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희망
그녀가 체자레에게 알려준 방법은 간단했다. 절대로 정면승부를 피할 것.
갈리코 중장기사단과 일대일로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
대신 취할 방책은 간단했다. 주변의 농민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논밭을 전소시켜 식량을 말려버릴 것.
병력은 후방으로 돌려 갈리코 본국에서 오는 식량 지원을 막을 것.
“⋯⋯정론이다.”
체자레는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아가씨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아?’라던가, ‘내가 이 생각을 왜 못했지?’ 같은 못난 멘트는 그의 입을 떠나지도 않았다.
아리아드네의 자격에 대한 검증을 마음속에서 모두 마쳐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논리로 한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 하고 넘어갔다.
그는 반해버린 표정으로 아리아드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높은 콧날 아래 아직 젖살이 덜 빠져 통통한 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시선에 들어왔다.
지금 체자레의 눈에는 입을 약간 벌릴 때마다 보이는 토끼 이빨마저 전부 다 천재성의 증빙으로 보였다.
“알겠죠? 말려 죽이는 게 목표지, 무찌르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어떻게든 겨울까지만 버티면 돼요.”
귀여운 토끼 이빨이 오물대며 말했다. 귀엽기 짝이 없게 말하는 것치곤 내용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버리고 집중했다.
올해 남부는 역병으로 농사를 망쳤고, 북부는 갈리코 군대 때문에 수확이 불가능하다.
이제 밀밭에 불까지 지를 예정이니 추수는 글렀다. 결국 그녀가 들고 있는 곡식이 에트루스칸 국경 안에 있는 유일한 식량이 될 것이다.
“아가씨는 대부호가 되겠군.”
“뭐, 유일한 방도의 어쩔 수 없는 부산물이죠.”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체자레는 생각했다. 뻔뻔하기는. 내 짝으로 딱 맞아.
“이 대부호께서는 피사노 공께 밀 1만 5천 칸타로를 팔겠어요. 가격은 1만 5천 두카토.”
이 대목까지 와서는 체자레도 아리아드네를 귀엽게만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잠깐만. 1 칸타로(약 300kg) 당 1 두카토를 받겠다고?”
평시의 곡물 가격은 그 십 분의 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열 배가량의 폭리다. 체자레가 최초에 제시한 가격에 비교하더라도 두 배 반이 넘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이 나라 안에 대규모로 곡물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팔아주는 거에 감사하세요.”
해외에서 수입해 들여오려고 해도, 북부는 갈리코 군대가 틀어막고 있다. 남쪽은 바다다.
아세레토 공국에서 들여온다손 치더라도 배를 마련하고 준비하는 데에 한세월이다.
게다가 역병은 남쪽으로부터 창궐해 올라왔다. 해외로부터의 곡물 공급은 북으로도 남으로도 막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체자레가 고개를 저었다.
“아⋯⋯. 이 가격은 무리야. 아무리 내가 도장을 찍는다지만 가신들을 설득할 수가 없어.”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체자레가 괜한 소리를 해서 오쟁이 진 것이 아닌가 후회하고 있던 사이에, 그녀는 양피지를 당겨 그 위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그럼, 계약 조건을 정정해 드릴게요.”
후회하던 체자레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계약 조건을 종이에 적었다. 간단한 수학 수식이었다.
체자레는 종이를 들여다보는 대신 아리아드네에게 바로 물었다.
“깎아 주는 거야?”
“그럴 리가.”
차가운 건 여전하구먼.
아리아드네의 수식을 해석하자면 두 차례에 걸쳐서 판매하겠다는 내용이 되었다.
5천 칸타로까지는 2500 두카토에 팔아준다. 5천 칸타로만 구매하고 더는 안 사도 된다.
하지만 나머지 1만 칸타로를 마저 구매하고 싶다면 밀린 대금까지 모조리 정산해서 12500 두카토에 사갈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일종의 예약권이죠. 행사 안 하셔도 괜찮아요.”
“즉, 전쟁이 일찍 끝나거나 곡물가가 떨어지면⋯⋯.”
“체자레 공께서는 5천 칸타로만 2500 두카토에 사신 게 되는 거죠.”
“반대로 전쟁이 길어지거나 곡물가가 올라가면⋯⋯.”
“나머지 1만 칸타로도 필요하시겠죠?”
체자레로서는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괜찮은데? 내가 5천 칸타로만 사가면, 아가씨는 반값에 할인한 셈이 되는데 괜찮겠어?”
“그러게요.”
아리아드네는 여상스럽게 자신의 손톱 끝을 살폈다. 네모나게 다듬은 모양이 썩 마음에 들었다.
“체자레 공께서 나머지 1만 칸타로까지 모두 필요하신 상황이 올 때는 1만 2500 두카토는 정말로 헐값이 될 텐데, 벌써부터 가격을 고정시켜 놓다니 정말로 제가 손해 보는 장사네요.”
해 보는 말이었다.
시세보다 월등히 싸게 구매할 수 있는 2차 구매 예약권은 체자레가 레오 3세를 움직여 아리아드네의 곡식을 강제로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이 내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른 함의에 천착했다. 물론 충분히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아가씨는 내가 1만 5천 칸타로가 모두 필요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네.”
미래를 아는 여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거보다 더 사가실 겁니다.”
그리고 알뜰하게 덧붙였다.
“3차 분량은 저거보다 비쌀 테니 마음의 준비 하고 계세요.”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체자레는 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햐, 똘똘하고 예쁜데 야무지기까지.’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도 미래의 피사노 공작 부인감이었다. 영지의 미래가 든든해 보였다.
* * *
체자레에게 국경지대에서의 전술을 일러주고 곡식 2500 두카토 어치의 현금화까지 성공한 아리아드네는 말을 재촉해 서둘러 산 카를로로 돌아왔다.
저 전술은 아리아드네가 직접 고안한 것이 아니었다.
저번 생의 에트루스칸 왕국이 갈리코의 군대를 가장 성공적으로 막아냈었던 전술이었다.
가에타 영지가 바로 항복해버려서 오래 쓰지는 못했지만 식량 사정이 나빠지는 겨울까지만 버틸 수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잘 돼야 할 텐데.”
이번 생의 가에타는 쉽사리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사노 영지가 옆에서 요격을 하며 지원사격을 할 것이고, 겨울이 오면 갈리코 군대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겨울철 보급은 누구에게나 골치 아픈 문제이고, 눈 덮인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와야 하는 갈리코 군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체자레에게 1차로 보낼 5천 칸타로의 밀도 준비해야 했다. 수도로의 빠른 귀환은 필수불가결했다.
하지만 수도로 돌아온 아리아드네는 찝찝한 산차의 반응과 마주했다.
“아가씨⋯⋯. 기왕 올라가신 거, 북부에 조금 더 계시다 오실 걸 그랬어요.”
산차의 걱정은 당연했다. 아리아드네가 단 이틀간 자리를 비운 사이, 산 카를로의 흑사병 환자 수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터졌어?”
“어디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간은 코뮨 누오바와 캄포 데 스페지아 지구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방위적으로 폭발하고 있습니다.”
코뮨 누오바는 저소득층 밀집 지역, 캄포 데 스페지아는 외국인 밀집 지역이다.
“보카 델라 지아노의 대저택에서도 단체로 감염병이 터지고 외곽의 수도원에서도 발병했어요.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어요.”
보카 델라 지아노라면 데 마레 대저택이 위치한 고급 주택가였다.
수도원이면 데 마레 추기경과 접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찡그렸다.
“수사님들이 손발과 사타구니가 시커멓게 부어오르는데 이쯤 되니 ‘흑사병은 나태한 자와 이교도에게 내리는 천벌이다’ 소리도 쏙 들어갔어요.”
“좀 더 기다려 봐. 알고 보면 수사들이 타락한 거라고 할 테니.”
공포에 질린 대중은 자신의 믿음 체계를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든다. 위안을 주는 유일한 구석이기 때문이다. 그저 거스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털어 상념을 지웠다.
“난 랑부예 구휼원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네? 이 시국에요?”
산차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글쎄, 요새는 구휼원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을 수도 있어.”
“⋯⋯하긴, 그래요.”
산 카를로의 골목은 아비규환이었다.
모든 상업은 멈췄다. 가게들은 일제히 문을 닫았고 외부에서 들어와야 할 물자도 이동하지 않았다.
경제가 멈춘 자리에 일자리는 없었다. 저축이 없는 자들은 일거에 비렁뱅이로 전락했다.
골목은 구걸하는 사람,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건장한 남성들은 구걸 경력이 길어 좋은 자리를 선점했던 어린아이들을 힘으로 내쫓고 자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쓰레기를 먹고 배탈이 난 건지, 역병이 옮은 건지 구분이 안 되게 배가 부풀어 올라 죽은 시체들이 구석의 골목부터 차지하기 시작했다.
“요새는 사람들이 되려 랑부예 구휼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랍니다.”
“구휼원 안은 병도 퍼지지 않고, 끼니마다 먹을 게 나오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랑부예 구휼원은 문을 걸어 잠그고 신규 인원을 받지 않은 지 오래였다.
보통 수도근위대가 돌아다니며 길거리 부랑자들을 잡아다가 랑부예 구휼원에 던져 넣었는데 흑사병이 수도까지 상륙한 이후로 레오 3세가 군대가 주둔지를 벗어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님이 못 하시면 나라도 해야지. 구휼원 안의 인원을 써야겠다. 준비해.”
“⋯⋯예, 아가씨.”
본격적인 산 카를로 구원의 시작이었다.
* * *
“⋯⋯여기 사람들을 간호원으로 쓰시겠다고요?”
알바니 사무처장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귀족님네들에게는 반문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잊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산 카를로 전역에서 안전한 곳은 역설적으로 랑부예 구휼원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미 한 차례 흑사병을 다뤄본 사람이 모여 있기도 하고요.”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못 배운 사람들인데⋯⋯. 쓸만하게 만드시기 쉽지 않을 겁니다.”
구휼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게으르고 나태해서 끌려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천신님의 가르침 하에 근면 성실을 미덕으로 치는 예삽교 교리 아래에서는 낙제점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알바니 사무처장의 상식으로는 이들을 교화해서 일을, 그것도 고등한 일을 하게 시킨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웃었다.
“모든 병을 다 진료하자는 것이 아니라 흑사병 대응만 하는 거니까요. 일주일 안에 의사를 양성하자는 게 아닙니다.”
“하⋯⋯.”
알바니 사무처장의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극적인 반대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법률상 근거도 없이 식량과 월급을 내주시는 복지가님이 어디 흔한가.
그는 이내 아리아드네의 부탁대로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 사이의 사람들을 모아왔다.
남녀가 섞여 있었고, 몇 되지는 않지만 글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자, 여러분!”
산차가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여러분께서는 이제부터 흑사병 환자들을 보살피고, 격리하고, 환자들에게서 나온 오물이며 쓰레기를 처리하는 법을 배우실 겁니다!”
산 카를로에서 해당 방법을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산차였다. 가히 베테랑이라고 할 만 했다.
“흑사병 환자를 만나야 하는 일입니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위험한 것 아니냐, 안에 있으면 밥은 주는데 누가 굳이 나가겠느냐 하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다만, 일을 하시는 동안 일주일에 3 플로린의 급료를 받으실 것이고, 랑부예 구휼원 외부에 나가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에 3 플로린?
산 카를로의 저소득층에게 아주 좋은 일자리로 여겨지는 귀족가 대저택의 초급 하녀는1년에 15 플로린 남짓을 받는다.
한 달에 12 플로린에서 15 플로린이라니, 사회초년생의 일년 치 봉급을 한 달에 벌 수 있다는 소리였다.
방 안에 모인 40명 남짓의 사람들은 대번에 조용해졌다.
산차의 뒤에 서 있던 아리아드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쐐기를 박았다.
“저는 흑사병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면 조건이 맞는 분들께서 외부에 재정착하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업무 기간 중 근무 평가가 좋으셨던 분, 그리고 그간 모으신 저축액을 기준으로 판단할 예정입니다.”
랑부예 구휼원에 한 번 들어오면 나갈 기약이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외부에 재정착을 시켜준다니!
- “뭐부터 배우면 되나요?!”
- “근데⋯⋯. 우리가 할 수 있어?”
- “몰라, 적당히 배우다가 안 되면 돈이나 받고 시간이나 때우면 되지. 손해는 아니니까 일단 손들어!”
- “저도 할게요!”
- “합니다!”
- “하겠습니다!”
지병이 있거나 어린 자식이 딸려 있어 도저히 환자 곁에 갈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나자 서른 명 남짓의 인원이 남았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알바니 사무처장이 걱정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기세는 좋지만⋯⋯. 얼마나들 버틸까요. 구휼원 수용자들은 천성이 게으르고 손이 야무지지 못합니다. 제대로 배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는 수용자들을 쓱 훑어보며 덧붙였다.
“밖에 나가도 결국에는 티가 납니다.”
듣고 있던 산차의 얼굴이 벌게졌다. 산차는 랑부예 구휼원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바니 사무처장을 쏘아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눈짓했다.
‘말해도 돼?’
산차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는 사무처장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그를 제지했다.
“알바니 사무처장님.”
“예?”
“여기 산차도 랑부예 구휼원 출신입니다.”
“⋯⋯예?”
이번에는 알바니 사무처장이 당황할 차례였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양어깨에 두 손을 얹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 산차는 제 오른팔이고,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사용인입니다. 사물을 보는 눈이 넓고, 대응이 빨라요. 야무지고 꼼꼼한 건 기본이고요.”
흑사병 간호할 인력을 뽑아다 달랬더니 아픈 사람과 갓난쟁이가 딸린 애엄마까지 데려온 당신보다는 일도 잘해, 라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출신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 아니 그게⋯⋯. 어디나 뛰어난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사과하면 될 걸, 알바니 사무처장은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그런 알바니 사무처장이 얄미웠는지, 산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까랑까랑한 어린 목소리에 사람들이 산차를 모두 바라보았다.
“교육 과정은 하루 동안 준비해서 내일 이 시간에 소회랑에서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목소리를 골랐다.
“저도 랑부예 구휼원 출신입니다!”
조금 다른 느낌의 웅성거림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졌다.
하늘같이 높아 보이던 데 마레 추기경 가의 하녀장이 자기네와 같은 출신이라니. 얕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기색이 좀 더 컸다.
“구휼원 생활은 끝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질 수도, 내년이 오는 게 기다려지는 날도 분명히 옵니다!”
산차는 그 뒤에 자기도 도와줬고 사람들도 도와줄 예정인 아리아드네의 찬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들어찬 것은 좋은 옷을 입고, 깨끗한 외양을 하고, 구휼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알바니 사무처장 앞에서도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하는 산차의 모습이었다.
“열심히 하십시다, 우리! 같이 나가요!”
나간다. 구휼원 밖으로.
이상한 고양감, 기이한 흥분이 사람들을 잠식했다.
역병의 먹구름이 뒤덮은 산 카를로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랑부예 구휼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