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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2화 (202/733)

<제202화> 미지의 세계

아리아드네는 황급하게 하얀 말에서 뛰어내렸다. 양순한 암말이 놀라 조금 투레질을 했지만, 챙길 겨를이 없었다.

소년의 손을 덥석 잡은 아리아드네는 소년에게 물었다. 최대한 누른 목소리였지만 그 격앙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너, 이게 보여?”

소년은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엄청 예쁘게 빛나!”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전형적인 그 나이대 어린애였다.

“난 중앙대륙에서 누나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

그리고 소년이 던져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리아드네로서는 너무나 찾아 헤매던 정보였다.

“나 같은 사람? 손끝이 빛나는 사람이 또 있니?”

“우리 고향에는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어!”

물어볼 것이 많았다. 아리아드네는 우선 소년과 좀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다.

“너, 집이 어디니?”

하지만 열 살짜리는 원활한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주소를 알려주는 대신에 소년은 자기 할 말만 했다.

“누나 진짜 대단하다! 근데 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

“‘표식’이 하나밖에 없잖아!”

“‘표식’⋯⋯?”

그녀의 귀가 쫑긋 섰다.

“이거!”

소년은 자기 왼쪽 눈 밑을 가리켰다. 아리아드네는 무심코 눈 밑을 매만졌다. 회귀와 동시에, 의문의 핏빛 눈물점이 생긴 바로 그곳이다.

“‘표식’이 여러 개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예전의 집시 여인이 울부짖었던 말이 새삼 생각났다.

- “너는 반쪽짜리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반쪽짜리? 그거랑 관련이 있어?”

다급하게 물어보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가무잡잡한 소년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하늘을 쓸어 보였다.

“하늘에서 그분들이 지켜보고 있어!”

미라처럼 말라붙었던 집시 여인의 팔. 재가 되어 날아가던 전 하녀장 지아다의 시체. 아리아드네는 몸서리를 쳤다.

그 와중에 소년은 어른이 자기 얘기를 귀담아서 들어준다는 사실에 몹시 고무된 상태였다.

“이것까진 말해 주지. 누나 최근에 제안 하나를 거절한 적 있지?”

“제안? 무슨 제안?”

그녀에게는 하루에도 십여 건의 제안이 들어온다. 친척 누구를 고용해 달라는 요청으로부터, 남부에 사업을 벌이자는 제안까지.

“아마 부족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했을 거야.”

부족이 아니라 국가였지만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받은 그 비슷한 제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쁜 누나가 믿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소년은 힌트를 줄줄이 던졌다.

“음, 입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구나. 먹을 거, 그런데 돈이나 권세 같기고 하고⋯⋯.”

아리아드네는 탄복했다. 그녀는 소년이 받고 싶어 하는 걸 주기로 했다.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어?”

“난 발라사 오르도의 최강 살만의 직계라고!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지!”

자부심을 가득 담아 씩 미소지은 소년은 비밀 이야기를 해 준다는 듯이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빛무리를 따라서 해. 누나가 거절할 때 빛무리가 좋아하지 않았지?”

딱히 빛무리의 의사를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랬다.

그녀가 카멜리아의 아버지, 카스틸리오네 남작에게 낭패를 보게 하고 가에타 영주가 갈리코 왕국에 투항하는 것을 막았을 때, 손끝의 빛무리는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그날 오후 내내 춤을 춰 대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피사노 공작 체자레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울해서 방에 틀어박힌 사춘기 소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잠잠했다.

“빛무리의 뜻을 받아들여.”

“따르는 게 맞아?”

이는 듣기에 달콤한 이야기였다. 절대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머리를 쓰지 않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지시가 있다는 건 참 마음이 놓이는 일이다.

“걔들이 항상 맞는 말만 하는 건 아닌데⋯⋯. 이번에는 맞아. 당분간은 맞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적잖이 당황했다.

“뭐라고?”

“간혹 거짓말도 해. 착한 애는 아니야. 그렇지만 누나는 분기점이 아직 안 왔어. 안 왔을 거야, 아마.”

빛무리가 거짓말을 해?

“빛무리에 인간 같은 의사가 있어?”

아리아드네가 갈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질문을 하고 난 뒤에야 소년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아다나 집시 여인의 예를 생각하면 말해주는 것이 이상했다. 그만큼이나 급했다.

하지만 소년이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된 연유는 소년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놈의 새끼!”

주름진 손이 인파 속에서 날아와 소년의 뒤통수를 호되게 때렸다.

“아야!”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싸맸지만 화를 내는 대신에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 할머니⋯⋯!”

“너 이놈의 새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리아드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는 할머니였다. 붉은 치마를 입은 노파는 대로해서 손주를 혼냈다.

“너 내가 이런 일에 얽히지 말라고 말 했어 안 했어?”

“그, 그게⋯⋯.”

소년은 울상이 되어 항변했다.

“‘선지자’의 분기점이 코앞에 있잖아요. 게다가 좀 이상하다고요. 이런 건 참 신기하고 배울 것도 많고 기록으로도 남기고 싶고⋯⋯.”

- 딱!

노파가 손주의 꿀밤을 먹이는 소리였다.

“아야!”

소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노파는 손주에게 죄책감 하나 없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혈육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런 삶은 끝났어! 우리랑은 관계없어!”

“그렇지만 우리는 주술사잖아요!”

“잊어!”

그렇게 외치는 노파는 아이러니하게도 발라사 오르도의 살만 무녀임을 나타내는 인장 지팡이를 들고, 고귀한 신분을 증빙하는 귓불을 축 늘어뜨릴 정도로 무거운 비취 귀걸이를 여전히 걸고 있었다.

“이 할미는 너를 그런 운명에서 꺼내기 위해서 다 버리고 왔다! 내 결정을 헛되이 만들지 말거라!”

“저, 저기⋯⋯.”

소년이 몹시 혼나고 있는 모습을 본 아리아드네가 조심스럽게 대로한 노파에게 말을 걸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고 합니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의 식솔이에요. 혹시 저희 집에 모셔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시면⋯⋯.”

노파는 차가운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위아래로 훑었다. 왼쪽 눈 밑에만 있는 붉은 눈물점.

붉은 치마의 노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손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이마를 쓱 그었다.

얼굴 수건을 쓴 예쁘장한 처녀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 킁킁.

먼지를 쓸어내듯이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스친 후 자신의 지문 위에 얹힌 주술의 냄새를 읽어낸 노파는 혀를 끌끌 찼다.

“암하라 놈들 짓이 맞구먼.”

알아듣지 못했던 아리아드네는 반문했다.

“예?”

하지만 노파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흥!”

대신 그녀는 인장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리더니, 바닥을 쿵! 찍었다.

아리아드네는 지팡이가 지표면을 울리는 소리가 유독 크다고 생각했다.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노파와 소년이 있던 곳을 다시 쳐다보니, 그들은 인파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 안 돼!”

회귀의 비밀이 멀어져간다. 어떻게 찾은 실마리인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녀는 다급하게 주세페를 찾았다.

“주세페, 주세페!”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조손(祖孫)을 찾아와요!”

“예?”

“할머니와 손자, 붉은 치마에 특이하게 생긴 지팡이를 들었어요. 손자는 열 살 언저리! 에트루스칸 인은 아니고 외국인 같은데, 전형적인 외형은 아니에요! 서너 갈래로 땋아 내린 긴 머리카락! 소년은 까까머리!”

주세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급이 끝나는 대로 찾도록 하겠습니다.”

“배급이 문제가 아니야!”

아리아드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언제나 침착한 그의 주군이 이렇게까지 패닉한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주세페도 덩달아 깜짝 놀랐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주세페는 얼른 천막 쪽으로 돌아가 줄을 통제하던 인원 중 절반을 차출해서 사람들 사이로 내보냈다.

그들은 신속하게 흩어졌지만 아리아드네는 아마 인력으로는 그 노파와 소년을 찾기 어려울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새로운 피사노 공작은 식량을 대량으로 조달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피사노 영지로 돌아왔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최신 병기의 일종인 석궁을 50여 대 공수해서 영지로 돌아온 것이다.

말 안장이니, 새로운 형태의 등자니, 공예품 시계니 하는 물건들을 만들고 모으느라고 생긴 공방 장인 인맥을 싹싹 털어 얻어낸 쾌거였다.

하지만 그는 장비는 있으되 노하우가 일절 없는 상황이 얼마나 골 때리는 일인지 몸소 깨닫고 있었다.

“무지렁이 시골 촌놈들 같으니.”

그는 훈련장을 내려다보며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식량 대신 과분하게 많은 금화를 월급으로 주겠다고 회유해서 부대로 돌아온 300여 명의 사병이 아래에서 훈련 중이었다.

개중 똘똘하다는 놈들만 추려서 석궁을 손에 쥐여주었는데, 이걸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자리를 잡고! 유지하고! 1열이 쏜 직후에 2열이 쏘면 되잖아!”

제대로 된 교관이 없었다. 급기야는 답답해진 피사노 공작 본인이 평민들 사이에 뛰어들어서 시범까지 보였는데도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 “익숙한 물건이 아니라서⋯⋯.”

- “조준하고 버티면 되잖아! 뭐가 이렇게 어려워?”

병사들은 허수아비 같았고 그들을 독려해야 할 백인대장 셋도 의욕이 없었다.

백인대장 중 하나는 하다못해 아예 하극상을 벌였다.

- “그냥 강궁 쓰면 안 됩니까? 멀쩡히 잘 쓰던 물건 두고 왜 사서 고생을⋯⋯.”

군대가 상명하복이라는 것은 기강이 잘 잡힌 군대에서나 있는 말이었다.

피사노 영지의 사병은 오합지졸이었으며 체자레는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백인대장과 병사들이 일제히 태업을 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석궁은 관통력이 강궁보다 좋아 중장기병대를 상대하기에는 딱 맞았지만, 거대한 석궁을 바닥에 고정해놓고 쏘는 형태라 석궁을 무기로 사용하게 되면 궁병 본인의 기동력은 형편없어졌다.

강궁병으로 남아 있으면 유사시에 흩어져서 지리적 이점을 통해 도망치기라도 할 수 있지, 석궁병으로 전장에 나가면 몰살당하기에 제격이었다.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 이런 동상이몽이 또 없었다.

병사들과 실랑이 끝에, 체자레는 결국 일주일 안에 병종을 바꾸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국 강궁병을 데리고 전장으로 나서게 되었다.

“⋯⋯.”

젊은 피사노 공작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강궁병으로는 중장기병대를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공작님. 걱정은 붙들어 매십쇼! 석궁병으로 왔으면 50기지만 강궁병이니 300기 아닙니까!”

체자레의 옆에서 강궁을 주장했던 백인대장이 열심히 입을 털었다.

“피사노 영지의 강궁병은 역사에도 이름이 남을 정도로 뛰어납니다요!”

케케묵었다는 소리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지형지물을 이용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야산이 위치가 얼마나 좋은지!”

피사노 사병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이점은 근처 저리에 빠삭하다는 점이었다. 그

들은 고지대에 올라와 바람 방향에 맞추어 매복하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쏘면 화살은 더 강해지기 마련입니다요. 게다가 바람도 등 뒤에서 앞쪽으로 불고 있지 않습니까! 갑주고 뭐고 다 뚫는다니까요. 저만 믿으십쇼.”

“⋯⋯.”

석궁병과 강궁병을 섞었으면 석궁 50기가 아니라 석궁 50기에 강궁 250기였겠지.

하지만 결정이 다 내려진 이제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휘관이 할 말은 아니었다.

체자레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흑마 고삐만 짧게 잡았다. 애꿎은 말만 고개를 푸르르 떨며 고통받았다.

“저기!”

20여 기 남짓 되는 갈리코 중장기병대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식량 약탈을 위해 따로 떨어져 나온 소규모 부대로 보였다.

“옵니다! 중장기병대, 20기! 18시 방향으로 속보 전진 중!”

척후병이 나지막하게 매복한 본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맞추어, 체자레가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전군, 사격 준비!”

300기의 강궁이 일제히 산 아래로 보이는 기병대의 그림자를 향해 조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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