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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11화 (211/733)

<제211화> 희생의 정당한 대가

그레타를 마주한 아리아드네는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리고 있었다.

- “아이고, 약혼녀님 오셨습니까.”

성 밖의 양치기 소년, 아니 청년은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깥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을 연출하게 되든 그녀와 단둘이 남을 때에는 깍듯하게 그녀를 모셨다.

- “큰 결심 하셨구먼유.”

- “아닙니다.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전생의 체자레 백작은 쿠데타 준비를 위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산 카를로 성 안팎을 자유로이 오갈 전령이 필요했다.

그의 수족들은 알폰소 왕세자의 사람들에게 밀착 감시되고 있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약혼녀였다.

아리아드네는 성 밖의 목동과 바람이 난 척하며 매일 저녁 뻔질나게 성문을 나섰다.

짐짓 조신한 척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살피며 나갔지만 기실 남들 다 보란 듯이 애인에게 챙겨줄 만한 물건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목적’을 전시했다.

- “이 일이 다 끝나면 워쩐대유. 귀하신 아가씨이신데 저 같은 놈 때문에 명성에 누가 되면⋯⋯.”

아리아드네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난 목동은 체자레 군의 전령을 기다리며 아리아드네와 단둘이 그의 오두막 안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목동은 그녀에게서 3 피에디는 족히 떨어진 나무 의자에 앉아 얌전하게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 “평판은 흘러가는 세평일 뿐이고, 체자레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체자레가 책임져 줄 거예요. 전 걱정하지 않아요.”

목동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맞아유. 이 일만 끝나면⋯⋯.”

- “저야 그렇다 치고, 그쪽은 왜 이 일에 자원하신 건가요?”

아리아드네는 왕비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수모를 모두 참아내는 거였다.

그녀는 금화로 설득당했다기엔 지나치게 충직하고 사치품에도 관심이 없는 목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 “⋯⋯세상을 바꾸고 싶었구먼유.”

- “예?”

- “지는 원래는 남쪽 사람이지유. 머리가 좀 굵어지자마자 도망치듯 집에서 달아나서 수도로 왔습니더.”

목동은 담담하게 자기가 남쪽 기사의 서자이며, 어려서부터 본부인과 그 자식들에게 구박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리아드네로서도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 “그분들이 제가 꼴 보기 싫었던 건 충분히 이해하는구먼유. 제가 우리 큰형님이라도 저를 싫어했을 거예유. 근데.”

목동은 운동신경이 꽤 좋은 편이었지만 기사가 될 수 없었다.

천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종자(squire)에게 기사 서임을 해줄 기사를 절대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집에서 먹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한 푼도 상속받을 수 없었다.

운이 좋아 본처가 동정심에 적선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에서 반강제로 독립하게 된 그의 어머니가 열병에 걸려 몹시 앓을 때, 본처는 병원비조차 보태주길 거부했고 그는 분노했다.

‘집 밖에 나가서 사는 옛 몸종을 돌봐줄 의무는 없다’는 본처에게 침을 뱉고 본가를 박차고 나간 그는 어머니의 집으로 합가해 들어갔다.

열병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열흘간 간호하고 나니 본인이 옮았다.

모든 게 다 끝난 다음에 그에게 남은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절름발이가 된 자기 몸뚱어리뿐이었다.

- “서자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다 막아놓고, 그렇다고 집에서 돌봐 주지도 않으면, 나가 죽으란 말밖에 더 되나유?”

그는 분통을 터트렸다.

- “잘 먹고 잘살게 해달란 소리는 하지도 않아유. 사람답게는 살게 해 줘야지유. 집안 체면 깎인다고 평소에는 동네 농사일조차도 못 돕게 해 놓고, 막상 도움이 필요할 땐 외면하니 그냥⋯⋯. 그냥 전 사람도 아닌가유?”

목동의 순박한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체자레 백작님께서 성공하시면 그분께서 새 세상을 여실 거예유.”

서자도 제한 없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세상. 가계에 기여한 만큼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생계에 두려움이 없는 세상.

-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우리와 같은 출신이시면 우리가 겪는 고생도 다 굽어 살펴주실 것 아니에유!”

체자레도 같은 일을 모두 다 겪었다.

서자이기에 할 수 없었던 것들. 서자이기에 나설 수 없었던 일들. 있는 재능도 사장시키고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살아야 했던 나날들. 아리아드네도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목동은 근육이 다 빠져 나무토막같이 변한 오른발을 쓰다듬었다.

- “지는 몸이 이 꼬락서니가 돼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안 남았을 줄 알았어유. 근데, 이런 저 같은 놈도 필요하다고 하시지 뭐예유!”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 “세상을 바꾸는데 손을 보탤 수 있으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먼유!”

개인적으로 생기는 것 하나 없이 대의에 기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목청을 높이던 젊은 목동은 결국 죽었다.

그가 각오했던 ‘내일’은 아니었지만, 해를 넘기지 못했다.

체자레의 쿠데타가 터진 직후 혼란한 틈을 타 알폰소 왕세자의 세력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

목동과 아리아드네가 외부 주둔군과 내통한 연락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세자 측의 마르케즈 백작은 뒤늦게나마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목동을 참수하고, 온몸의 껍질을 벗겨 마을 나무에 매달았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일이 대충 수습된 후 시체나마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겠다고 성 밖에 나간 아리아드네는 목동의 처참한 사체에 충격과 공포를 감추지 못했었다.

- “당신, 왜 그렇게 동요해? 왜, 정말 그 목동 놈이랑 뭔가 있었던 거야?”

- “⋯⋯쓸데없는 말씀 그만 하세요.”

- “뭐야, 울어?”

살아남은 자의 예후도 그다지 좋지는 못했다. 체자레는 결국 아리아드네를 내치고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왕비로 맞았으니.

아리아드네는 그때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배웠다.

목동의 집은 작고 낡았지만 나름 아늑한 곳이었다.

그는 발을 절뚝이면서도 양치기 개들 여러 마리를 키웠고, 개중 가장 예뻐하던 녀석은 거의 사람처럼 주인을 따랐다.

그는 강아지와 코끝을 대고 강아지의 털 냄새를 맡으며 저녁에 양고기 비계가 들어간 순무 수프를 나누어 먹었다.

목동의 생활은 소박했지만 거기에는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그는 이제 껍질이 벗겨져 나무에 매달려 있다.

아리아드네는 목동의 강아지를 거두어 왕궁으로 데리고 왔지만 개는 영 적응하지 못했다.

- “뭐야, 그 못생긴 개는?”

- “제가 키우려고요.”

- “작고 예쁜 혈통견이 많은데 왜 저런 잡종을 왕궁 안에서 키워? 당신은 사교계에 낄 생각이 아예 없어?”

며칠 뒤 왕궁 여시종이 강아지가 열린 문밖으로 달아났다고 고했다.

정말로 도망친 것일지 의심스러웠지만, 아리아드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그래.”

그때의 그 목동은 죽었다. 강아지도 사라졌다. 당시에는 더는 손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게 해 주세요!”

하지만 눈앞의 그레타는 아직은 살아있다.

“그레타, 네 마음만은 잘 받았어. 하지만 흑사병에 걸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잖아?”

열 명 중 한 명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갈리코 군대에 흑사병을 퍼트릴 방도는 찾아보면 나올 거야. 굳이 네가 가야 할 필요는 없어.”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리아드네는 지난 며칠간 흑사병을 갈리코 군대에 퍼트릴 방법을 찾았다. 군대는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다.

이동하는 군대에 감염원을 집어넣는 방법은 역시 사람을 통해 침투시키는 것 외엔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갈리코 군의 이동 경로는 극비였고, 주로 열린 공터 위주로, 감염병을 피하기 위해 몹시 신중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보급품을 팔건, 기밀을 고자질하건 사람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가는 게 제일 확실하다는 건 저도 알고 아가씨도 아십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아리아드네는 그레타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타의 피의 무게를 자기 손에 묻히기 싫었다. 목동의 처참한 시체를 기억한다. 자기 때문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게 싫었다.

“아가씨. 저놈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우리에겐 내년도 없어요.”

그레타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했다.

“올해 추수는 공쳤다고 쳐요. 저놈들이 헤집고 다니면 내년 파종도 못 합니다. 아가씨가 곡식이 많으신 건 알아요. 그런데 그게 끝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내년에도 에트루스칸 사람을 모두 먹여 살리실 수 있나요?”

대답하지 못하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그레타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임금님이 갈리코 사람으로 바뀌건 말건 솔직히 상관없어요.”

아리아드네는 이 소리에 몸서리를 쳤다. 갈리코의 침공. 그래, 알폰소. 알폰소의 왕관. 그녀가 이번 생에 지켜주기로 맹세한 그 왕관.

“그런데 저놈들이 산 카를로에 쳐들어오면, 불태우고 약탈하고, 난리 날 것 아닙니까?”

그레타는 구휼원에서 지내며 무어 제국에서 도망쳐 온 외국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전쟁 난민들이 전해준 참상은 익히 들었다.

“그럼 누가 제일 먼저 죽습니까? 누가 제일 피를 봅니까? 남자는 다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고 죽일 겁니다.”

“⋯⋯그렇지만, 너는? 죽으면 아무 상관도 없어져.”

수도의 약탈은 이미 그레타가 죽은 뒤의 일일 것이다.

“에휴, 아가씨. 왜 이렇게 사람이 물러요?”

그레타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가겠다잖아요! 그럴 땐 눈 꾹 감고 주는 케이크 받아 드시라고요! 제가 일을 그르칠 것 같나요?”

아리아드네에게 이렇게 호통을 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레타는 허둥대다가 일을 망칠만한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제가 못 미더워 보여요?”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레타는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저한테 미안하면 제 이름을 널리 널리 퍼트려 주세요. 훌륭한 그레타의 희생으로 우리가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되었다고요. 제 이름으로 성황당도 짓고, 그래, 역사책에 올라가는 것도 좋겠다! 성녀 봉헌은 안 되려나요? 산 카를로의 성 그레타?”

반쯤은 농담이되 반쯤은 진담이었다. 살아서 도달하지 못한 위대함에 죽어서라도 닿고 싶었다.

아리아드네는 위대해지기 위한 열망으로 개인의 일생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정도로는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콤한 유혹과 당사자의 강권 앞에 눈을 감았다.

“우울해 빠진 얼굴 그만하시고요. 미안하면 산 카를로의 성 그레타에게 박수라도 쳐 주세요.”

아리아드네는 그만 풋, 웃고 말았다.

“어여, 박수도.”

1층의 아가씨가 찬바람 속에서도 손을 들어 시킨 대로 손뼉을 치자, 2층의 그레타는 킬킬 웃었다.

“이야, 시골 촌년 그레타 출세했네. 귀족 아가씨가 쳐주는 박수도 받아보고.”

“난 귀족 아니거든?”

“비슷한 거잖아요. 아가씨 지금 저한테 토 달 상황 아니니까 조용히 계세요.”

그레타는 농담을 던지며 으스댔다. 찬바람이 스치자 그녀는 조금 쿨럭였다.

“물러 빠진 아가씨, 산차나 보내주세요. 저는 늦어도 내일에는 출발해야 할 거예요.”

병색이 완연해지기 전에, 림프절에 부종이 보이고 손발이 검게 타들어 가기 전에 갈리코 군대를 만나야 한다.

* * *

아리아드네가 체자레를 만나 갈리코 군대의 위치와 성문 통과권을 따온 직후, 낡은 숄과 모자 달린 케이프를 걸친 소녀가 산 카를로의 북쪽 문을 나섰다. 그레타였다.

그녀는 당나귀 한 마리에 곡식을 실은 포대를 양쪽으로 걸치고 잰걸음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곡식 포대 안의 곡물은 겉으로 보기엔 말짱해 보였지만, 사실 흑사병 환자의 분변을 섞은 물에 행궜다가 환자의 침대 시트며 분비물을 닦아낸 수건 등으로 말린 것이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흑사병 균 중에는 반드시 동물한테 물려야 전염되는 종류도 있다고 했지만, 이번에 에트루스칸 왕국에 상륙한 종류는 치사율이 살짝 낮은 대신 환자의 기침이나 체액으로도 옮았다.

운이 좋다면 이 곡물은 덜 익은 상태로 조리되어 먹은 군인들을 일망타진 할 것이다. 운이 좋지 않더라도 취사병들로부터 시작해 퍼져나갈 것이다.

‘이대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두 시간 거리 내에 갈리코 군대⋯⋯.’

그들도 보급에 애를 먹고 있는 터였다. 곡식을 싣고 가는 어린 소녀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여가 좀 넘었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들렸다.

- “분대장님! 곡물 포대입니다!”

그레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왔구나.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레타는 당나귀의 고삐를 쥔 채 말발굽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말에 올라탄 기병 십여 명이 그녀를 둘러쌌다.

“살려주세요!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목숨은 됐다. 오늘은 네놈들의 제삿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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