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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4화 (204/733)

<제204화> 특별한 사람

체자레는 15분 안에 피사노 성의 응접실에 나타났다.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단장한다고 했지만 아리아드네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의 데뷔탕트 아가씨가 예까진 웬일이야?”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가락빗으로나마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저번에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쫓아내더니만.”

아리아드네는 미미한 웃음을 흘리며 맞받아쳤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서 그만.”

체자레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게 여유가 있을 때 아리아드네는 더할 나위 없는 대련 상대였다.

그녀가 툭툭 한마디씩 던지는 재기발랄한 말들은 영혼을 타오르게 했다.

그가 만나보지 않은 사교계의 영애라고는 없었지만 이런 여자를 또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만나기에는 최악의 상대였다.

찌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아플 때가 있었다. 그는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도는 거야.”

지금의 체자레에겐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저 얼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체자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항상 상황이 나쁘게 흘러갔다. 가슴 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비이성적인 분노, 비논리적인 생떼. 뭘 해도 전부 다 그녀의 잘못이 되었던 과거. 그녀는 새삼 전생이 그녀를 쫓아오는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문득 내려다본 그녀의 시야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오른손 끝의 빛무리가 있었다.

“⋯⋯.”

‘내가 체자레를 돕기를, 아니, 가에타 영지를 지키고 갈리코 군대를 내쫓기를 원하는 거지?’

빛무리는 마치 알아들었다는 양 열광적으로 점멸을 거듭했다.

그래. 그것인가보다. 날 회귀시킨 힘. 모든 것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도록 두 번째 기회를 준 자. 이것이 나의 소명인가보다.

아리아드네가 말없이 상념에 잠겨 있자, 불안한 체자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소문이 도대체 뭐라고 났길래?”

그녀는 퍼뜩 현실로 되돌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을 텐데.’

사람이 갱생했다기보다는 아직 내가 어려워서 그런 거겠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김질하며.

“그냥. 갈리코 군이 국경지대에서 철수하지 않는다고요.”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자극하지 않을 말로 대충 둘러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오늘 여기에 남녀관계로 온 것이 아니다. 일 이야기로 왔다. 깔끔하게, 일만 하고 돌아가면 된다.

“아직도 곡물을 찾고 있나요?”

“하,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그는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곡물이 있으면 뭘 해. 그걸 급료로 받아갈 병사가 없는데.”

“난세에 식량과 금화가 있으면 병사도 자연히 따라 모이기 마련입니다.”

대충 한마디 위로를 던져 주었지만, 별로 위로가 되진 않은 모양이다. 달래는 것은 그녀의 취미가 아니었다.

몇 마디 더 건네 보았지만 여전히 체자레의 반응이 불퉁하길래, 그녀는 옷자락을 그러쥐어 모았다.

“필요 없으시면 저 이만 갈게요.”

“⋯⋯아니, 잠깐만.”

역시나, 체자레는 대번에 그녀를 잡았다. 다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딱, 과부하에 걸렸을 때의 체자레였다.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새 둥지 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에요?”

체자레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물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분 나쁜 종류의 놀람이 아니라, 의외의 곳에서 위로를 찾은 어린아이 같은 기쁨이었다.

“⋯⋯아가씨가 웬일이야? 다정하게 굴 줄도 알고.”

아리아드네는 웃음기 하나도 없이 답했다.

“곡식 좀 팔려고요.”

고객님은 돌봐 드려야지.

하지만 체자레는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크게 기꺼워하며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미칠 것 같아.”

피사노 영지에서 고립된 상태로 보낸 며칠간은 체자레를 좀먹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기 속내를 아리아드네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터무니없는 병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 고민이라는 거네요.”

“그렇지!”

“애초에 목표설정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병력으로 갈리코 중장기사단을 쫓아내라는 머저리 같은 생각이 공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

아리아드네의 말이 맞았다. 체자레는 물빛 눈을 끔뻑거리며 자기가 이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을 찾았다.

“⋯⋯어머니네.”

수도에 잘 숨어 있던 체자레를 피사노 영지에 보낸 것도, 피사노 공작이 국경 수비를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수도 전체에 떠벌린 것도, 총사령관 운운하며 피사노 영지 방위뿐만이 아니라 국경지대 전체의 책임이 네게 있다는 어투로 몰아붙인 것도, 이제 하다못해 전국에서 징병된 귀족의 사병을 모두 체자레에게 보내서 책임을 그에게 몰아버린 것도 모두 루비나 공작 부인의 짓이었다.

“그 병력은 사실 원래 가에타로 가는 게 맞았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코의 중장기사단은 가에타 영지에서 가에타 성을 위협하는 중이다.

피사노 영지는 그 접경지대에 불과했다. 여기로 병력을 모두 보낸 것은 루비나 공작 부인의 욕심이었다.

“이제 와서 사병을 안 받겠다고 하고 가에타로 모조리 보내 버릴 수도 없고, 결국엔 내가 뭔가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아리아드네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어머니가 설정한 책임과 의무를 왜 본인이 모두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그야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말을 잃은 체자레에게 아리아드네의 다음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만족할 때 본인은 행복해요?”

“⋯⋯아주 잠깐은.”

“그 행복이 오래가지는 않는군요.”

“완수해 보았자 바로 다음 미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본인은 어떨 때 행복한데요?”

체자레는 답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떠오른 대답이 너무나⋯⋯. 비루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받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을 듬뿍 쏟아 부어줄 때.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환희에 찬 표정이 그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당황해서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한 깨달음이 몰려 들어왔다.

‘내가⋯⋯. 그래서 그랬나?’

그간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준 사람은 그가 미친 듯이 만나고 다녔던 하루살이 여인들밖에 없었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왕의 사생아 체자레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준 사람은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체자레에게 무언가를 바랬다. 어머니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무안한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소년에서 청년이 되며 외모가 더 수려해지면 수려해질수록 체자레의 허기는 심해져만 갔다.

저 여자도 혹시, 데 코모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것 아닐까? 이 여자는 내 얼굴에만 빠져서, 내가 살이 찌고 나이가 들면 언제 사랑했냐는 듯이 날 외면하는 것 아닐까?

“⋯⋯.”

‘사랑받을 때 나는 행복해.’

너무나도 간단한 한마디 대답이었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기회라며 엉겨서 ‘그러니까 날 행복하게 하려면 아가씨가 나한테 사랑을 좀 줘 봐’, 좀 더 나아가자면 ‘사랑한다면 입술 정도 줘도 되는 것 아닌가?’ 정도로는 들이대 보았을 것이다.

여자에게 들이댈 최적의 상황 아닌가. 약한 척, 동정심과 모성애를 자극하는 치대기. 항상 먹히는 필살기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한다는 것이, 그것도 아리아드네 앞에서 한다는 것이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정말로 진심이어서 그랬을 터이다. 사랑받고 싶다는 벌거벗은 진심.

“⋯⋯.”

체자레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지만 저 맹수 같은 여자는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건네받은 체자레는 그만 그 순간에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들켰다는 수치심과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까.

“으⋯⋯!”

다 큰 사내가 여자 앞에서 질질 짜다니. 수도의 난봉꾼인 체자레 공작에게 어울리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바깥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멈추지 않는 눈물에 손수건을 썼고, 첫 번째 손수건이 흥건하게 다 젖자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두 번째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두 번째 손수건까지 다 쓰고 나서야 간신히 눈물이 멈췄다.

그는 코를 쓸며 자기 손에 있는 손수건을 살펴보았다.

- Ari. d. Mare

처음 준 손수건은 아무런 자수가 놓여 있지 않은 무지 손수건이었지만, 여벌로 가지고 다니던 게 하나밖에 없었나보다.

두 번째 손수건은 아가씨들이 몸에 가깝게 지니고 다니는, 자수가 놓인 개인 손수건이었다.

체자레는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훌쩍이며 농담을 던졌다. 아무 말이나 해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야,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영광인데?”

이니셜이 쓰인 손수건은 정인에 대한 증표로 주는 경우가 많았다.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도로 내놔요.”

기분이 슬슬 정말로 좋아지고 있었다.

“싫어, 한번 준 건 내 거야.”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어 손수건을 뺏으려고 시도했지만, 체자레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서 아리아드네의 손을 피했다.

그들은 잠시 실갱이를 했고 결국엔 체자레가 한 손으로 아리아드네의 두 손목을 모두 잡아 저지하는 사이에 왼손으로 손수건을 자기의 바지춤에 집어넣는 데에 성공했다.

“자, 이래도 가져갈 거야?”

“⋯⋯.”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붉힌 채 체자레의 다리 사이를 째려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도 했고 화가 난 듯도 했다. 체자레는 이 상황이 몹시 유쾌해서 뭔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빨아서 돌려보내요.”

돌아오면 태워 버릴 테다.

“아가씨 하는 것 봐서!”

체자레는 히죽 웃으면서 아리아드네를 놀렸다.

상대가 기운을 차린 것 같자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쉬며 체자레를 재촉했다.

“우리, 일 얘기나 하죠.”

“일? 무슨 일?”

“사병 1500명 데리고 그냥 갈리코 군대 16000명한테 들이닥칠 거에요?”

“⋯⋯아.”

체자레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병 1500명 밥은 무슨 곡식으로 먹일 건가요? 곳간에 여유 있어요?”

없었다. 들판에는 추수가 안 된 밀이 가득한데 성안에서는 쥐조차도 굶기 시작한 게 피사노 영지의 현 상황이었다.

“귓구멍 열고 들어요.”

아리아드네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체자레 공작을 응접실 책상 앞에 앉혀놓고 펜과 양피지를 잡았다.

체자레가 여자, 그것도 자기보다 어린 여자에게 군사나 행정에 대한 훈수를 듣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물론이요, 그가 모르는 저번 생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섭정공비 대행이었던 약혼녀 아리아드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약혼자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그는 자기 여자가 주제넘게 훈수를 둔다고 생각했다.

나를 사랑해주기만 하면 되는 대상이 도대체 왜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건가. 내가 모자라서, 자기에게 흡족한 쪽으로 바꾸기 위해 저러는 것이 틀림없다.

나를 나인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몰랐지만 거기에는 어머니인 루비나 백작 부인에 대한 증오가 투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 아리아드네의 말이 맞을 때도 자기 방식을 고수했고, ‘거봐라, 내가 뭐랬냐’ 같은 말이 나올까 봐 미리부터 모든 제안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급기야는 그녀가 정책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순순하게 아리아드네의 손끝을 응시했다.

“예. 활짝 열고 있습니다, 마님.”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의 넉살에 그를 조금 흘겨보았다.

째려보는 눈초리조차도 아름다워 보였다. 체자레는 웃으며 그녀를 다시 마주 보았다.

원래도 가지고 싶은 여자였다. 수도에서 가장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자체가 특별했는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녀보다 재기발랄한 여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목표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해하게 가슴이 울렸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녀가 그에게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체자레 공작의 인생에서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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