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체자레의 낭패
“사격 개시.”
체자레의 명과 동시에, 풀숲 속에서 화살비가 일제히 언덕 아래쪽의 중장기병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 후두두두두두둑!
300여 기에 불과해 대규모 전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장관은 아니었지만, 일개 지역의 사병이 부릴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제일 볼만한 기예였다.
그리고 그 직후, 체자레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팅! 티딩!
소리부터 불길했다.
- 티디디디딩! 티디딩!
갈리코 기병대의 은빛 갑옷이 폭우처럼 쏟아진 화살비를 가볍게 튕겨낸 것이다. 기대했던 기사들의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흥분한 말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건 진정한 정예병이다.
체자레는 망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갈리코 기사단이 야산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기보다도 전이었다.
“전군, 후퇴!”
테너 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명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이 우왕좌왕했다. 체자레는 신경 쓰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혼자서 달아나기 전에 퇴각 명령이나마 내린 것은 마지막 한 조각의 자존심이었다.
“성벽 안으로 후퇴한다!”
양심상 한 번 더 외쳐 주었다. 말이 좋아 후퇴지, 도망이었다.
작전 개시 전부터 패배 후 도주로를 고민하기 위해 한사코 석궁 사용을 거부했던 병사들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현실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으아아아아!”
- “이봐, 이봐! 비켜!”
- “같이 가!”
피사노 영지의 사병들이 헐레벌떡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휘관이 탄 매끈한 흑마는 이미 야산 중턱을 넘어 달리고 있었다.
- “저저저!”
- “씨X! 저걸 지휘관이라고!”
- “중앙에서 온 귀족님네가 저렇지!”
쌍욕을 퍼부어 보았지만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제부터 살아남기는 오롯이 개인의 역량에 달렸다.
부대 편제는 무너졌고 지휘관은 무의미했다. 영주는,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시골구석의 장정 삼백 명은 활을 내동댕이친 채 목숨을 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아들의 편지를 받고 상황 파악을 한 루비나 공작 부인은 눈물로 국왕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국왕 폐하. 애초에 이건 터무니없는 계획이었어요. 일개 영지의 사병으로 갈리코 군의 최정예 기사단을 막다니요!”
“끄응⋯⋯.”
그녀가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꾼 건 사실이었지만, 결국 도장을 찍은 것은 국왕 자신이다.
마지막 한 조각의 자존심 탓에 ‘체자레를 국경으로 보내자는 이야기는 네가 먼저 한 것’이라고 지적하지도 못한 레오 3세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됐나요? 지금쯤이면 답신이 오지 않았어요?”
“지긋하게 기다려 봐 임자, 며칠 되지도 않았소!”
참다못한 레오 3세가 언성이 높아졌다.
“폐하!”
루비나가 글썽이는 얼굴로 레오 3세를 바라보았다.
그 뒤에 생략된,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라는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하 감옥에서 생고생을 하고 난 이후부터 레오 3세가 선을 넘었다 싶으면 보란 듯이 콜록댔다.
곰팡이를 하도 들이마셔서 폐병에 걸렸다나. 너 때문에 매독에 걸렸다고 삿대질 안 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녀가 기침할 태세로 숨을 들이쉬자 레오 3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국왕 폐하. 마르케즈 백작이 알현을 청하나이다.”
이때 울리는 시종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감로수 같았다.
“오, 들라 하라!”
레오 3세는 너무나 기껍게 알현 요청을 승낙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마르케즈 백작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하지만 레오 3세는 이내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국왕 폐하. 분부하셨던 건에 대한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오! 전부 다?”
“오늘 오전으로 전부 다 도착했나이다.”
“그래, 어디 조건을 들어 봄세.”
루비나가 부탁했던 건이 바로 이 건이었다.
- “콘도티에로를 고용해 주셔요!”
콘도티에로. 용병대장.
자신의 무력부대를 이끌고 고용주에게, 아니, 고용주의 금화에 충성하는 외인부대.
돈만 주면 무슨 짓이건 한다고 해서 지옥에서 올라온 사냥개라는 비웃음을 당하는 족속이다.
충성심이라고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 주제에 악마도 혀를 내두를 만큼 높은 비용을 불렀지만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에 비하면 싸게 먹혔다.
“조건은!”
마르케즈 백작이 말이 없자, 국왕은 성마르게 보챘다.
“⋯⋯아무도 수락하지 않았나이다.”
“뭐?”
레오 3세는 얼빠진 표정으로 마르케즈 백작을 바라보았다.
“바리아티, 가로초, 폰타리니. 아무도?”
기라성 같은 콘도티에로 세 명의 이름을 읊은 레오 3세에게, 마르케즈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은 철갑의 바리아티였습니다. 거절 사유는 셋이 같았습니다.”
“돈이 모자라다 하는가?”
에트루스칸 왕국은 용병대장들에게 상한액을 제시하며, 이 안에서 입찰가를 부르라고 명했다.
팔라지오 카를로가 부른 상한선은 아주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다. 레오 3세는 조금 더 쓸걸, 후회했다.
하지만 마르케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그 돈에 미친 작자들이 금화 말고 무어에 신경을 쓰는데!”
레오 3세의 머리통 속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안 좋은 시나리오들이 스쳐 지나갔다.
국력이 날로 신장하는 갈리코 왕국에 적대하고 싶지 않아서? 에트루스칸이 그렇게 물로 보이나?
아니면, 루비나를 애지중지하고 체자레를 조카로 세운 내가 그렇게 위엄이 없어 보였나? 금화를 좇는 사냥개들마저 상종하기 싫을 만큼?
“역병이 도는 곳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아.”
용병대장의 살림 밑천은 그들의 잘 훈련된 병력이다.
한 명 한 명이 10여 년 이상 전장에서 굴러먹은 턱에 잘 기름칠 된 전쟁 기계 같았다.
반대로 말하면, 죽고 나면 대체가 어렵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콘도티에로들은 자기 병력이 상할까 봐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때에도 미적지근한 안전루트를 택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흑사병이라도 옮게 되면 콘도티에로로서는 대책이 없을 테니까요. 셋 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
상비군이 없는 국가의 최후였다.
언제든지 당겨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용병은 금화를 얼마를 주건 의뢰를 거절하고 있다.
레오 3세는 침묵하며 슬쩍 옆의 눈치를 보았다. 거기에는 루비나 공작 부인이 있었다.
“폐하⋯⋯! 우리 체자레는!”
루비나는 자기가 한 짓이 아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지도 모르고 발작했다.
아니,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을런는지도 모른다.
레오 3세는 자기 여자 앞에서 동티가 나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크게 역정을 내며, 마르케즈 백작에게 명했다.
“쓸모없는 놈들! 바리아티, 가로초, 폰타리니 말고 나머지 콘도티에리 모두에게 연통을 돌려라! 황금은 얼마든지 준다고 해! 급히!”
나머지는 에트루스칸 왕국과 관계가 좋지 않거나, 갈리코 왕국과 너무 친밀하거나, 아니면 용병대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아 중장기병대를 상대하기에 부적합하다고 결론 낸 곳들이었다.
하지만 국왕은 일단 루비나 공작 부인에게 무언가 보여주어야 했다.
이를 깨달은 마르케즈 백작도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하지만 한 줄기 의구심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연통을 돌리면 애첩의 마음은 풀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연통을 돌려봤자 지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국왕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사랑놀음은 그렇다고 쳐. 국경은 도대체 어쩌시려고⋯⋯?’
* * *
체자레는 인생 첫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배한 다음 성으로 돌아와 루비나 공작 부인에게 편지부터 썼다.
처참했던 패전은 알리며 나는 못 한다고, 국왕 폐하께 여쭈어 어떻게든 지원군을 보내든 자기를 대체할 사람을 보내든 나를 여기서 빼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성의 여론은 술렁거렸다. 아무리 소규모 공습부대였다고는 해도, 300명은 지금 피사노 영지가 내세울 수 있는 병력 중 상당히 큰 부분이었다.
그 병력을 지휘관이 전장에 내버리고 혼자 돌아왔다.
물론 지역 토박이들이라 그 중 상당수가 복귀하기는 했다. 백여 명 남짓이 살아서 성안으로 돌아왔다.
기병 상대로 도보로 도망간 것치고는 상당한 숫자였다.
하지만 살아 돌아와서 더 나빴다.
- “아니 글쎄, 피사노 공작이!”
피사노 공작 체자레의 잘생긴 검은 준마가 제일 먼저 꽁무니를 보이며 전장에서 달아났다는 입소문은 복귀자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삽시간에 성안에 파다해졌다.
체자레가 피사노 영지에 머무르는 일 자체가 곤욕이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작가의 시종장부터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농노까지, 그에게 차가운 비난의 눈빛을 던지는 것 같았다.
체자레는 타인의 시선에 몹시 예민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날 그날의 기분과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의 그에게, 피사노 영지는 지옥이었다.
“⋯⋯이렇게는 안 돼. 여기엔 도저히 여기 더 못 있어.”
하지만 어떻게든 국왕 폐하께 잘 말해서 자신을 수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체자레의 편지에 대한 어머니의 답장은 단호했다.
- “돌아오지 마. 죽어도 피사노 영지에서 죽어.”
체자레는 자기가 영지로 간다는 사실도, 영지에서 국경 수비를 맡을 거라는 사실도 최대한 비밀로 했다.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고 물자며 배급도 은밀하게 구했다.
하지만 루비나 공작 부인은 입이 쌌다.
자기 아들 자랑을 참기 힘들었던 그녀는 자신이 새로이 핵심이 된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 입을 놀려 버렸다.
“국왕 폐하께서 피사노 공작을 국경 방위를 하라며 영지로 올려보내셨지 뭐예요?”
“피사노 공작을 크게 쓰시려는 복안이신가 봐요. 감축드립니다, 공작 부인.”
체자레가 데 카를로의 성씨를 하사받고 공작으로 승급한 다음, 이 모자에게 잘 보이려고 드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을 ‘체자레 공작’이라던가 ‘루비나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세울 만한 번듯한 작위가 생긴 것이다.
루비나는 이것이 정말로 자기가 사교계에 받아들여졌다는, 드디어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꿇릴 것이 없다는 신호라고 여겼다.
“호호호. 국왕 폐하의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도 혹시 아나요? 언젠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실지?”
“피사노 공작 외에는 할 인물이 없지요.”
“대단하셔요!”
체자레는 성과 없이는 절대로 수도로 돌아와서는 안 됐다.
대신에 루비나가 피사노 영지로 올려보낸 것은, 각지의 봉건영주가 올려보낸 사병이었다.
콘도티에로를 고용할 수 없게 되자 레오 3세는 전국의 영주들에게 징발령을 내렸다.
「국경 방위. 각 지역의 영주들은 그대들 충성의 맹세를 이행하라.」
그러나 충성의 맹세 이행은 충성심이 있을 때에나 하는 법이다.
전국 각지에서 핑계가 쇄도했다. 노환이⋯⋯. 흑사병이 영지에 창궐하여⋯⋯. 식량이⋯⋯.
결국 수도에 도착한 것은 역병이 덜 퍼진 북부와 중부 각지에서 갹출한 병사 1500명에 불과했다.
레오 3세는 대로했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국왕은 1500명 인원이나마 전원을 피사노 영지로 급파했다.
별생각 없이 국경으로 보낸 서자였지만 이제 체자레는 레오 3세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 * *
- 으드득!
높은 천고에 태피스트리만 휑뎅그렁하게 처져 있는, 체자레의 취향에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고가구가 빼곡히 들어차있는 피사노 공작의 침실에 체자레의 이 가는 소리만 울렸다.
방법이 없었다. 죽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 똑똑.
“누구야!”
체자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공작 각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
“수도에서 오신 여자분입니다.”
체자레는 인상을 한층 더 찡그렸다.
그는 난봉꾼 생활을 대충 청산한 지 오래였다.
뭐 갑자기 수도승처럼 변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의 기준으로 스토커처럼 매달릴 여자가 있을 만한 짓거리는 최근에는 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바네데토 자작 영애? 거의 1년 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다. 스킨십도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국경 도시까지 쫓아와서 만나자고 하는 건 미친 사람이지.
라구사 부인? 아, 그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친 짓을 하려면 진작에 했지 왜 반년 가까이 지난 이제 와서?
“안 만난다고 해.”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안 보면 장땡이지.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술도 안 마셨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백포도주, 아니다. 오늘은 독주가 당기는 느낌이다.
그래. 그라파라도 병째 비울 수 있었지만 일말의 책임감이 체자레를 멈춰 세웠다.
“저기⋯⋯. 공작 각하.”
“아, 왜!”
“여자분께서 만나 주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손님이 전해달라고 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전달할 배짱이 없던 시종은 순화한 단어들로 전달했다.
체자레는 몸서리를 쳤다. 스토커가 염치도 없어?!
“아! 도대체 그 미친 X이 누군데!”
“데 마레 추기경 가의 여식이신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이시라고 합니다.”
“!”
체자레는 거대한 침대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