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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6화 (206/733)

<제206화> 거침없는 진행

아리아드네가 새로이 조직한 랑부예 구휼원의 간호 군단은 놀라울 정도로 잘 돌아갔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생각보다 몹시 빨리 배웠고, 무엇보다 의욕이 넘쳤다.

그녀가 랑부예 구휼원의 인원을 최초로 투입한 곳은 흑사병이 터진 외곽의 수도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입김이 닿는 곳이라 파견하기 쉬웠고, 데 마레 추기경의 입지를 보전하려면 빠르게 정리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주변 주거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어 첫 일터로 적합했다. 그리고 투입은 대성공이었다.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는데.”

“에헴! 누가 가르쳤는데요!”

구휼원의 아이돌이 된 산차가 반 농담으로 으스댔다.

“그런데 진짜 뿌듯하기는 해요.”

산차는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저조차도 큰 기대를 하진 않고 있었거든요. 교육 기간도 짧고⋯⋯. 그랬잖아요.”

말은 에둘러 했지만 랑부예 구휼원 내부의 패배주의는 사실 산차가 제일 익숙했다.

우리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열패감, 노력해도 바뀌는 것은 없을 거라는 절망.

산차가 구휼원 사람들 앞에서는 희망찬 척을 했지만, 이번에도 무기력이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은 진짜 제법 잘 따라와요. 우리 가문 인원들보다도 나을 정도예요. 눈에 띄는 애들이 있어요.”

산차는 이미 본인만의 이너 서클을 만든 모양이었다.

“그래? 누가 그렇게 일을 잘하던?”

“음, 그레타라고 열네 살 짜리 친구도 하나 있고요. 몬테라고 열세 살 먹은 남자애도 있어요. 둘 다 손이 빠르고 의욕이 넘쳐요.”

아리아드네는 그 이름들을 귀 기울여 들었다.

괜찮은 아이라면 랑부예 구휼원 밖에 재정착을 도와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데 마레 가문으로 데려와서 자기 사람으로 크게 키워 쓸 생각이 있었다.

“잘 보아 두렴. 네 경쟁자가 될지 누가 아니.”

“네에에?!”

산차가 눈이 똥그래져서 항의했다.

“아가씨께는 저밖에 없는 것 아니셨어요? 우리 정이 고작 여기까지였나요?”

“일 잘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 이기는 편 우리 편.”

아리아드네가 배시시 웃으며 산차를 놀렸다.

“아가씨!”

농담임에도 불구하고 산차가 긴장할 법도 한 것이, 랑부예 구휼원 출신 간호 부대는 정말로 일을 잘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산 카를로에서 랑부예 구휼원의 백의의 천사들에 대해 입소문이 돌기 시작할 정도였다.

급기야는 콧대 높은 대저택에서도 지원 요청이 왔다.

“⋯⋯아가씨. 살바티 후작가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응. 나도 받았어.”

살바티 후작은 랑부예 구휼원의 알바니 사무처장에게 파견 요청을 보낸 것과 동시에, 아내인 후작 부인을 통해 아리아드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따로 보냈다.

살바티 후작가가 랑부예 구휼원의 지원을 요청할 정도면, 이들의 입지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음 투입지는 살바티 후작가로 정하며,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물었다.

“내가 이 뒤에 있다는 게 소문이 많이 났나 봐?”

“소문 정도예요? 길거리에선 요새 아가씨 얘기밖에 안 합니다!”

산차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제일 유명하셨던 적이 언제였죠? 그,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 때?”

알폰소와 체자레 사이에서 스캔들이 났을 때가 좀 더 유명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마?”

“조만간 그거 넘어설 거 같아요. 사람들이 아가씨 보고 뭐라는 줄 아세요?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랍니다.”

“으응⋯⋯.”

딱히 랑부예 구휼원이 내 것은 아닌데. ‘성녀’도 이상했다.

아리아드네는 자기가 착하거나 성스럽거나 신실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칭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냐. 남들이 붙여주는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정하겠어.”

“포기가 빠르시네요.”

“성모(聖母) 아닌 게 어디야.”

산차는 아리아드네의 낮은 기대수준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아. 그건 좀.”

* * *

아리아드네의 명성이 산 카를로에서 차원이 다르게 높아지는 가운데, 체자레가 버티고 선 피사노 영지도 훌륭하게 분전 중이었다.

“저번 주에 밀밭을 깡그리 불태운 이후 갈리코 놈들이 점점 더 먼 지역까지 들쑤시러 옵니다.”

“갈리코 놈들이 작은 유닛으로 잔뜩 흩어져서 뻔질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각하.”

“⋯⋯좋아.”

아리아드네의 방문 이후, 체자레는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규모 타격부대를 만들었다.

북부지방에서 갹출해 온 타 영지의 사병 1500명에, 새 피사노 공작이 급료를 곡물로 지급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시 알음알음 부대로 복귀한 1000여 명의 영지민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양성한 부대들이었다.

병종은 주로 창병. 그나마 가장 빠르게 실전투입이 가능할 정도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고른 병종이었다.

창병의 의의는 또 있었다. 창병은 석궁병을 제외하면 중장기병에 카운터를 먹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병종이었다.

이 시대의 중장기병은 걸어 다니는 전략무기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쿠르트네 4세가 중기병 600기를 이끌고 돌격해 무어 제국의 경보병 2만 6천 명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였다.

곧이곧대로 듣기는 힘든 이야기였지만, 저 이야기가 터무니없다고 배척당하지 않고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중기병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였다.

“말리나도 마을을 소거시키고 불을 질러. 그 앞에 구덩이를 파고 함정을 만든 다음 밀 포대를 쌓아놓는다.”

체자레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지시했다.

“창병은⋯⋯. 주변 수풀 속에 숨어 있도록 하고 소수의 몰이꾼만 보내서 갈리코 놈들을 유인한다.”

“알겠습니다!”

정면으로 이길 수 없으니,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에트루스칸 군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 꼬챙이가 가득 꽂혀 있었다.

잔당이라고 착각한 에트루스칸 몰이꾼을 쫓다가 그 안에 한 번 빠지고 나면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고, 그때 창병이 나타나서 허공에서 장창을 내리꽂는다.

이것이 심기일전한 피사노 공작이 준비한 작전이었다.

북부 영지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보내준 경기병은 갈리코 중장기병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의 상급마는 상대방의 상급마와 대결을 붙이지 않는다. 내 말의 품질이 떨어질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이 또한 미래의 피사노 공작 부인이 일러주고 간 비책이었다.

경기병은 대신 척후조로 후방을 돌다가 북방에서 내려오는 갈리코의 식량 보급을 탈취할 예정이었다.

“얼마나 먹힐지 두고 보자고.”

체자레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잘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 *

- 쾅!

“이게 말이나 되나!”

필리프 4세는 분노에 차서 주석 컵을 대리석 탁자에 내리쳤다.

“지금 나더러, 갈리코 군의 최정예 3개 사단, 총 1만 6천여 명을 보내놨는데, 에트루스칸 깡촌 마을에서 내 군대가 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순순히 들으라고?!”

중장기병대에서 보내온 전령은 몸을 깊숙이 굽히는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필리프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가 양피지를 구깃구깃 접어 공처럼 뭉쳤다.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오귀스트 공주마저 제 오라비를 말리지 못하고 겁먹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세 번은 족히 읽은 양피지의 내용을 되새김질했다.

에트루스칸 군이 식량 조달을 막고 간헐적으로 습격하고 있으며, 지리에 밝은 점을 이용해 함정을 파서 갈리코 군대를 유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본국에서 보낸 식량 지원도 연거푸 탈취당하는 중이었다.

이미 중기병 300여 기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다. 손해가 막심했다.

“왕의 서자라더니 꼭 제 천한 출생다운 짓거리만 하는구나!”

하지만 비겁하게 뒤에서 치는 신사적이지 못한 전략을 성토해보았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필리프는 으득, 이를 악물었다.

“오냐, 제깟 것들이 그렇게 나온다고 치자. 내 방도가 없을 것 같으냐?”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시종을 불렀다.

“여봐라!”

“예, 폐하!”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장에게 전하라. 국경에서 시시한 광대놀음에 장단 맞춰주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어 에트루스칸 내부로 진격하라!”

그 함의를 알아들은 신하들이 숨을 들이쉬었다. 삽시간에 대전(大殿)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전면전.

국경 지대를 지나 본토로 진격한다면 이는 두 왕국 사이의 전면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감히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오귀스트 공주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필리프 4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웠다.

“오라버니.”

필리프는 추어올린 눈초리로 오귀스트를 바라보았다.

“지금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흑사병이 창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륙으로 진격하다가 혹시 우리 군대에 몹쓸 병이라도 옮을까 봐 우려가 조금 됩니다.”

선전포고를 해야 국제예양에 맞지 않냐는 등의 민감한 이야기를 모두 떼고, 가장 온건한 반대를 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필리프의 얼굴 근육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오귀스트를 포함한 대전 안의 신하들 전원은 공포로 고개를 조아렸다.

터질까? 터지지 않을까?

다행히 국왕은 푸들푸들 떨더니, 평정을 찾고 고함이 아닌 평이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것은 기사단장이 재량껏 주의하라.”

내 맘대로 할 테니 흑사병은 부하가 요령껏 피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갈리코 왕국 안에 필리프의 이야기에 이 이상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명!”

* * *

그리고 필리프 4세의 결정은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이, 이, 고얀⋯⋯!”

보고를 들은 레오 3세는 부들부들 떨다가 옥좌에서 떨어질 뻔했다.

“감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필리프 새끼가 어찌 감히⋯⋯!”

갈리코 왕국의 중장기병대가 남하하고 있다. 레오 3세는 옛 처조카의 배은망덕함에 치를 떨었다.

처조카에게 딱히 해준 것은 없었지만 항렬 상 아래인 새파란 놈은 자신을 공경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그런데 감히!

“당장 트레베로로 사절을 급파하라!”

트레베로는 성황청 본단이 있는 곳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에게 호소할 작정이었다.

“누구를 사절로 삼으시겠습니까.”

평소 같았다면 외교를 담당하는 마르케즈 백작이 갔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그는 전시 대응으로 정신없이 바빠 빼낼 수가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과의 친분으로 고려해볼 만한 발데사르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하⋯⋯. 사람이 없구나. 리날디 백작을 임명하겠노라.”

“예, 폐하!”

국왕의 비서관인 델피아노사 경은 대답은 찰떡같이 했지만, 과연 리날디 백작을 파견한다고 해서 루도비코 법황이 에트루스칸의 편을 들어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쨌거나, 갈리코의 필리프는 법황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십자군 전쟁의 ‘쩐주’고, 에트루스칸의 레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라! 영주들에게 영지의 규모별로 공작가는 1만 명, 후작가는 5천 명, 백작가는 3천 명의 사병을 수도로 보내라고 일러라!”

이것 역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파발을 보내겠나이다.”

군사가 올라올 거라고 약속할 순 없지만, 파발을 보내는 것까지는 약속할 수 있다. 델피아노사 경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 *

그리고 레오 3세의 일련의 행동들은 나비효과처럼 국경의 체자레에게 돌아왔다.

“뭐라고?”

“⋯⋯군사들을 어디에 묵게 할까요?”

“아니, 그 전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아?”

“국왕 폐하의 친서입니다.”

체자레는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구두로 보고받는 것을 선호했지만 귀로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을 때는 눈으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더러⋯⋯.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갈리코 기사단을 막으라고?”

루비나가 그토록 소원했던 ‘에트루스칸 왕국 총사령관’ 직이 체자레에게 수여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게 된 체자레 본인은 다 내동댕이치고 어디 한적한 바닷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1500명은 기존에 보내온 북부의 원군, 1000명은 피사노 영지의 사병, 그리고 새로이 수도에서 보내온 4500명의 군사입니다.”

레오 3세는 공작령 하나에서 5000명씩을 징집할 큰 꿈을 꿨지만 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전국 각지에서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300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나머지 1500명은 레오 3세가 보내온 수도근위대였다.

갈리코의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에트루스칸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되어있는 중장기병대이기도 했다.

“⋯⋯국왕 폐하께서 인심을 쓰셨어. 그 사실이 제일 나빠.”

근위기사단 1500기라면 레오 3세 입장에서는 수도 방위를 위한 머릿수를 빼고—좀 넉넉하게 빼긴 했지만—남는 가용자원을 모두 보낸 수준이었다.

이렇게 큰맘 먹고 체자레를 지원한 레오 3세는 반드시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고.”

문제는, 근위기사단 1500기가 아니라 15000기 정도는 있어야 갈리코의 정예병 16000명과 붙어볼 만하다는 사실이었다.

체자레는 속절없이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전령에게 물었다. 입 안쪽에서 피 맛이 났다.

“이것 외에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말씀이 있느냐.”

구성은 어떻게 하라던가, 전장은 어디쯤으로 잡으라던가. 체자레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전령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오서는 ‘필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아.”

전령은 까먹은 말이 있었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루비나 공작 부인님의 전언입니다.”

체자레 공은 벌써부터 아파 오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믿는다,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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