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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0화 (200/733)

<제200화> 유연함의 미덕

피사노 영지에 첫발을 들인 ‘피사노 공작’은 영지의 성도, 국경도시 기넬리에 입장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영지민의 눈에서 읽히는 적의와 경계심이 그의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일반인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어, 군대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돼, 라고 되뇌며 병영에 들어선 체자레의 기대는 무참히 산산조각났다.

군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병영이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다들 어디로 갔나? 훈련 중인가?”

피사노 노공작이 젊었던 시절부터 이곳에서 일한 늙은 관리는 피식 웃었다.

평정을 가장하며 묻는 잘생긴 젊은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 비웃으며 답했다.

“훈련은, 무슨요. 다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새 피사노 공작의 눈가가 샐쭉해졌다.

“탈영?”

“아효, 이걸 탈영이라고 부르시면 영지만 중 1/4는 목이 달아납니다요.”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피사노 노공작 사후에 이미 6000명이었어야 했을 병력은 2000명 대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게다가, 최근 곡물가가 치솟은 이후로 남은 사병마저도 줄지어 숙소를 벗어났다고 했다.

“월급으로는 식구들 입에 풀칠을 시킬 수가 없으니까요. 곡물가가 치솟았지 않습니까. 지금 밖에 추수가 전혀 안 되거든요.”

피사노 영지는 가에타 영지 옆에 딱 붙어있었다. 국경선의 맨 동쪽이 가에타, 그 바로 옆이 피사노다.

자연히, 성벽 밖에서는 갈리코 기병대가 물 만난 고기처럼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한두 명씩 아녀자 납치의 소문도 들려왔다.

“건장한 남정네들이 단체로 추수꾼들을 지키러 나가서 기습 추수를 하고 돌아옵니다요. 그 일거리가 성행하면서부터 병영이 텅텅 비었습죠.”

관리는 그 추수를 자기 논밭에서 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남의 밭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재빠르게 수확하고 돌아온다는 설명이었다.

지금 왕국의 북부는 치안이 무너져가는 상태였다.

“이 지역에서 추수는 언제쯤 끝나나?”

체자레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마디 더 물었다.

“병사들이 복귀는 하겠지?”

늙은 하급관리는 박장대소할 것만 같은 얼굴로 젊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송이를 대하는 자신의 표정을 간신히 예의범절에 맞는 선으로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습죠.”

그들이 돌아올지는 전적으로 그때의 곡물 가격과, 피사노 공작이 지급할 급료가 그 곡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달린 문제였다.

인플레이션을 사전에 예측할 수는 없으니 지금 답변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하지만 체자레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하급 관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분을 폭발시킬 때가 아니다.

‘참자, 지금은 영지 입성 첫날이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영지의 상황 파악을 하려면 이 양반의 도움이 필요했다.

맘대로 목을 날렸다간 영지 민심이 어디로 튈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곡식 창고 상황 안내를 받으려면 누구한테 가야 하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관리에게 물었다. 관리는 썩어버린 앞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접니다요.”

수도의 우아함과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던 체자레는 그의 치아 상태에 무심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실수로 표정 관리를 못 한 것을 본능적으로 자책했다. 하지만 관리의 그 다음 말에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제대로 구기고 말았다.

“보러 가실 것도 없습니다요. 텅 비었으니까요.”

* * *

아리아드네는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산 카를로는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벼운 여름옷은 두터운 공단 드레스로 모두 바뀌었다.

그녀는 무거운 의복을 벗고 슈미즈만 걸친 채 화장을 지우려 경대 앞에 앉았다.

“저⋯⋯. 아가씨.”

산차가 침실 입구에 서서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안나가 막 화장수로 그녀의 화장을 지우려던 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산차를 바라보았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걸리는 것은 또 있었다.

“내가 외부인의 방문은 다 거절하라고 했잖아.”

온 가족이 바깥출입을 삼가는 중이었다.

아예 갇혀 버린 이사벨라와 돈줄이 꽉 죄인 이폴리토는 물론이고, 데 마레 추기경조차도 둘째 딸의 말을 따랐다.

추기경은 가급적이면 외출하지 않고 자택에서 일처리를 했다.

지금 산 카를로는 역병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병식을 보이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 전파 속도가 급격했다.

레오 3세가 난리를 쳐서 집시와 외국인을 대부분 내쫓은 뒤에 잠시 수그러드나 했지만, 이내 절대로 내쫓을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부유한 상인이나 존경받는 지역 원로 같은 자들 사이에서도 역병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특정 인종이나 직업군을 타겟으로 삼아 도시에서 내쫓는 식의 방역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최초의 고위 귀족 희생자가 나왔다. 산 카를로 전역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 문지기가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어서⋯⋯.”

“누군데 그래? 내 손님이야?”

그녀는 자신을 방문할만한 사람 중에 자신의 문지기가 거절은커녕 자신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곧장 출입을 허락할만한 사람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줄리아? 편지를 보내놨으니 그쪽도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을 텐데.

라지오네 양장점, 아니, 라지오네 리넨 쪽 사람들? 문지기가 거절을 못 했을 리가.

그러면 역시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인가?

하지만 방문객은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체자레 백작⋯⋯. 아니, 피사노 공작님이세요.”

체자레가? 아리아드네는 기분이 팍 상했다. 그녀는 그와 처리할 용무가 없다. 그러면 체자레가 방문한 목적이라고는 뻔했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사람.

‘수도가 이 난리가 났는데, 여자에 눈이 뒤집혀서 남의 집으로 쳐들어와?’

하지만 문지기가 왜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 없었는지는 십분 이해했다.

요새 수도에서 기세가 등등한 피사노 공작을 한낱 추기경 가문의 문지기가 내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싫은 소리는 결국 내 차지네.’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최대한 빨리 체자레를 집에서 내쫓아버려야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실내복을 가져와.”

그녀는 풀어 내렸던 머리를 다시 묶었다.

* * *

아리아드네가 손님용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체자레는 등을 보인 채 돌아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무슨 개폼을 잡는 거야.’

그녀는 순간 욱했다.

이 난리통에 여자 얼굴을 보겠다고 들이닥친 남자라면 꽃다발은 없을지언정 사람이 나타났을 때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넘어 이른 밤에 이르는 시간 덕에 조금 잠긴 목소리로, 아리아드네는 냉정한 질타의 말을 건넸다.

“여전히 예의라고는 없으시군요.”

그녀는 체자레가 능글맞게 받아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물빛 눈이 지쳐 보였다.

“미안.”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풀죽은 목소리였다.

뒤늦게 그의 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우아한 왕의 사생아답지 않게, 그의 겉옷은 흙먼지에 엉망이 된 채였다.

장화에는 긁힌 자국이 있었고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도 모자에 눌려 엉망으로 헝크러진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당황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체자레는 물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도와줘.”

아리아드네는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이 표정, 이 말투는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거죠?”

전생의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와서 꼭 이런 표정으로 애원했었다.

성 밖으로 보낼 전령이 필요한데, 부탁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고.

“날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하지만 이번 생의 체자레 데 카를로는 잘생긴 이마를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구제 불능 쓰레기로 보여?”

‘네.’

무심결에 긍정한 아리아드네는 혹시 대답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입술 위에 손을 대 보았다.

“나랏일이야. 식량이 필요해.”

그때도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했었지.

“국경 수비대를 재건하도록 명을 받고 피사노 영지로 급파되었어.”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상황이 안 좋아.”

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창고는 비었고 군사들은 달아났어. 산 카를로의 시장보다 국경 지대 상황이 훨씬 나빠. 곡물가가 너무 가파르게 올라서 금화보다 곡물을 싣고 가는 게 나을 정도야.”

아리아드네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주의 깊게 체자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에게 수도 밀 저장량의 절반 이상이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나한테 팔아.”

이것 역시, 데자뷔다.

- “‘푸른 심해의 심장’을 나에게 팔지 않겠어?”

이번 생의 일이긴 하지만, 정말로 듣기 싫었던 단어들.

하지만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와서일까? 그때만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는 심술궂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값은 이번에도 ‘린빌의 백조’로 쳐 주실 건가요?”

체자레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는 조금 웃었다.

“아가씨는 ‘린빌의 백조’를 참 좋아하는군그래?”

체자레는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에 진주가 세팅된 그 브로치를 떠올렸다. 그 다이아의 어떤 면이 이 여자를 그토록 집착하게 하는 걸까?

“가지고 싶은 거라면 드려야지. 곡물을 구하는 사람이 난데, 대금 지급 방식은 채권자님의 의중을 따라 드려야 마땅하지.”

그는 성큼 다가서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아리아드네는 한 걸음 더 물러서려고 했지만, 등 뒤는 이미 장식장으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필요한 밀의 양은 4500 칸타로. 값은 총 1500 두카토 쳐 주겠어. 어때?”

약 3000명의 장정을 반년 정도 먹일 양이었다.

1500 두카토는 곡물값이 폭등하기 전 시세의 두 배 정도였지만, 세 배를 넘어 가늠조차 안 되게 치솟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선 미진한 액수였다.

체자레는 좁혀진 거리에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린빌의 백조’는 아가씨에게 미리 맡겨 둘게.”

사랑의 표식이라는 ‘린빌의 백조’.

“이후로도 밀 수매는 계속 필요하니까, 미리 치러 놓은 거로 치자고. 내 물건, 다른 놈에게 팔지 말고 확보해 놔.”

사랑인지 거래인지 헷갈리는 귓속말. 체자레는 항상 그랬다.

“우리 지속적인 관계를 맺자고. 나한테 팔아.”

체자레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드네의 입술 아주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다.

대리석을 깎아 놓은 듯이 잘 생겼다. 그는 거절 따위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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