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15화 (215/733)

<제215화>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아리아드네는 창백한 낯빛을 하고 응접실로 내려왔다.

벽난로가 타오르는 실내인데도 불구하고 어깨에는 양털로 만든 숄을 감고, 양손에는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체자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조용하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는 아리아드네를 맞았다.

“아가씨!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는 성큼 다가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 응접실 소파로 이끌었다.

누가 집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내민 체자레의 손길에 잠시 움찔, 했지만 이내 장갑 낀 왼손을 내밀어 그의 인도에 따랐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별일은 아니에요. 그저 좀 피곤할 뿐이에요.”

그는 대번에 대답했다.

“그 정도가 아닌데? 난 아가씨가 이렇게 기운 없는 거 처음 봤어.”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에서 염려의 눈빛이 반짝였다.

눈감고도 그릴 수 있는 얼굴, 듣지 않고도 기억해낼 수 있는 목소리였지만 이렇게까지 몰입한 표정과 기색은 기억에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가 이런 남자였던가 여부를 기억 속에서 찾아보며 어딘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흑사병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이런.”

체자레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나도 같이 걸리는 거잖아.”

둘은 밀폐된 응접실에 단둘이 함께 있었다. 별다른 보호장구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불운하게도 그러시게 되겠군요.”

“그럼 격리는 같이하게 해 주는 건가?”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집이 으리으리한 걸 보니 열흘 묵기에는 딱 맞겠어. 기왕이면 방도 아가씨랑 같은 방이었으면 좋겠는데. 혼자 갇혀 있으면 심심할 테니.”

아리아드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귀가 안 하시고요?”

“그대의 명성답게 국가와 민족을 좀 위해보라고, 데 마레 영애. 내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가는 도로 위에 흑사병을 뿌리는 셈이 되고, 게다가 가엾은 피사노 공작가의 식솔들까지 병에 노출되지 않겠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평만 들어보면 아리아드네 데 마레 영애는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와도 같은 성품에 동정심이 대단해서 구휼원 사람들 전체를 먹인다는데 말이야.”

“잠은 집에서 주무셔야죠.”

“실물은 피도 눈물도 없구먼.”

그는 실눈을 뜨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소문 중에는 하나만 진실이야.”

“뭐요?”

“지략이 하늘을 찌른다는 거.”

그는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도통 체자레의 입에서 들을 일 없던 단어에 흠칫 놀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조금이라도 장애물을 치워서 좀 더 잘 듣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자기 귀를 의심하는 중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체자레는 말을 이었다.

“그대 덕에, 곤란한 처지를 면했어.”

그는 데 마레 대저택의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아주 멀리 아득하게 팔라지오 카를로의 서쪽 첨탑이 보였다.

“패전한 총사령관. 필요도 없는 감투를 강제로 썼는데, 어울리지 않는 모자였지.”

그는 이번 일이 잘 해결되기 전까지는 본인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서쪽 첨탑에 투옥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참하게 밑바닥을 보이고 패배했어. 패전 후에는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지.”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챘다.

“설마요.”

그녀는 냉소하며 말했다.

“공께서 하셨던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방계로나마 푸른 피가 흐른다고 공인받으셨는데, 패전 한 번에 서쪽 탑에 가두겠어요?”

거기는 저같이 뒷배 없는 사람이나 들어가는 곳이죠, 라는 뒷말은 힘주어 삼켰다.

눈앞의 체자레는 그녀가 서쪽 첨탑에 들어갔었던 사실을 모르니까.

아리아드네는 그러면서 체자레를 대할 때 자꾸 평정을 잃는 스스로를 관조했다.

그녀는 체자레에 대한 애정이 정말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고 자신했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분노와 울화뿐이다. 화는, 그래서 나는 걸 거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체자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나의 친애하는 아버지를 지나치게 고평가하는군.”

국왕의 곁에서 20년을 넘게 버틴 애첩 루비나는 마르그리트 왕비를 해했다는 의심을 받자마자 서쪽 탑은커녕 지하 감옥에 투옥당했다.

그렇다고 레오 3세가 마르그리트 왕비를 진정으로 챙긴 것도 아니었다.

국왕은 왕비의 죽음을 캐볼 기회가 왔음에도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고 갈리코 왕국을 두려워해 눈을 감았다.

복수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녀를 살해한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내가 적장자도 아니고, 아니 설령 적장자라 할지라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국왕 대신 성벽에 매달 희생양이 필요할 때 내가 그 후보 목록에서 빠질 거로 생각하나? 진심으로?”

“안 빼 주실 것 같긴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공을 성벽에 매다는 건 국왕 폐하로서도 큰 성의 표시이시기 때문에, 최후의 최후를 위해 아껴 놓으실 겁니다.”

체자레를 매달고 나면 그다음에 제공할 공양물은 국왕 본인밖에 없을 테니. 레오 3세가 피붙이에게 온정을 베풀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작 이런 일로는 처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더 큰 판돈이 걸렸을 때 쓰겠지.

“⋯⋯아가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맞아.”

체자레는 홀린 듯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참 이상해.”

“뭐가요?”

“차에 약이라도 탄 것 아닌가?”

체자레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며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안에는 찻물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자레가 귀가 얇긴 하지만, 타인을 신뢰하는 것과는 다르지. 알긴 아네.

“그런데 아가씨의 말을 들으면 그냥 그대로 납득하게 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대체 왜 이런 거지?”

아리아드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제가 맞는 말만 하는 걸 수도 있죠.”

“그것도 맞지.”

이렇게까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체자레를 보자 아리아드네는 뭔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 탄 건 없고요, 병에 걸린 건 제가 아니라 체자레 공 같네요.”

“응? 내가 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지 않습니까.”

“그럼 집에서 재워 주는 거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죠?”

“내가 흑사병에 걸렸으면 아가씨도 흑사병에 걸렸겠지. 환자들끼리 사이좋게 격리하면 자원도 아끼고 수고도 덜고 이모저모 좋은 것 아닌가?”

체자레는 웃으며 걸치고 있던 자신의 망토를 벗었다.

“방 안이 덥지 않아? 장작이 아주 잘 타는데.”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두꺼운 숄과 장갑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몸이 아직도 영 안 좋은가? 혈색은 그대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좀 더 좋아졌어.”

체자레는 상세히 아리아드네의 얼굴과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이랬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전생에서도 약혼녀였던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겼던 적이 없다.

무도회에 아리아드네가 아름답게 차리고 나오면 치하하고, 다른 영애보다 그녀가 춤에서 서툴러 보이면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고, 그녀가 아파서 일정을 맞출 수 없다면 짜증을 내고 그녀가 뭔가를 잘 해내서 그가 대신 칭찬을 받으면 좋아했을 뿐이다.

그녀 자체에게 관심을 보인 적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이사벨라에게는 보였을까? 아리아드네는 그것도 아마 아니리라 생각했다. 체자레는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요. 방이 덥긴 하네요.”

그는 티 테이블을 건너와 아리아드네의 옆에 섰다.

“숄 이리 주시면, 저쪽에 걸어 드리지.”

역시 체자레의 이런 태도는 생경했다. 아리아드네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체자레 공께서 웬일인가요? 이런 분이 아니셨던 것 같은데.”

그는 잘생긴 얼굴로 유쾌하게 웃었다.

“아가씨도 참 이상해. 우리는 많이 부대낀 적도 없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쩜 이렇게 잘 알지? ‘산 카를로 가제트’ 같은 데에서 체자레 데 카를로 섹션만 골라 읽는 건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대충 둘러댔다.

“사교계 가십은 빠르니까요.”

“세평은 믿는 게 아니야. 남들은 항상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만 하지.”

그는 그윽하게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물빛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했다.

한때는 이 눈동자의 온전한 관심을 너무나도 받고 싶었다.

그 시선을 독점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더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과연? 지금은?

“사람들이 아가씨더러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의 환생이라고 하잖아?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체자레는 손을 뻗어 아리아드네의 턱을 부드럽게 추어올렸다.

“혀에는 칼을 물었고, 성격은 독살스럽지.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고, 천사는커녕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절대로 손해는 안 봐.”

물빛 눈과 녹색 눈이 마주쳤다.

입으로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물빛 눈동자는 아주 온화하게, 그녀의 눈, 코, 입, 하나하나를 모두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입만 열면 바른말일 뿐이고, 바라는 건 모두 상식선에 있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본인에게도 적용돼.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부당한 이득도 취하지 않아. 의외로, 항상 남들에게 퍼주고 있어. 입만 살았지, 순 호구야.”

그는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거리는 여전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코와 코가 맞았던 기준선이 사이드로 비껴갔고, 대신 입술과 입술의 기준선이 맞게 되었다.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런 건 다 부수적인 거야.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는데, 지금 내 눈엔 당신만 보여.”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그녀의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덥네요.”

그의 각도 안에 머물러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체자레도 굳이 그 상태를 고집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바로 했다.

“더워? 숄 건네줘.”

그녀는 걸치고 있던 양모 숄을 벗는 대신 그저 어깨 채로 그에게 내밀었다. 체자레는 직접 그녀의 숄을 벗겼다. 능숙한 손길이었다.

벗기고 나니, 숄이 닿았던 그녀의 쇄골 쪽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장작이 타오르며 후끈해진 방 온도에 땀이 맺히며 양털과 마찰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경도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런.”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숄을 받아 윙체어의 팔걸이에 걸더니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새 손수건을 그녀의 목덜미에 댔다. 땀방울이 묻어났다.

“빨갛게 됐잖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손수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때 내 손수건.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리고 그날 아이같이 펑펑 울던 체자레를 생각했다. 그날의 체자레는 진심이었을까. 이 사람은 어딘가 바뀐 부분이 있을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어조였다.

“더울 때 너무 꽁꽁 싸매고 있는 건 안 좋아. 사냥터 다닐 때 깨달은 건데, 체온이 지나치게 올라가도 몸이 안 좋아질 수 있다고.”

그는 손을 내밀었다.

“장갑도 벗지?”

무도회 같은 공식적인 상황이 아닌데도 실내에서 장갑을 끼고 있는 건 산 카를로의 에티켓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에티켓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자기와 있을 때 편하길 원했다.

그저 단출한 실내복 한 벌,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일상의 일부처럼. 언제나 도자기 같은 피부 위와 완벽한 화장을 얹고 예술적인 조각상처럼 그의 주변을 장식할 여자를 찾던 그로서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녀가 숄도 순순히 내주었기 때문에, 체자레는 장갑은 당연히 벗겨도 될 줄 알았다.

그가 먼저 손을 뻗은 방향은 하필이면 그녀의 왼쪽 손이었다.

카멜 색의 가죽 장갑에 그의 손이 닿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말아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