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당신도 나만큼 울었으면 좋겠어
장갑을 벗기려 드는 체자레를 떨쳐내며, 아리아드네는 장갑 아래 숨겨진 무수한 새빨간 점들을 생각했다.
왼손 약지 끝에서부터 시작한 점은 갈리코 군대의 북상과 함께 점점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지금은 손가락 전체가 핏물에 전 것처럼 흉측했다.
- “너는 덩치가 너무 커서 남자를 안는 것 같대. 머리카락은 시꺼메서 갈가마귀 같다네.”
이사벨라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웅웅 울렸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 “네 가슴은 너무 크고 쳐져서 젖소인 줄 알았대.”
체자레는 아름답지 않은 것에 가혹하다.
- “여자는 나처럼 조그맣고 품 안에 쏙 들어와야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
그에게는 미리 정해둔 ‘완벽함’의 정의가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차 없이 비난했다. 단죄에 가까울 수준이었다.
체자레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였다.
추함이 그 정도였을진저, 단순히 예쁘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신체의 장애를 체자레가 본다면?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요!”
아리아드네는 체자레가 장갑을 벗기려고 들었던 왼손을 거칠게 그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내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마!”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르는 아리아드네에게 놀란 체자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
하지만 그것은 아리아드네를 더욱 자극했을 뿐이다.
“누가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했어요?!”
그녀는 타오르는 눈초리로 체자레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 끝 간데없는 분노의 근원을 몰라 당혹스럽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난 당신이 마음대로 구는 게 정말 싫어!”
녹색 눈에서 분노와 원망이 흘렀다.
“자기 멋대로 다가왔다가 내킬 때 훌쩍 떠나지! 헌신도, 의리도, 사랑도 다 내팽개쳐두고! 당신은 당신 기분이 가장 중요하잖아!”
눈앞의 체자레는 그녀에게 상처를 줬던 체자레가 아니다.
그녀를 제 좋을 대로 이용해 먹고, 손가락을 자르고, 급기야는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 버렸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오랜 기간 눌러놓았던 분노였다.
한번 임계점을 넘자 홍수가 나서 둑이 터지듯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왜 화가 난 거야?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당황한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녹녹했고 달콤했다. 그게 아리아드네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래! 누가 제멋대로 방문하래요?”
그는 어안이 벙벙해서 반문했다.
“⋯⋯흔쾌히 맞아준 건 아가씨였잖아?”
“피사노 공작이 방문하고 싶다는데 데 마레 가문 문지기가 퍽이나 돌아가시라고 하겠습니다!”
체자레는 그런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이 닿았던 적이 없었다. 발 닿는 대로 걸었고 그 모든 곳에서 환영받았다.
데 카를로 왕가의 일원이 되고 공작위를 수여 받은 뒤로 그 ‘환영’이 좀 더 커졌다는 사실은 체감했지만 그건 그저 사람들이 그와 더 어울리고 싶어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거기에 강요나 강압의 면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뭐?”
“당신에게 어쩔 수 없이 맞추는 거라고요! 맞추고 싶지 않다고요!”
아리아드네는 노도와 같이 퍼붓고 있었지만 그녀조차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지금 내뱉는 분노는 그저 곁다리일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왜! 나를 버렸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과 헌신에 대한 당신의 대가는 왜 배신이었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난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그렇게 탐탁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당신에게 모자라?’
결국에는 전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는 몰랐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차오르는 숨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가씨, 울지 마.”
체자레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이 와중에도 체자레는 나긋나긋함을 잃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목소리, 유한 표정, 다정한 태도.
“속상하지? 마음 많이 상했어?”
아리아드네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예쁘게 움직이며 고운 말을 뱉는다.
한때 그걸 얼마나 갈구했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움직였다.
분노가 8할이다. 하지만 나머지 2할에, 남은 미련이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아니, 분노조차도 미련이 아닌가.
정말로 극복했다면, 그를 깨끗하게 잊었다면 무슨 소리를 해도 평온하고 웃고 넘길 수 있을 텐데.
체자레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아리아드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여전히 병아리의 목덜미 솜털처럼 보드라운 목소리였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미안해.”
그리고 여기서 아리아드네는 펑 터져 버렸다. 체자레가 오늘 보이는 태도는 누군가를 얻겠다고 작심했을 때 보이는 태도였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에게 보였던 태도. 예를 들어, 전생의 이사벨라라던가. 무한한 양보, 희생, 굽히기. 전생의 아리아드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무엇.
그리고 그녀는 이게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체자레는 반드시 자기가 받은 수모에 대해 보복을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마음을 녹이고 체자레의 손을 잡는다면, 그는 지금 이렇게 달랜 값을 언젠가는 기필코 받아낼 것이다.
“잘못한 거?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이번 생의 체자레가 잘못한 건 없었다. 사실이다.
“잘못이라면, 존재 그 자체?”
하지만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싶었다. 내가 당한 만큼, 너도 울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싫어. 비뚜름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도, 잘났다고 쳐들고 있는 턱도, 진짜 하나하나 전부 다 싫어!”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이긴다’는 말은 병법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속속들이 알았다. 어디가 가장 연한지, 어디를 찔러야 가장 아파하는지.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공작새처럼 몸을 부풀리고 우쭐거리고 다니지요? 사람들이 그걸 몰라볼 거 같아? 무능한데 뒷배로 기어 올라갔다는 사실 모두가 알고 있어서 새삼 말하기조차도 입이 아파! 그런데 잡고 있는 줄마저 썩은 동아줄이네! 지금의 위세가 얼마나 갈 것 같으세요!”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성은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의 혓바닥은 통제를 잃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난 당신이 싫어. 꼴도 보기 싫어!”
이건 진심이다. 진심인가.
체자레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아도, 그녀를 갈구하는 눈빛을 던지지 않아도 정말로 괜찮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그렇지만 괜찮았다. 그가 나를 떠나는 게 무섭다면, 내가 먼저 버리면 된다.
“나가요.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면, 다시는 버림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던진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다.
말을 잃은 체자레 공작은 데 마레 가문의 응접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떠나는 주인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객을 홀로 남겨두고 주인이 나가버리는 일은 어마어마한 실례였지만, 체자레는 당해도 쌌다. 아니, 모르겠다.
그도 울었으면 좋겠다.
* * *
체자레 공작이 봉변당한 날 이후로도 아리아드네는 계속 자기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씻지도, 먹지도 않았고 창문의 커튼을 여는 법도 없었다.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가 현재 곡물 일부를 시장에서 처분하고 있으며, 곡물가가 폭등을 넘어 역사적인 수준까지 올라 생각보다 이익이 훨씬 크다는 보고서를 올렸으나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찾아온다는 것도 금지시켰다.
피사노 공작의 보복이 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기거나 버텨낼 자신이 있는 거라기보다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녀는 지금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아가씨. 갈리코 군대가 국경 밖으로 완전히 나갔답니다.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장도 퇴각하는 길에 병사했대요.”
산차가 간간이 전해주는 바깥소식은 그녀의 손에 새로 올라오는 붉은 반점으로 쉽사리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갈리코 왕국에도 흑사병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몽펠리에 중장기사단의 진로대로⋯⋯. 필리프 4세가 진노해서 중장기사단을 몽펠리에 외곽에 주둔시키고 시내 진입을 엄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생, 1123년의 흑사병 사태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최북단인 가에타 영지를 조금 넘어간 곳 즈음에서 멈췄다.
역병이 프리노약 산맥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병이 갈리코의 군대를 매개체로 삼아 거침없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일단 산맥을 넘은 다음에는 더 이상 몽펠리에 기사단조차 필요 없었다. 갈리코의 양민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이 모든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붉은 반점은, 약지를 넘어 손등을 타고 올라 그녀의 손목과 팔뚝까지 기어올랐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에게 별호가 하나만 주어진다면 그건 ‘진실을 보는 소녀’도 아니고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도 아닌 ‘피로 물든 왼손’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가씨, 의사를 모실까요? 왼손을 보이시면 의사에게 무슨 방도가 있을 수도⋯⋯.”
“필요 없어.”
“그럼 오른손이라도⋯⋯.”
“산차.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둬.”
아리아드네는 혼자 남아 있을 때 분노가 걷잡을 수가 없게 되면 문진을 들어 오른손을 내리찍었다.
형편없이 뭉개진 오른손 끝에서 반짝이는 빛무리가 춤을 췄다.
갈리코 왕국군이 후퇴를 시작한 날, 빛무리는 열성적으로 반짝였다.
전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피로 물들어가는 왼손과 대조적이었다.
갈리코 군이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경 밖으로 떠난 날, 빛무리는 열광했다.
폭죽처럼 터지기도 했고, 손가락 끝에서 끝으로 파도타기를 하기도 했다. 마치 성공적인 목적 달성을 축하하는 것 같았다.
크기 자체도 확실히 전보다 커졌다. 멀리서 보면 무슨 성화(聖畫)에 나오는 성인 같았다.
예사크의 곤이 라트갈린의 요제프에게 세례를 내릴 때의 묘사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1 더하기 -1은 0이 아니었다. 죄는 선업으로 씻겨나가지 않았다. 그대로 죄였다.
더 나쁜 것은 그녀가 지은 죄악인 왼손의 핏물은 만인에게 보였으나 그녀의 선업의 결과인 오른손의 빛무리는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그녀 자신, 스스로만 알고 있는 성취. 심지어 원하지도 않았던 영광.
- 살랑살랑
손끝의 빛무리가 다시 한번 자잘하게 춤을 췄다. 이건 죄를 지은 누군가가—아마도 거물이—죽었다는 소리였다.
몽펠리에 기사단장이 죽었다던 날에도 빛무리는 이렇게 춤을 췄었다.
- 콰직!
분노한 아리아드네는 문진을 들어 오른손 끝을 재차 짓찧었다.
‘황금률’은 그녀를 배신했다.
‘황금률’이 추구하는 목적은 공의로운 정의가 아니었다. 물론 무엇이 정의인지는 합의되지 않는다.
간단한 사고실험이 있다.
홍수가 난 물길이 있는데, 이대로 두면 마을 하나가 침수되어 100명이 죽지만, 내가 둑을 무너뜨린다면 물길이 바뀌어 마을을 피해간다.
대신 5명의 일가족이 사는 외딴집을 덮쳐 그 가족이 죽게 된다.
이때 둑을 무너뜨리는 것이 정의인가, 그대로 두는 것이 정의인가?
아리아드네는 본인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결코 둑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정의인지에 대해 생각을 깊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데 남의 일에 끼어들 여력이 없다, 가 그녀의 입장이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간신히 데 마레 가문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이건 추기경 사후에는 이폴리토에게 넘어가 버릴 집이다.
그리고 가주가 된 이폴리토에게는 아리아드네를 자기 마음대로 결혼시킬 권한이 있었다.
60살 차이 나는 노귀족의 후처, 수도 난봉꾼의 아내, 아니면 차라리 수도원에의 유폐. 모두 다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녀는 자기 앞가림이나 했었어야 했다.
피처럼 붉은 왼손은 추괴(醜怪)한 것이었다. 장애였다. 결혼 시장에 던져진 매물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였다.
그녀의 왼손을 이사벨라에게, 이폴리토에게, 아니, 데 마레 추기경에게 들키게 된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이 한낱 사교계 영애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교분을 맺고, 랑부예 구휼원을 구하고, 갈리코 왕국군을 패퇴시키며 그저 가문의 손익을 위해 체스말처럼 사용되는 정략결혼의 패보다는 더 자율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머저리 같은 착각.”
하지만 그녀는 새장 속의 새였다. 한계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옴짝달싹도 못 할 만큼 가까운 곳에.
이삼 년 안에 결혼해서 집을 나가지 못한다면 그녀가 갖게 될 신분과 지위는 결국엔 집안의 골칫덩이인 노처녀에 불과하다.
- 쾅!
그녀는 문진을 들어 재차 오른손을 짓찧었다. 손끝이 뭉그러지고 말라붙은 피가 다시 터졌다.
호되게 아팠지만 그건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살아있음을 상기시키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었다.
“세상에 내 편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올바른 길을 보여주고, 말을 들으면 이득인 사람 따위 없는데.
신적인 존재라고 다를 거로 생각했다는 게 순진해 빠진 거였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이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었는데.”
- 쿵!
혼잣말과 문진 찧는 소리만 고상하게 장식된 데 마레 대저택의 서쪽 끝 처소를 울렸다.
* * *
자기가 혼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인식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아가씨를 따라 지옥에라도 내려갈 산차가 있었다.
- 쿵!
방문 안에서 들리는 문진 내려찍는 소리에서 산차는 좌불안석으로 방 바깥을 빙글빙글 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 들어가서 울며불며 아가씨한테 매달려서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쇠고집 아가씨를 잘 알았다.
그렇게 한다고 말려질 위인이었다면 지금 여기까지 가지도 않았다.
‘도와주실 분이 어디 없을까⋯⋯.’
보통은 아리아드네 또래의 영애가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부모님께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그럴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여러모로 부적합했다.
그녀의 아가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었다.
생각을 해 보니 그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그녀가 돌봐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녀를 돌봐줄만한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천애고아라고 해도 믿을만한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그나마⋯⋯.’
산차는 줄리아 데 발데사르 영애를 떠올렸다. 아리아드네의 지인들 중에 그나마 가장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자기가 드리는 건 주제넘은 일일 것이다.
모셔오더라도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뇨라 줄리아를 만나서 둘이 같이 산책이라도 하고 차 한잔이라도 나눈다면? 산차는 정말로 아리아드네를 저 방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편지를 쓰자.”
산차는 아리아드네 아가씨에게서 배운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양피지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