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상승
“뭐?”
당황하는 아리아드네에게, 산차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나라님이 버린 땅을 소녀들이 구했다고 구전이 돌아요. 노래가 제가 들은 것만 네다섯 곡은 넘습니다.”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노래 뒤에 누가 있을까? 세력이 나서서 퍼트린 거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니 자생적으로 나타나서 퍼지게 된 거라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마찬가지였다.
국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다. 그녀는 그 불만의 아이콘이 되어, 앞으로 정치의 전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산차는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저번에 성녀 소리 들으셨을 때 성모(聖母) 아닌 게 어디냐고 하셨죠? 이번에는 성모는 아닌데, 어머니는 되셨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산차를 바라보았다.
“‘빈민의 어머니’랍니다. 아니, 결혼도 안 한 처녀한테 이게 무슨 악담이람!”
아리아드네는 끙, 소리 내며 앞이마를 짚었다. 산차는 내리 투덜거렸다.
“‘전쟁의 여신’이니 ‘흑사병의 천사’니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마지막 것은 의미를 모르겠어요. 흑사병에 안 걸리게 도와줘서 천사라는 건지 적한테 흑사병을 뿌려서 천사라는 건지? 잠깐만요.”
산차는 말을 하다 말고 아리아드네를 불러세웠다.
“아가씨 손이 왜 그래요?”
산차가 주목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오른쪽 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오른손은 문진이나 망치처럼 무거운 것에 찧어진 것처럼 형편없이 짓이겨져 있었다.
“아⋯⋯. 이거. 그냥 조금 다쳤어.”
그녀는 오른손을 등 뒤로 숨겼지만 산차는 아리아드네를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손을 다치실 일이 뭐가 있어요!”
산차는 황급하게 아리아드네의 오른손을 잡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약통을 찾으러 뛰쳐나가려고 했다.
아리아드네는 조심스럽게 산차에게 물었다.
“⋯⋯그냥 다친 것만 보이는 거지?”
“이게 다친 거 말고 또 뭐 잘못된 게 있어요?”
산차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리아드네의 손을 다시금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친 것뿐이 아니라면⋯⋯. 병? 흑사병에라도 걸리셨다는 소린가?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오른손은 짓눌려 다친 상처 외에는 손톱이 거무죽죽해지지도, 두꺼워지거나 부어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껍질에 벗겨지고 피가 흐른 외상이 있을 뿐이었다.
“안 보이면 됐어.”
아리아드네는 손에서 빛나는 빛무리가 보이냐는 뜻에서 물었던 것이지만, 산차의 눈에 안 보이면 그것으로 족했다.
오른손의 빛무리가 안 보인다면⋯⋯. 왼손의 그것도 안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내 그것이 본인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가씨⋯⋯. 왼손은 왜 그래요?”
“이게⋯⋯. 보여?”
“왼손 약지가⋯⋯. 새빨개요⋯⋯.”
그레타의 죽음과 함께 아리아드네의 왼손 약지 끝에는 붉은 점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흑사병이 갈리코 군대에 번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아리아드네의 붉은 점도 왼손 약지를 타고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무고한 목숨 하나마다 점 한 개인 모양이었다.
붉은 점들은 3일 만에 전생의 체자레가 잘라냈던 왼손 약지의 맨 끝마디를 모두 채우고, 그다음 마디로까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의사⋯⋯. 의사를 부를까요?”
당황해서 떨리는 산차의 물음에, 역시 당황한 아리아드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죄의 증거는, 남에게 보이지 않을 줄 알았다.
* * *
“힉, 할머니.”
물이 담긴 대야를 들여다보며 점을 치던 어린 소년이 눈치를 보며 할머니를 불렀다.
“저⋯⋯. 점괘를 잘못 봐준 것 같은데, 어쩌죠?”
소년은 얼마 전 캄포 데 스페지아 광장에서 만났던 누나를 생각했다.
중앙대륙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심판대에 오른 자’였다. 반갑고 신기해서 운명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잘못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상승기’에 있었고, 죄를 짓지 않고도 이승에서 성공 가도를 달릴 점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들여다본 그녀의 운명에는 업(業)이 다닥다닥 들러붙고 있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 사람은 너 때문에 신세 조진 거지.”
여상스럽게 대답한 소년의 할머니는 생각이 다른 데에 닿았는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었다.
“복채는 뭘 받았냐.”
“아무것도⋯⋯.”
노파의 낯빛이 손주의 것과 비슷하게 창백해졌다.
“이 머저리 같은 놈!”
노파의 지팡이가 훙,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소년은 기겁하며 펄쩍 뛰어 할머니의 지팡이를 피했다.
“아, 할머니! 쫌!”
“그때 그거지? 이 멍청한 놈이 남의 일에 오지랖을 부린다, 싶더니만 복채도 안 받아? 너 정신이 있니 없니!”
살만 무녀들은 점을 봐줄 때 복채를 꼭 받았다.
점괘가 잘못 나온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죄를 지어서 업이 쌓인다고 여겼는데, 그때 그 복채를 불살라서 신에게 바치면 받은 것이 없어서 죄업도 쌓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애초부터 받은 것이 없는 경우에는 업을 해소할 방도가 없었다.
“아니, 그게, 그때는 틀릴 게 없어 보였단 말이에요!”
“그게 말이나 돼!”
“분명히 상승기였어요. 분기점이 오기 한참 전이었다고요. ‘눈뜬 자들’이 인위적으로 개입한 거 같아요.”
‘심판대에 오른 자’는 특정 분기점, 그러니까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기 전까지는 항상 승승장구한다.
그 선택지는 ‘눈뜬 자들’이 그 사람에게 미래시를 부여한 이유이고, 그 선택지를 실현시키기 전에 낙오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 딱!
“아야!”
이번에는 지팡이 대신 할머니의 딱밤이 소년의 앞이마를 때렸다.
“멍청한 녀석! ‘황금률’은 원래 그래!”
“하지만 책에는⋯⋯.”
“내가 이 짓 하루 이틀 했느냐? 괜히 이 할미가 끼어들지 말라고 시켰겠어?”
노파는 구시렁구시렁하며 지팡이를 바닥에 대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눈뜬 자들’이 대체 왜 ‘눈뜬 자’가 아니라 복수형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글쎄요⋯⋯.”
한 번도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여러 명이라서 그렇지!”
노파는 허공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너랑 나랑 둘만 있어도 이렇게 의견일치가 안 되는데, 스무 명 있고 서른 명 있고 백 명 있으면 결과가 애초에 계획한 대로 나오겠니?”
“안 나오겠죠⋯⋯.”
“그래서 그놈들의 계획을 엿보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뭐, 아무 의미가 없는 것까지는 아니고, 라며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할미가 번거로워지게 생겼다.”
“아니 왜요⋯⋯.”
“네놈의 업을 갚아야 할 거 아니냐!”
“제가 갚으면 돼요⋯⋯.”
“되겠느냐? 점괘도 제대로 못 보는 녀석이?”
할 말 없는 연타에 소년은 어깨를 수그리고 쪼그렸다.
“나중에라도 그 아가씨에게 한 번 도움을 줘야 할 일이 생길 거다. 그때 단디 갚고, 그 뒤에는 절대 연관되지 않기로 하는 거다!”
“네, 할머니⋯⋯.”
노파는 입맛을 다시며, 놋대야에 물을 담아 직접 점괘를 보았다.
언제 갚을 수 있을지, 그녀의 인생 굴곡을 직접 보며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 이런.”
할머니의 어깨 너머에서 그 점괘를 함께 보던 소년이 곤란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할머니. 이 정도 업이면 망한 거 아니에요?”
‘심판대에 오른 자’의 업이 쌓이면 쌓일수록 맨입으로 점괘를 잘못 봐준 손주의 업도 그에 비례해 올라간다.
“이걸 어떻게 손을 대요?”
소년이 울상을 지은 채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직 기회는 있어.”
“나갈 길이 안 보이는데?”
“이번 생에서⋯⋯. ‘눈뜬 자’가 될 수 있다면 다음 생의 본인은 이 업보를 받아내지 않아도 되지.”
‘영웅’이 되라는 소리였다. 소년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할머니를 질타했다.
“할머니가 그거 불가능하다고 했잖아요. 몇 명이냐 성공했느냐고⋯⋯.”
“내가 언제 불가능하다고 그랬어! 희박하다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0와 1은 달라!”
노파는 손주에게 짜증을 냈다.
“그리고 방도가 없으면, 넌 그냥 너한테 쌓인 업보를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을 게냐?”
“그건 아닌데요⋯⋯.”
“네가 유황천에서 다음 생을 시작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진취적이지 못한 놈 같으니!”
노파는 놋대야를 싹 거뒀다.
“앞으로 네가 한 달에 한 번씩 이 아가씨 점괘를 봐라. 뭐가 흔들리면 바로 할미한테 얘기해. 갚을 기회가 되면 빨리 갚고 치워야겠다.”
노파는 빠른 채무변제가 하고 싶었다.
초반에 갚아버리는 게 낫지, 나중 가서 그 아가씨의 인생 역정 후반에 이 빚을 갚으려면 지금보다 수십 배쯤 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슬쩍 훔쳐본 그 아가씨의 운명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큰 판에 올라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 * *
“왕자 전하. 시트르엥의 기사들이 전하를 뵙고자 합니다.”
막사 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알폰소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느새 햇볕에 몹시 그을려 있었다. 단정하게 깎았던 머리는 목덜미를 덮을 만큼 덥수룩하게 자란 상태였다.
예전보다 단단하게 넓어진 어깨와 각지게 자란 턱 덕에 소년같이 앳된 인상은 상당히 가셔 있었다.
“무슨 일로?”
“휘하로 받아달라는 요청인 듯합니다.”
비서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 엘코 경이 알폰소에게 바깥의 상황을 고했다.
“왕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시트르엥 백작이 저번 주에 교전 중 사망해서⋯⋯.”
“안타까운 일이었지.”
“그 휘하 기사들이 의탁할 곳이 없어진 모양입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작전상의 총사령관은 있었으나 완벽하게 통합된 군대가 아니었다.
중앙대륙 여기저기서 갹출해낸 군사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초의 군자금은 율덴부르크 대공의 사비와 갈리코 국왕 필리프 4세의 후원금으로 충당했지만, 그 이후에 들어오는 수익은 철저히 공적대로 나눴다. 그
리고 에트루스칸의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소규모 기사단은 눈부시게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배후를 경비하는 허드렛일을 하다 도저히 승산이 없었던 10대 1의 전투에서 이기고 몸값 높은 인질을 잡았던 첫 전공 이후로, 장비를 정비하고 말을 구한 알폰소 왕자와 그 기사들은 소규모 척후 부대로 상대방 진지를 기습하는 별동대 역할로 승승장구했다.
최근에는 대규모 전투에서 무어 제국의 가장 뛰어난 무장이라는 알-나미르의 아들을 사로잡았다.
십자군이 전투 자체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알폰소 왕자가 올린 전공이 십자군 전체의 유일한 전공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엘코 경이 물었다.
“왕자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기가 무리라고 판단하시면, 굳이 전하께서 거절하실 필요 없이 제가 입구에서 돌아가라고 돌려보내겠습니다.”
알폰소에게 합류하고자 하는 자들은 시트르엥의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주군이 있어야 전리품을 나누어 받고 보급품을 받을 수가 있는데, 철저히 공적대로 나누어주는 거라면 공적의 크기가 크고, 또 그에 비해 집단의 크기가 작은 주군을 찾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소수 인원으로 발군의 결과를 내는 것은 단연코 십자군 전체에서 알폰소 왕자였다.
“재정 상황은 어떤가.”
“40 두카토 정도의 여유자금이 있습니다만, 많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알-나미르의 아들 관련한 몸값 협상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서⋯⋯.”
기사를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에트루스칸 본국에서는 아직 기별조차 없었다.
“포로협상이 끝나면 거기서 5할 정도는 우리에게 주지 않을까 합니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까지는 받자.”
“왕자 전하⋯⋯.”
엘코 경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거두어야 한다면, 좀 더 훈련이 잘된 정병을 거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시트르엥의 기사들은 ‘성전’을 떠난다는 낭만에 차서 고향을 떠나온 애송이들이었다.
실질적인 전투력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폰소는 엘코 경의 반론에 손을 내저었다.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저들에게 어떤 옵션이 있겠나.”
좋지 못한 주군을 만난다면, 돌격 작전의 고기방패로 한 번 쓰고 버려지게 된다.
그렇다고 주군을 구할 수 없다면 보급이 끊긴다. 저들은 결국 이탈해서 먼 이국땅을 헤매다가 낙오할 것이다.
“내 신세 같아서, 보내기가 좀 그러네.”
“⋯⋯아닙니다. 왕자님. 본국에서는 조금 늦어지고 있는 것일 뿐⋯⋯.”
알폰소는 엘코 경의 말을 끊었다.
“만나볼 것도 없어. 막사를 마련해주고 보내놔. 내일 아침 훈련 때 내가 직접 보겠네.”
엘코 경은 고개를 조아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알폰소는 엘코 경이 들어오면서 덮어놓았던 편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푸른 잉크의 예의 악필로, 그가 쓰고 있던 편지였다.
「못 참도록 그리운 아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