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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199화 (199/733)

<제199화> 부러지지 않는 (2)

뙤약볕은 강렬했고 왕자의 기사들은 용맹했다.

그들은 초반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을 수수깡처럼 베어나갔다.

왕실에서 심혈을 다해 10년 이상 기른 정예 기사와, 모집 후 별다른 훈련 없이 전장에 밀어 넣은 경보병은 자질에서건 무장에서건 차이가 났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인간은 지치기 마련이다. 약 한 시간여가 지난 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디노—!!”

알폰소의 절규가 허공을 울렸다.

이교도의 반월도가 베르나르디노 경의 뒷덜미를 쳤다.

가뜩이나 적군 셋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따개비가 붙은 등고래 같은 형국이던 베르나르디노 경은 소리 없이 지면으로 침몰해갔다.

알폰소는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지척에서 대여섯 명을 혼자 붙인 채 검을 휘두르던 만프레디 경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아군의 은빛 갑주가 이따금 보이긴 했지만 시야의 대부분을 채운 것은 이교도의 붉은 허리띠와 시커먼 반월도였다.

디노 경을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으아아아아아아—!”

- 카챙!

왕자의 검이 이교도의 도신을 쳐냈다. 한 손으로 양손검을 쳐낸 것이다.

이교도가 중심을 잃은 사이에 알폰소의 검이 재차 적군의 몸통을 노렸다.

- 푸확—!

피분수가 튀겼고 이교도는 쓰러졌지만 그 바로 뒷공간에서 처음 보는 반월도가 튀어나왔다.

있는 힘껏 내지른 오른팔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끝이 없었다.

- 콰직!

시커먼 도신은 알폰소의 몸통으로 짓쳐들어왔고, 갑옷의 연결부가 부서지는 느낌과 동시에 옆구리에 화끈한 열감이 퍼졌다.

알폰소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전장 한복판인 것을 감안했을 때, 놀랍도록 느린 움직임이었다.

‘⋯⋯여기까진가?’

손발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에 부하가 쌓여 한순간에 불이 꺼진 실내, 물먹은 솜 같았다. 몸이 자기 몸 같지 않았다.

그간 꿈을 꿨었는지도 모른다.

튼튼한 육신을 가지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느 왕국의 왕자로 살아왔던 나날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아이를 낳으리라 결심했었던 나날들.

지금은 갑주가 익어버릴 것 같은 태양열 아래에서 이질적인 이교도들과 칼을 주고받는 중이다.

낯선 대지에 처박히기 직전이다. 그의 전신을 정복한 생경한 무력감.

“왕자님—!!”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프레디 경인가.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게 이마에 핏물이 흘러 눈으로 들어갔다.

투구를 열고 닦을 새도 없어 알폰소는 눈을 두어 번 다시 깜박였다.

- 퍽!

“으악!”

만프레디 경의 비명이 들렸다. 피에 물든 시야 사이로 무너져내리는 만프레디가 보였다.

그의 투구는 날아간 지 오래였는데, 어깨까지 닿는 흑발이 쓰러지는 몸통의 뒷덜미를 뒤늦게 따라갔다.

저것은 본 적이 있다. 미레이유 공작의 손아귀에서 아리아드네를 구했을 때 그녀의 흑발이 저렇게 흩날렸었다.

검을 들어 만프레디 경, 아니, 내 친구 안토니오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은 이렇게나 힘이 없다.

- ‘매일의 인내가 쌓여서 영원을 만든다.’

알폰소 왕자의 귀에, 언뜻 잠언록의 구절이 들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부서지지 않는 인간의 투지야말로 정녕 고귀한 것이니라.’

어머니는 항상 싸워 오셨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도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피를 토하며 싸웠다.

아리아드네의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도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삶은 매일매일이 전투였고, 그녀는 결국에는 승리자였다.

내가 감히 뭐라고 저 둘을 지켜준다고 으스댔었나. 내가 감히 뭐라고 저 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나.

‘할 수 있단다, 내 아들.’

그의 귀에 문득 환청이 들렸다. 환청일까. 어머니가 날 돌봐주러 내려오신 걸까.

‘믿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알폰소는 마지막 괴력을 일으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방패를 버리고, 후들대는 손으로 한 손 검을 양손으로 잡은 채였다.

- 카캉!

눈앞에서 흑월도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는 거침없이 맨손으로 적군의 목덜미를 잡아 비틀었다.

“흐억!”

상대가 신음을 냈다. 알폰소는 그를 한 손으로 바닥에 버리고 만프레디 경의 방향으로 달려갔다.

“안토니오—!!”

그 뒤에서, 아군의 환희에 찬 외침이 들렸다.

“옵니다, 왕자님!”

알폰소는 거기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만프레디 경에게 붙은 이교도를 한 마리 더 쳐냈다.

아군의 외침은 한 번 더 울렸다.

“지원군이 오고 있습니다!!”

말에 올라탄 기병이었다.

엘코 경이 선봉 바로 뒤에서 한 손으로 고삐를 잡은 채 일행이 버티던 돌산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50여 기 남짓의, 한 줌인 병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천군만마보다도 중했다.

“흐아아아아!”

알폰소는 앞을 가로막은 반월도 한 개를 더 쳐냈다. 갑자기, 눈앞이 밝게 열렸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휘 회의가 열리는 천막 안에서 붕대를 칭칭 감은 알폰소 왕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그 옆자리는 원래 베르나르디노 경이 채웠어야 했으나, 지금은 만프레디 경이 앉아 있었다.

만프레디 경은 그들을 돌산으로 보낸 아헨바흐 백국의 알브레히트 경에게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전략 결정을 내린 지휘관에게 아랫사람이 대드는 것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상황은 특별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슈테른하임 공국의 율덴베르크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조직되었지만, 그 휘하의 군사는 10여 개국에서 알음알음 갹출하여 보낸 조직이었다.

지휘 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이 합의로 이루어져야 했다.

“분명히 후방지원업무라고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인원만 파견됐고요!”

만프레디 경은 자기가 앉아 있는 조그만 의자를 주먹으로 팡팡 쳤다.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양반이 죽기 직전이라고!”

베르나르디노 경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전쟁터에서 간신히 구조되었다.

지금도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뿐만입니까? 알폰소 왕자님께서도 돌아가실 뻔했어요!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한 적통 왕위계승권자이십니다! 왕조의 대가 끊기면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이에 아헨바흐 백국의 기사 하나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전쟁터에서는 죽고 사는 게 하늘에 달렸소.”

아헨바흐 백국은 슈테른하임 공국에 딱 붙은 약소국이었으나, 그들은 이번 성전에 1000여 명의 보병과 지휘관 약간명을 파견했다.

그들로서는 큰 희생이었다.

왕위계승자와 고위 귀족 위주로 달랑 10여 명만 보내온 에트루스칸 왕국과는 그 무게감이 조금 다른 차원에서 달랐다.

“깃발 들고 전쟁 놀이만 할 거였으면 애초에 지원을 했으면 안 됐지.”

“뭐요?!”

만프레디 경이 발칵 성을 내자, 그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말을 얹었다.

“지금 공 좀 세웠다고 기세등등한 모양인데 운이 좀 좋았던 걸 가지고 전술관 회의까지 와서 이따위로 굴면 안 되지.”

“뭐? 운이 좀 좋았다고?! 댁들은 운으로 1:10 열세를 이길 수 있어?!”

만프레디 경은 지금 숫제 깽판을 칠 기세였다.

전투가 끝난 이후에나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그들은 단 11명이서 총 100명의 적군과 맞서 싸웠고, 그중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게다가 경보병의 지휘관은 지역에서 명망 높은 이교도 종교지도자의 아들이었다.

몸값이 쏠쏠한 포로를 잡은 셈이다.

“이 새끼가⋯⋯!”

알폰소 왕자가 입을 열었다.

“만프레디 경. 그만.”

그 한 마디에, 만프레디 경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억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만프레디 경을 양보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저자들의 말이 옳아. 전쟁터에는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하지.”

그는 푸른 눈에 불길을 담고 아헨바흐 백국의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난 앞으로 몸을 사리지 않을 거요. 전방에 배치해 주시오. 어설픈 후방 부대는 사양합니다.”

“하지만 전방에 배치하기에는 그쪽 무장의 상태가⋯⋯.”

말이 없는 기병, 열 명 남짓한 인원이다. 전진 배치하기에는 상당히 애로사항이 있는 병력이기는 했다.

“이번 포로의 몸값에서 정당한 내 몫을 요구하오. 무장은 갖추면 돼.”

이번에는 비르켄바움 영지에서 파견된 남작 하나가 나서서 제지했다.

“이런 이기적인! 이제껏 연합군이 무상으로 당신들을 지원한 게 얼마인지나 알고 있소?”

연합군은 현지에서 전리품이 생기면 기여도에 따라 나눴다.

하지만 이제까지 알폰소 왕자의 일행이 신세 진 것이 있으니, 당연한 몫을 양보하라는 이야기였다.

옆 사람이 덜 가져갈수록 자기가 더 가져가는 구조라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간 공짜 밥 얻어먹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알폰소 왕자의 표정에서 분노가 튀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컥 일어섰다.

- 콰당!

왕자가 앉아 있던 의자가 쓰러져 천막 안에서 뒹굴었다.

그제야 이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율덴부르크 대공이 입을 열었다.

“다들 말씀에 일리가 있으십니다.”

그는 상황을 정리했다.

“알폰소 왕자. 진정해 주시오. 귀하의 수하들이 해당 임무를 맡게 된 것은 알브레이트 경이 업무분장을 나누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총사령관인 나의 결정이오.”

그는 깊은 시선으로 만프레디 경을 바라보았다.

“본부의 지휘에 따라 주길 바라오.”

만프레디 경이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알폰소 왕자도 당장이라도 비르켄바움의 지휘관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던 기세를 죽였다.

“그리고 이 천막에 있는 모두.”

그는 사려 깊은 회색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번 전투에서 에트루스칸의 친구들이 큰 공을 세웠음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재차 불만에 찬 목소리로 토로했다.

“포로 하나 잡은 게 거 몸값이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싸고도십니까?”

약 30 두카토 짜리 포로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다.

“전리품이 문제가 아닙니다.”

율덴베르크 대공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부대는 후방에서 우리에게 협조한 마을을 불태우러 가던 길이었어요. 몸값도 몸값이지만, 알폰소 왕자와 에트루스칸 군은 많은 사람을 구한 겁니다. 이번 출정의 목적을 잊지 마십시오.”

성전. 천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성지 예사크를 탈환하기 위해 신실한 천신의 종들이 자원하여 성지로 향하는 순례의 전쟁.

“현지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예사크의 성벽을 함락시킨다 한들 잠시의 승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현지민들을 감화해야 합니다.”

불손한 눈빛까지 한 번에 가라앉히진 못했지만 항의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었다.

율덴부르크 대공은 분위기를 잡은 기회를 틈타 돈 문제까지 한 번에 정리했다.

“전리품 분배는 원칙대로 하도록 하십시오.”

알폰소는 감사의 의사표시로 율덴부르크 대공에게 짧은 목례를 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더 있었다.

“총사령관 각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차기 전투에서 선봉에 서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배치 시 고려는 하겠습니다. 무장이 개선되면 알려 주십시오.”

한 줌의 병력으로 한 개 중대를 막아서고 승리까지 쟁취한 알폰소 왕자의 군공은 혁혁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규모는 작았으나 질적으로 쉽게 이뤄낼 수 없는 성취였다.

그날의 전략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찝찝하지만 동시에 개운한 하루였다.

회의가 파한 후 숙영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전략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신분의 기사들과 일반 사병들의 시선이 알폰소 일행에게 쏠렸다.

어느 정도는 신기해하고, 어느 정도는 선망하는, 또 누군가는 깔보거나 급을 대어 보는 그런 눈길이었다.

“왕자님, 거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좀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만프레디 경이 촐싹거리며 물었다. 알폰소 왕자는 피 묻은 금발을 쓸어넘기며 느른하게 답했다.

“뭐 이 정도로 벌써.”

왕자는 훨씬 더 큰 미래를 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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