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아리아드네의 계책
“갈리코 군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겁니다.”
슬슬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체자레의 수도 저택, ‘빌라 소로토네’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차분한 녹색 눈으로 저택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색깔과 꼭 닮은 사이프러스 정원수가 아리아드네를 감싸고 있었다.
“체자레 공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딘가, 완벽하게 고요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 그림 속 아리아드네는 제가 있을 자리를 정확하게 찾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때 ‘빌라 소로토네’에서 살았다.
체자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느꼈다. 이곳이 그녀가 있을 곳이라고.
그리고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갈리코 군대를 돌려보낼 거라니, 그것은 역사서에 기록될 것이다.
그 역사의 현장에 그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에 그녀가 동참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역사에 그가 동참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했다.
체자레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만 기분 좋은 압도감이었다.
“⋯⋯얼마든지. 뭐가 필요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계시죠?”
군대를 모두 잃은, 허울뿐인 총사령관이지만 직위 자체는 아직 건재했다. 루비나 공작 부인이 분투한 결과였다.
“그렇지.”
“야간의 성문 개방권이 필요해요. 작전 지시의 이름값도요.”
작위도, 직위도 없는 일개 사인에 불과한 아리아드네가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에 접촉하는 것은 추후 문제가 될 수 있다.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문제지만, 작전이 크게 성공한다면 더더욱 문제다.
반드시 누군가가 나타나서 도대체 그녀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대담한 일을 했느냐며 물어뜯을 것이다.
작전이 총사령관 체자레의 이름 아래에서 이뤄져야 그녀가 보호받을 우산이 생긴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하려는 일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면 체자레로서도 위험부담을 지게 된다.
그는 지금 가뜩이나 처지가 좋지 못했다.
야간에 성문을 열고 나갔다가 적에게 빌미라도 주게 된다면 체자레 공작은 정말로 수도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레오 3세 대신 욕받이가 되는 꼴이다.
하지만 그는 아리아드네의 계책이 성공하리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게 잘 된다면 결국 공은 다 내가 가져가게 될 텐데, 아가씨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지?”
아리아드네는 쓰게 웃었다. 얼굴 수건에 가려져 있어 그녀의 표정이 체자레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게요.”
운명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 줄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에트루스칸 왕국을, 에트루스칸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들을 구한다면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는 당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요.
입술을 떠나지 못한 단어들이 그녀의 씁쓸한 미소에 모두 담겨 있었다.
체자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빛무리만 그녀의 옆을 지킬 뿐이었다.
* * *
일주일 전, 아리아드네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도움을 받아 갈리코 군대의 남하 패턴을 분석했다.
사실 분석이랄 것도 없었다.
갈리코 군은 훌륭한 약탈 대상이 될 수 있는 북부의 대도시들을 모두 제쳐놓고 산 카를로로 일직선으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여기. 이렇게.”
라파엘이 양피지 위에 점을 찍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순차적으로 점을 찍지 않고, 이미 찍힌 점들 사이의 평균 거리를 어림해 일직선으로 양피지 위를 쭉 그었다.
맨손을 잡힌 아리아드네가 깜짝 놀라 라파엘을 쳐다보았고, 그는 혀끝을 내밀며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정말 실수였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그의 미소에 아리아드네는 얼떨떨해져서 바로 사과를 받아주었다.
깨끗하고 창백한 그의 아이 같은 표정에서는 한 점의 나쁜 의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아니에요.”
내가 좀 예민했나?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요새 라파엘의 말이 이상하게 짧아진다고 생각하며 양피지 위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이 그은 선의 끝자락은 산 카를로 외곽의 북부 구릉지대로 이어져 있었다.
“군대가 주둔하기 딱 좋은 구릉지에요. 여기서 전열을 정비한 이후 산 카를로에 압박을 가할 겁니다.”
라파엘은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사실 갈리코 군대가 무얼 노리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산 카를로로 진군하는 것까지는 확실해요. 하지만 그 뒤에는? 공성전을 벌이려면 인원도 모자라고, 제가 알기로는 저들에게 공성용 장비는 없어요.”
전통적인 공성용 장비는 공성추나 투석기, 공성탑 따위였다. 최신 유행은 공성포를 비롯한 화포류였다.
이들은 부피가 거대했기 때문에 밖에서 쉽게 관찰되었고, 이동속도가 느렸다.
공성용 대포는 핵심 전략 병기이기 때문에, 이것이 국경을 넘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갈리코 군에서 공성 병기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화포를 지급했다는 말고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공성 병기를 지참한 군대치고는 지나치게 빨리 움직였다.
“라파엘이 산 카를로는 방어형 도시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해자도 없고, 성벽도 낮고, 무엇보다 도시 경계선이 지나치게 길어요.”
“그런데도 산 카를로 공략에 공성 병기가 반드시 필요할까요?”
산 카를로는 중앙 대륙 제일의 대도시였다.
최근 갈리코의 수도, 몽펠리에가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고대 문명 시절부터 한자리에 터를 잡고 앉아 건축과 역사가 반복되었던 산 카를로를 계획도시인 몽펠리에가 한달음에 따라잡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는 천년 고도죠. 아무래도 기본적인 건 다 갖춰져 있습니다. 저 인력으로, 저 장비로 산 카를로 함락은 몹시 어렵습니다. 제가 지휘관이라면 시작조차 않을 겁니다.”
본국에서 장비를 보충하기에는 지금은 겨울이 가까워져 오는 계절이었다.
당장 호송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공성 병기가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 여기에 도착할 때쯤에는 첫눈이 내릴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갈리코 군대가 국경 가까이에서 깔짝이던 시절에는 ‘훈련 차 우리 국경 근처까지 갔다가 그만 살짝 넘어버렸다’는 변명이 가능했다.
루도비코 법황이 뭐든지 다 너그럽게 받아줄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륙으로 남하를 시작하고 나서는 그 루도비코 법황이라도 감싸주기 힘들 정도의 국제 예양 위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도비코 법황이 레오 3세의 첫 번째 항의를 묵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강력한 항의가 반복되는 가운데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진다거나, 군대가 체류 그 이상의 짓을 한다면 제아무리 법황이라도 더 이상은 감싸줄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라파엘이 아리아드네가 손에 쥔 깃털펜을 손째 움직여 북부의 레젠토, 에르모, 만프레도를 차례대로 이었다.
연달아 손을 내주게 된 아리아드네는 깃털 펜을 아예 라파엘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요.”
하지만 라파엘은 깃펜은 다 쓴 모양이었다.
펜을 받아든 그는 막상 받은 펜은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북부 삼대 도시를 짚었다.
“순차적으로 약탈을 하며 내려왔을 겁니다. 방어 여력이나 도시 규모를 감안해볼 때 그게 교과서적이에요.”
“하지만 도시 약탈을 시작하게 되면⋯⋯.”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턴 전면전이죠.”
법황 아니라 라탄 제국의 황제가 살아 돌아와도 그것은 보호를 해줄 수가 없다.
“저들은 산 카를로에 볼일이 있습니다. 속전속결로 수도까지 내려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수도만 치고 가던가, 아니면 뭔가 조건을 걸어 협상을 시도하려는 생각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그들이 중간에 도시 약탈을 하지 않고 내려온 데에는 흑사병을 피하려는 생각도 있었을까요?”
아리아드네는 한 가지를 지적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장이 도시를 피해 직선으로 남하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추측에 일부 동의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들은 도시를 모두 피한 채 딱 곡창지대만 거쳐서 오고 있네요. 보급선이 길어지니 최대한 현지에서 조달하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중부는 그나마 추수가 일부 진행되고 있었는데, 다 약탈당했겠군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들고 움직일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 나머지는 다 불태웠을 겁니다.”
⋯⋯나쁜 놈들, 이라고 아리아드네가 중얼거렸다.
전쟁에 비열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느냐만, 그들은 선전포고조차 하지 않은 채로 내년도 에트루스칸의 희망을 앗아가고 있었다.
북부, 남부에 이어 중부까지 추수에 실패하면 그 충격은 내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빼앗은 곡식을 자기들이 먹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에트루스칸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죄다 불태우고 있었다. 순수한 파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겨울이 되면 저들이 돌아갈까요?”
“일반적으로는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만, 지금 갈리코 군은 상식을 모두 파괴한 상태로 움직이고 있어서요.”
같은 예삽교 국가끼리 선전포고 없는 내륙 진격, 대도시 약탈을 하지 않는 진군.
게다가 역병이 창궐하는 땅으로의 남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겨울에 본국으로 복귀를 과연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돌아가게 해 주어야겠어요.”
“⋯⋯좋은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법황의 개입이라도?”
라파엘의 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지금 에트루스칸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수도 근위대밖에 없었고, 이는 국왕에밖에 움직일 권한이 없다.
아리아드네에게는 확실히 없는 권한이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추기경의 사생아였으니 성황청을 움직여 정치‧외교적인 해법을 노릴 거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대답하는 대신 라파엘에게 조그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공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에 피가 묻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는 성직을 지망하는 라파엘을 지켜 주고 싶었다.
“⋯⋯구체화되면, 알려 드릴게요.”
축객령이었다.
언제나 여기까지가 라파엘이 접근할 수 있는 선이었다. 내심 실망했지만 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면 알려 주세요.”
그는 덧붙였다.
“꼭 알고 싶으니까.”
당신의 놀라운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면 뭐든 다 알고 싶으니까.
* * *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복안을 가장 먼저 공유한 것은 라파엘도, 데 마레 추기경도 아닌 산차였다.
“흑사병을 갈리코 군대에 옮기려고 해.”
산차는 랑부예 구휼원 간호부대를 교육시킨 당사자였다.
지금 산 카를로 시내에서 흑사병의 예방과 방역 실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수도에서 활동하는 역병 의사들이 남의 눈을 피해 명문가의 하녀에 불과한 산차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방식은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실, 시체와 부산물을 적의 집결지에 투하하는 방식이지.”
무어 제국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말미에 함락당한 천년 고도 예사크에 흑사병으로 죽은 사체를 투석기로 쏘아 보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자왕은 부대의 대부분을 이끌고 중앙대륙으로 금의환향한 뒤였고, 새로이 ‘예사크 왕’으로 옹립된 사자왕의 조카 예콘 백작이 역병으로 무너져가는 도시에서 혼자서 결사 항전하다 무어 제국에 무너졌다.
당시의 문헌은 하늘에서 돌 대신 죽은 시체가 비처럼 성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성벽을 부수려면 단단한 걸 쏴 보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거라면 성공했다’고 평가하던 예사크 왕과 그 부하들은 이내 도시를 점령한 흑사병에 전투 능력을 잃었다.
사자왕이 자랑하던 기사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병 앞에서 전투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군대는 없었다.
그리고, 시체를 쏘아 보낸 무어 제국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투석기가 있나요?”
“없어. 그리고 상대는 성벽 안에서 응전하는 게 아니라 벌판 위에서 움직이고 있어. 투석기를 쓸 상황은 아니지.”
다른 감염 경로가 필요했다.
“뭐 좋은 수가 없을까?”
“⋯⋯한번 알아볼게요. 시체를 사용할지, 환자의 부산물을 사용할지부터 결정해야겠네요.”
아리아드네의 밀명을 받은 산차는 서둘러 랑부예 구휼원으로 떠났다.
상대방에겐 감염을 극대화할 수 있고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후, 산차는 약간 창백해져서 돌아왔다.
“⋯⋯저기, 아가씨. 만나보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그런데⋯⋯. 제가 이걸 주선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왜, 무슨 일이길래 네가 그래.”
“랑부예 구휼원의 그레타가 아가씨를 뵙길 청합니다.”
일전에 산차가 몹시 똑똑하다고 칭찬했던 랑부예 구휼원 간호원단 아이였다.
“아. 기억나. 얼마 전에 그레타가 2조의 조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구휼원의 간호원단은 1조와 2조로 나뉘어서 움직였다.
산차가 1조를 직접 맡은 것을 감안하면, 2조의 조장인 그레타는 이번에 랑부예 구휼원에서 새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친구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였다.
하지만 산차는 고개를 떨궜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가씨께는 사소한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왜?”
“그레타가, 흑사병에 걸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