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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10화 (210/733)

<제210화> 처분할 수 없는 것

아리아드네가 그레타를 만나러 간 장소는 랑부예 구휼원의 별관이었다.

흑사병에 감염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격리해두는 곳이다. 그레타는 별관에 수용되게 된 최초 확진자였다.

“내 말소리가 들리니?”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던 소녀는 깜짝 놀라며 답했다.

“아가씨⋯⋯. 정말로 와 주실지는 몰랐습니다.”

그레타는 별관 2층의 창문 있는 방에서 정원에 서 있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달막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주근깨가 살짝 보이는 피부는 평소라면 핑크색으로 빛났을 것이다.

여느 때라면 쾌활한 목소리로 주변을 독려했을 것이 틀림없는 소녀는 지금은 창백한 낯빛으로 낡은 숄을 걸치고 창가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몸 상태는 괜찮니?”

아리아드네는 질문하면서 몸을 떨었다.

자신이 찬바람에 몸서리를 친 건지, 아니면 본인의 가식에 스스로 질려 몸을 떤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흑사병에 걸렸다는데 괜찮을 리가.

그레타는 감기 기운에 시달리다가 어제 최초의 각혈을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이제 열흘 이내에 9할 이상의 확률로 죽는다.

“생각보다는 괜찮습니다. 움직일 만해요. 저 아픈 티 많이 나나요?”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 주었다.

“아니, 그다지.”

그녀는 이게 외양에 신경 쓰는 환자의 의례적인 질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레타가 이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가씨를 청한 것은,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위험한 장소까지⋯⋯.”

“그레타처럼 일선에서 직접 움직이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가 위험하다고 하면 나는 염치도 없는 사람이지.”

그레타는 활짝 웃었다.

“아가씨 같은 귀족 나리는 처음이에요.”

아리아드네는 그야, 난 귀족이 아니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있잖아요, 아가씨.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어떤?”

나 때문에 곧 죽게 생겼는데 나에게 감사의 인사라니.

“제게, 저 같은 사람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세요.”

그레타는 몹시 똘똘한 아이였다. 실물로 대면한 지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도⋯⋯. 절 팔아넘긴 아버지도, 항상 쓸모없는 계집애라고만 절 부르셨어요. 아니, 부모님뿐인가요.”

아리아드네는 그레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가난한 집의 여자아이는 그 부모가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평생 구박과 박대밖에 받을 것이 없다.

신분이 높거나 미모가 특출나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평생 하게 될 일은 농사일 보조 같은 단순노동이나 집 안팎의 허드렛일, 평범한 남자를 보필하고 그의 애를 낳아 키우는 그저 그런 인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여자아이라면 어려서부터 기를 꺾어놓는 편이 말을 잘 듣는다.

오냐오냐한다던가, 향상심을 독려한다던데, 뭔가를 북돋워 놓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아리아드네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베르가모 농장 시절을 떠올렸다.

세월이 좀 지났다고 그새 땟국물이 빠졌는지, 당시로써는 이가 갈리게 미웠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루크레치아의 손에 저세상 사람이 된 할멈이 생각났다. 이름이 잔 갈레아초였지.

하지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겠다는, 억울함과 원통한 감정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 인생의 원동력은 그 복수심이었다.

“꼭 저라는 사람이 못났다고 후려친 것도 아니에요. 진짜로 제가 모자란 거면 억울해도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런데 랑부예 구휼원 출신들은 다 게을러 빠졌다느니,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느니, 스무 살은 먹고 오라느니⋯⋯.”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은, 나는 분명히 할 수 있는데 타인의 자의적인 제재로 인해 시작조차 못 해보는 것이다.

“듣기 좋은 소리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어요. 아 뭐 물론, 말이라도 예쁘게 해주면 양반이긴 하죠.”

그레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봉사활동 오셨던 귀족 부인네 하나가 그러시더라고요. ‘넌 너무 예쁘니 분명히 잘 될 거야. 기사나 상인 같은 훌륭한 신랑감을 얻으렴! 이렇게나 젊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니?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아마 이사벨라가 껴 다녔던 은십자 부녀회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은십자 부녀회는 랑부예 구휼원에 고정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나이 운운하는 걸 보니 로레단 남작 부인이겠지.

“그 부인네는 가난한 사람 집에는 거울도 없는 줄 아나 봐요? 아니, 놋그릇에만 비춰 봐도 제가 그럴 얼굴이 아닌 건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래놓고는 절 앞에 앉혀두고 같이 봉사활동 온 엄청나게 예쁜 금발 귀족 아가씨가 잘 뜯어보면 외모가 형편없다고 험담하는 거 있죠? 내 참 웃기지도 않아서!”

은십자 부녀회 이야기가 맞았다. 금발의 예쁜 아가씨라면 이사벨라에 대한 험담일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 언니, 거기서도 욕먹네.

“그리고 나보고는 너는 이렇게나 예쁘니까 잘 될 거래요. 내 참 웃기지도 않아서! 그래서 여쭈어봤죠.”

그레타는 입 모양을 네모나게 만들어 에베베베 비웃듯이 목소리를 흉내 냈다.

“존경하옵는 귀부인, 그렇다면 제가 어디에 가서 무얼 해야 귀부인께서 말씀하시는 훤칠한 남편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전 랑부예 구휼원에 갇혀서 나갈 수가 없으니 은혜로우신 부인께서 제가 밖으로 나가게 도와주세요!”

신나게 짜증을 내는 그레타의 표정에는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시데요!”

그랬겠지. 달콤한 말을 하기는 쉽다. 얄팍한 위로는 더더욱 쉽다.

“다 괜찮다, 잘 될 거다, 우리는 빈민을 사랑합니다 입으로 떠들어 싸는 양반들은 많아도 정말로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진짜로 뭐가 잘 되게 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전 그래서 아가씨도 똑같으실 줄 알았어요.”

그레타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빵 쪼가리나 들고 와서 잘난 척 하면서 뿌린 다음에 칭송받고 집에 가실 줄 알았죠.”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다른 꿍꿍이가 없었다면 곡물까지 뿌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레타의 매서운 혀 놀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가씨께서 돌아가신 뒤에 곡식 수레가 줄줄이 구휼원에 들어올 때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그냥, 이번 잘난 척하는 재수 없는 귀족 여자는 돈이 많구나. 돈이 많으니까 저 정도는 펑펑 쓰는구나. 팔자도 좋지. 했죠.”

그레타는 2층 창가에서 지그시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흑사병 의사들이 입는 밀랍 코팅이 된 겉옷과 리넨으로 만든 얼굴 수건을 쓰고 있었다.

저 두 가지는 랑부예 구휼원의 간호원들에게도 똑같이 지급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흐르는 귀티는 숨길 수가 없었다.

장신구 따위는 다 떼어놓고 왔지만 구름처럼 흐르는 흑단 같은 머릿결에, 티 한 점 없는 맑은 피부가 보였다.

저런 피부는 뙤약볕을 받으며 일하는 여염집 여자로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피부다.

그 와중에 검은 머리카락에 매여 있는 진녹색 보석 리본은 눈을 확 사로잡았다.

왕궁에서나 쓸 법한 고급품이다. 목깃 언저리에서 보이는 숄은 어린 양털로 한 땀 한 땀 짠 것이었다.

자신이 두른 낡아빠진 숄과는 급 차이가 확연히 났다.

아리아드네와 그레타는 한두 살 차이가 날 뿐인 또래였다. 강렬한 질투심이 아니 들 수 없었다.

“⋯⋯.”

그레타는 아리아드네를 미워하기가 얼마나 쉬울지에 대해 생각했다.

함께 간호원이 된 구휼원 친구 중에서도 아리아드네를 미워하는 애들이 많았다.

귀족도 아닌 귀족 아가씨가 젠체하며 자신들만 사지로 몰아넣고 칭송은 혼자 다 받는다며,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얌체라고 말이다.

그들의 불만은 일주일에 한 번, 일급이 정산될 때만 아주 잠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레타는 함께 시시덕거리던 친구들처럼 편하게 아리아드네를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의 저 여자는 그들이 이 망할 구휼원을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로 일할 자리를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그것도 전국에서 찾는 사람이 잔뜩 있는 진짜 알짜배기 자리요. 일자리를 준데 봤자 저희한테는 허드렛일, 하녀 일이나 오지 그런 좋은 자리는 차례가 오지 않거든요. 구휼원이 생긴 이래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구휼원의 간호원들은 몸이 다섯 개라도 모자랄 만큼 여기저기서 파견 요청을 많이 받았다.

대역병시대가 끝나면 직업이 없어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레타는 개중 낙천적인 편이었다.

산 카를로는, 아니, 중앙대륙은 흑사병이 아니더라도 역병이 끊이지 않는 땅이었다.

주기적으로 콜레라든, 황열병이든, 하다못해 소 전염병이 됐든 뭔가가 돌았다. 방역 전문가는 항상 필요했다.

외국어를 할 수 있으면 일할 곳이 더 많을 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산차에게 고민 상담을 했더니 산차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 “갈리코 어? 배우면 되지. 우리 아가씨는 나한테 읽고 쓰는 법이랑 회계 장부 보는 법도 가르쳐 주셨어.”

산차는 웃으며 답했다.

배울 시간이 없는 게—정확하게는 일이 끝나고 나면 그냥 누워서 자고 싶은 게—문제일 거라고, 선생님을 구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자기 사람에게 지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꿈을 꿨어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꿈.

전염병 전문가가 되어 중앙대륙 곳곳에서 일하고, 내 의사결정에 많은 사람의 인생이 영향을 받고, 내 판단에 국가지대사가 결정되며, 나의 의견과 나의 식견이 존중받고 존경받을 수 있다는 꿈.

그레타는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아비가 자신을 웬 노인네에게 50 플로린을 받고 팔아넘기는 바람에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 집 식구들 수발이나 들어주면 되는 줄 알고 허드렛일을 하다가 이내 ‘수발’에는 아내를 잃은 노인네의 밤 시중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허겁지겁 도망쳤다가 랑부예 구휼원에 갇혀 버린 그레타에게는 사실 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꿈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그레타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사병에 걸린 건 남의 이야기라는 듯이 쾌활하던 그레타가 처음으로 보인 감정 동요였다.

“뭐라도 되는 꿈을 꿨어요.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꿈이요.”

단어를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그레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레타는 용기를 내어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상상했던 대로만 된다면 역사책에 남을지도 몰랐다.

‘에트루스칸 왕국 최초의 여자 의사 그레타’. 직위는 매번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게 어떤 직업이건 간에 상상 속에서는 스무 번도 더 되고도 남았다.

“⋯⋯기왕 이렇게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하고 죽을래요.”

숨을 들이켠 그레타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갈리코 군대에 역병을 퍼트리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방법을 고민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도요.”

나이대답게 주근깨와 약간의 여드름이 뒤섞인 피부를 가진 소녀는 야무진 말투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했다.

“제가. 갈게요.”

아리아드네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그레타는 말을 덧붙였다.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저는 이제 감염병 전문가예요. 우리가 하는 건 병을 예방하기 위한 거니까, 퍼트리려면 그 반대로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레타는 여전히 대답 없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거절당할까 봐 다급해진 투였다.

“전 나이도 어리고 여자애니까 군영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어요! 그쪽에서도 경계 안 할걸요!”

이때까지 아리아드네는 그레타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위에서 달빛이 내렸고, 아리아드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서 그레타로서는 그녀의 표정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레타는 재차 채근했다.

“가게 해 주세요! 갈 거예요! 뭐라도, 하게 해 주세요!”

남기게 해 주세요. 제가 살아 있었다는 족적을.

“⋯⋯그레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고 그레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얼굴 전체가 눈물범벅이었다.

“난⋯⋯. 도저히 너에게 가라고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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