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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07화 (207/733)

<제207화>

갈리코 군의 남하

믿음은 아무것도 담보하지 못한다.

루비나 공작 부인의, 자기 아들의 무재(武才)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했다.

새로이 총사령관에 임명된 젊은 피사노 공작은 국왕이 새로 지원해 준 병력을 포함해, 총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쏴라―!!”

야음을 틈탄 기습이었다.

벌판에 쳐진 천막과 목책 사이로 불붙인 장궁이 장대비처럼 날아들었고, 적군은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전열을 취했다.

갈리코가 자랑하는 중장기사단은 공격에 특화된 유닛이었고, 방어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자 그 장점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체자레 공작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각하! 우리 군의 좌익이 괴멸하였습니다.”

야심차게 밀어 넣은 에트루스칸 군의 좌익은 각지에서 갹출해 낸 경기병이었다.

몸이 가벼워 난전 속에서 재빠른 대응이 가능할 거로 생각하고 선봉으로 보냈지만, 그만큼 약했다.

그리고 갈리코의 보병대는 에트루스칸 군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단련된 정병(精兵)이었다.

그들은 천막을 엄폐물 삼아 왼쪽에서부터 짓쳐들어온 에트루스칸의 경기병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우익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2파로 짓쳐들어간 에트루스칸 군의 오른쪽 날개는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수도 근위기사단이었다.

쇄도하는 중장기병은 보병 따위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체자레의 재능 없음과 경험 없음이 패배에 일조했다.

우익과 좌익이 시간차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공세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만 우익의 투입 시간이 늦어져서 좌익이 궤멸한 다음에야 전장에 진입한 것이다.

“중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갈리코의 보병 6천 명은 순차적으로 에트루스칸 군의 좌익과 우익을 막아낸 후 중장기사단이 앞으로 나갈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열을 정비하고 모습을 나타낸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은, 갈리코 군의 숙영지를 반달 형으로 에워싸 처리할 속셈으로 대기 중이었던 에트루스칸의 보병 여단을 수수깡처럼 날려 버렸다.

“각하, 몸을 피하셔야⋯⋯.”

에트루스칸 왕국이 그러모은 마지막 군사가 체자레의 눈앞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마치 언제 존재는 했었냐는 양, 태양 아래 녹아내리는 눈꽃과도 같은 증발속도였다.

부관이 재차 재촉했다.

“각하! 지금 당장 몸을 빼셔야 합니다!”

총사령관이 사로잡힌다면 일이 더 커지게 된다.

체자레가 퇴각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부관이 대신 외쳤다.

“총사령관 각하를 호위하라!”

누구보다도 몸보신에 진심인 체자레가 차마 전장을 떠나지 못한 것은, 그도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에트루스칸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미래 입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길을 뚫어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부관이 체자레의 흑마 고삐를 잡아채다시피 하며 길을 재촉했다. 박차도 대신 차 줄 기세였다.

체자레는 어쩔 수 없이 부관이 뚫은 남쪽으로 향하는 넓고 곧은 길로 끌려가며, 몇 번이고 북부 평야의 전장을 뒤돌아보았다.

* * *

사보이야 평야 전투의 대패 소식은 산 카를로를 삽시간에 달궜다.

- “들었어요? 체자레 공작이 대패했대요!”

-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걱정 말아요, 수도근위대는 건재하니까. 설마 그 야만인 놈들이 산 카를로까지 쳐들어오겠어요?”

사정을 모르는 평민이나 하급 귀족은 상대적으로 믿음이 남아 있는 반면에, 알만한 사람들은 피사노 공작, 아니, 에트루스칸 총사령관의 패배 소식에 침중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마지막 병력이었겠군요.”

“남부에서는 더 이상의 동원령이 불가능합니다. 대역병 때문이지요.”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된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응접실에 앉아 따듯한 차로 입술을 축였다.

찻잎은 이제 수도에서 슬슬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호사였다. 흑사병 때문에 물자이동이 꽉 틀어막혔기 때문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랍니까?”

“⋯⋯글쎄요.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으시기는 한데요. 그게 저한테까지도 비밀로 해야 해서 별말씀이 없으신 건지, 아니면 방책이 없어서 할 말도 없는 건지는 아버지만 아시겠죠.”

후자지. 아리아드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라파엘은 반문했다.

“팔라지오 카를로의 유일한 희망은 루도비코 법황 성하이신 것 같던데요. 그쪽은 뭐 이야기라도 들어온 게 있습니까?”

이번에는 아리아드네가 똑같이 꿈도 희망도 없는 대답을 돌려줄 차례였다.

“아시잖아요, 국왕 폐하께서 성전에 후원하기를 거부하신 것. 뭔가 거한 제안이 함께 간 게 아니라면 루도비코 법황께서는 지금 에트루스칸 왕국 편을 들어 중재를 자청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라파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후원을 거부하셨죠.”

그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친한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토로였다.

“친아들한테. 너무하시지.”

그 이야기를 듣자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라파엘이 자신의 실언에 혀끝을 깨물고 있는 사이,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알폰소의 소식은 들어온 것이 있나요?”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갈리코 왕국으로 떠난 이후로 서신 한 통조차 받지 못했다.

왕자가 예사크로 도망친 이후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마음을 확인한 후로 거의 네다섯 달간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한 것이다.

라파엘은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얼굴이 떠오르지 않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로부터 연락받은 게 없다니, 솔직히 기뻤다.

“왕자님께서 예사크로 떠나신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왕자가 십자군을 따라 예사크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수도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돌고 있는 비밀이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는 미정이었다.

갈리코 군대가 남하하다가 수도까지 쳐들어오면, 갈리코 땅에 있는 왕위계승권자의 안위에 관해서 묻는 말들이 분명히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레오 3세는 함구령을 내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것까진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라파엘은 역설적으로, 아리아드네의 이 대답에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는 지금 추한 내면과 싸우고 있었다.

알폰소의 소식을 아리아드네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 자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의 친구로서 그녀에게 전해주지 않은 죄책감이 범벅으로 엉겨 있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 마음의 무게가 약간 가벼워졌다.

“그 이후로는 저도 딱히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국왕 폐하께도 따로 연락하지 않고 있어서 레오 3세 폐하께서 역정을 내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별일⋯⋯. 없는 거겠지요. 부친께도 연락을 못 하고 있을 정도면⋯⋯.”

“바다는 넓고 길은 머니 소식을 전하기가 더욱 어렵지 않겠습니까.”

라파엘은 짐짓 쾌활하게 아리아드네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낼 겁니다.”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까요?”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면 갈리코 국경을 넘어 필리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귀국했을 것이다.

그녀는 알폰소가 돌아올 수단 마련 때문에 예사크에 갇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레오 3세라면 가장 빠른 갤리선부터 급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요.”

라파엘도 레오 3세가 알폰소 왕자에게 따로 군자금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까진 알고 있었지만, 배편을 요청하는 알폰소의 편지는 갈리코 왕국의 외드 대공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알폰소의 자세한 상황은 에트루스칸 왕국의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성전’에서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걸지도요. 소년들은 항상 그런 꿈이 있지 않습니까.”

신실한 마르그리트 왕비의 손에서 자란 어린 알폰소는 항상 예삽교 전통의 ‘기사 군주’가 되고 싶어 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봉건영주들 충성을 한 몸에 받고, 전리품을 공정하게 나눠주며 백성의 생활을 돌보는 바람직한 군주.

어려서부터 알폰소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은 라파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국왕 폐하께서 왕자님께 보낼 자금 지원을 미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랐다. 갈리코의 사절단으로 간 알폰소는 따로 예사크에 출정할 준비를 해갔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하려면 그건 다 금화였다. 그런데, 고국에서 자금 지원조차 안 해주고 있다고?

“루비나 공작 부인이 국왕 폐하께 뭐라고 속살거렸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한두 번 간언하시긴 했는데, 지금은 갈리코 군 때문에 난리가 나고 흑사병도 퍼진 터라⋯⋯.”

“세상에⋯⋯.”

고생이 얼마나 많을까⋯⋯.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자 라파엘은 황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데 마레 추기경 가는 산 카를로에 계속 남아계실 예정이십니까?”

“예?”

“갈리코 군대의 남하 때문에요. 이제 에트루스칸에 남은 군대는 수도근위대밖에 없습니다. 산 카를로에서 농성이라도 하게 되면 일이 참 곤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산 카를로에서 농성’은 사태를 유하게 돌려서 말한 내용이었다. 산 카를로는 번화한 상업 도시이지 방위 도시가 아니었다. 갈리코 군대가 쳐들어온다면 함락될 가능성이 높았고, 중앙 대륙 최대의 대도시가 군대에 함락된다면……. 약탈과 방화는 물론이요, 아녀자는 좋지 못한 꼴을 볼 가능성이 몹시 높았다.

“저희는 남부로 대피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이긴 합니다.”

라파엘의 집안은 국무를 돌봐야 하는 발데사르 후작만 수도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라파엘의 통솔하에 에트루스칸 북부를 떠나는 방안을 논의하긴 했었다.

“⋯⋯하지만 남부도 역병이 창궐 중이지요.”

“예. 군대를 피해 남부로 갔다가 흑사병이라도 옮으면 그게 무슨 바보짓입니까.”

발데사르 후작가는 고위 귀족 등에는 극히 드문 수도 귀족이었다. 지방에 자신의 대영지가 없고 근거지가 수도여서 그렇다.

자연스레, 시골 영지를 돌본다는 미명으로 수도를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데 마레 추기경 가에서는 따로 논의하신 내용은 없나요?”

아리아드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생의 갈리코 왕국은 가에타 지방을 돌려받은 후 만족하며 돌아갔기 때문에 중부까지 갈리코의 군대가 내려온 적은 없었다.

당연히, 데 마레 추기경과 그 식솔은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비교적 안전한 산 카를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글쎄요. 저희는 아직 별다른 방도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갈리코 군대의 목표는 아마 산 카를로일 겁니다.”

라파엘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하하는 경로를 보면 알아요.”

파두아 대학의 군사학 수석 졸업생의 눈에는 갈리코의 대군이 어떤 속셈으로 움직이는지가 종이에 적힌 편지처럼 보였다.

“다들 설마설마하면서 마음 놓고 있지만, 저들은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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