

그는 세상 선량하게 웃고는 선량하지 않은 답변을 했다.

“여기서 제일 늙은 게 자네니까 그렇지.”

“왕자님!”

“노인 공경한 거야.”

그 옆에서 만프레디 경이 투덜거렸다.

“우리를 이런 임무에 투입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거 완전 허드렛일 아닙니까?”

알폰소 왕자는 만프레디 경을 다독였다.

“대신 죽을 일은 없잖아. 우리, 좋게 생각하자고.”

그들은 전쟁터 후방에서 적군의 도주로 중 하나를 미리 막는 임무를 받았다.

말이 좋아 임무이지, 본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야트막한 돌산 위에 앉아 오솔길을 지키고 있다가, 전투가 끝난 후 본대의 전령이 오면 어슬렁어슬렁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알폰소 역시도, 처음에 이 임무를 전달받았을 때 ‘우리와 공을 나누기 싫어서 이런 일을 주었구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에트루스칸의 왕위계승자를 위험한 전장에 박아버리기 껄끄러운 건 이해합니다만, 전 총사령관 천막이라도 호위하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이건 푸대접이라고요!”

“그건 슈테른하임 직속 근위기사단이 있으니 말임세.”

돌산에 자리를 잡으면서도 계속 투덜대는 만프레디 경을 옆에서 베르나르디노 경이 달랬다.

“대신 우리는 편하지 않나? 쉬엄쉬엄 있다가 슬슬 퇴각하면 되지.”

그는 손으로 이마 위를 가렸다.

“아, 햇빛이 너무 쨍한데. 뭐 천막 같은 거 칠 거 없나?”

베르나르디노 경은 소풍에 빗대 약간의 농담을 건넸다.

햇빛이 쨍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전장이 있는 쪽이었다.

햇살이 뜨거워서 그런지 검은 점이 보이는 것 같아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아니, 벌써 노안이 왔나?”

“?”

“지평선에 시꺼먼 게 보이잖습니까.”

눈을 껌벅이는 베르나르디노 경을 두고, 알폰소 왕자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피하느라 인상을 두텁게 찡그린 그의 시야에 시커먼 무언가가 잡혔다.

그걸 본 것은 알폰소뿐이 아니었다. 왕자의 곁에서, 만프레디 경의 긴장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약 1800 피에디 전방에 적군 발견!”

알폰소가 일그러진 눈매로 적군을 주시하는 와중에도 보고는 이어졌다.

“병종은 보병! 경보병으로 추정! 약⋯⋯. 50여, 아니 80여 명! 이쪽으로 직진 중!”

알폰소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옆에서 함께 위치를 잡고 있던 엘코 경에게 속삭였다.

“엘코 경, 지금 당장 남쪽으로 내려가 증원을 요청하게.”

전투의 본진은 북쪽에 있지만 숙영지는 남쪽에 있다.

“요청 인원은 50명.”

이 정도라면 숙영지에서도 급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왕자님.”

엘코 경이 고개를 숙이며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님을 두고 제가 어찌⋯⋯.’ 같은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이대로 여기 남아 있으면 모두가 다 죽는다.

엘코 경은 재빠르게 돌산을 타고 내려가 남쪽 오솔길로 사라졌다.

이것으로 이쪽은 정확하게 11명, 기병도 아니고 보병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다.

“전원! 위치로! 고지를 사수하며 위치 이탈 불허한다!”

궁병이라도 있었으면 해 볼 만했을 텐데. 상대가 경보병이니 석궁병까지도 필요 없고 장궁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도주가 답이었을까? 아니다. 무장 무게 때문에 도망쳐봤자 잡힌다.

지형의 이점이 있는 이곳에서 버티는 것이 그나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1:8, 여기에 승산이 있을까?

알폰소 왕자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갔다.

그는 기계처럼 명령을 내리고 배운 대로 역할을 수행했지만 지금 이 현실이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 “우으아아아아아아아!”

상대의 선봉이 돌산 위로 짓쳐왔다. 이교도 군대는 손바닥만 한 방패와 거대한 반월도를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보병답게 그들의 첫 공격은 투석이었다.

- 따당! 따다다다닥!

자갈들이 에트루스칸의 기사들을 향해 무더기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사들은 다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중갑주를 전부 걸치고 있었다.

알폰소의 외침이 인원을 독려했다.

“위치 사수! 전진을 불허한다! 투석이 떨어질 때까지 버틴 후 접근 시에 처치한다!”

미친 듯이 떨렸지만 목소리는 침착하기 그지없이 나왔다.

투석은 성가셨고 전신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이걸로 전투에서 이탈할 만큼 다친 인원은 없다.

알폰소는 주의 깊게 전방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접근한 첫 번째 이교도에게 칼을 휘둘렀다.

- 서걱!

왕자의 검이 이교도의 손목을 날렸다.

- “으아아아아아아!”

이교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절규하며 주저앉았다. 흰 돌산 위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그것이 신호였다.

- 챙강!

- 퍽!

- 쿵!

돌산 위에서 위치를 고정한 왕자의 기사들이 일제히 교전을 시작했다.

돌산으로 올라오는 길은 일단은 하나였다. 이 길을 최대한 틀어막고 버텨야 한다.

‘제발!’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기를. 누군가가 죽기 전에 지원병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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