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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17화 (217/733)

<제217화> 기분의 문제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기가 새로 받은 편지를 읽었다.

그녀는 공용 서재에 놓인 자신의 책상에 앉은 채로 자기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남의 집 사정에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 부드러운 회청색 눈동자의 미청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가끔은 너무 무르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말했다.

“이렇게 집안 식솔들을 풀어놓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닐 텐데. 헛바람 들지 않을까?”

남자의 표정은 미묘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호응이 오지 않자 줄리아는 머쓱하게 덧붙였다.

“아니. 마음은 기특하기는 한데. 주인 챙기는 거긴 하니까.”

그렇지만 본심은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사용인이 주인 친구한테 편지까지 보내는 건 선 넘는 거 아니야?”

줄리아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산차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공손한 어조로 본인이 아리아드네의 몸종인 산차임을 밝히며, 최근 아가씨께서 많이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서 아가씨의 친우이신 시뇨라 줄리아께서 방문하셔서 아가씨를 위로해주실 수 있다면 무한히 감사드리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고용인은 고용인이 지켜야 할 분수가 있다고. 아리를 보러 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아리의 몸종이 나한테 오라 가라 할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청년, 발데사르 가의 일 도메스티코인 프랑수아는 조용히 반문했다.

“당신에게는 나도 그렇게 보이나요?”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은 줄리아가 입을 가렸다.

프랑수아는 발데사르 가문의 일 도메스티코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줄리아의 전용 시종처럼 지냈다.

그는 방문하는 손님의 의전을 담당하는 일 도메스티코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모시는 아가씨의 초대는 집요했다.

게다가 흑사병으로 인해 외부 손님이 뚝 끊겨 본업이랄 게 사라지니 더 이상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당신은 다르지.”

서둘러 변명한 줄리아는 할 말을 골랐다.

“당신은⋯⋯. 웬만한 귀족보다 훨씬 더 교양도 있고, 의전에도 빠삭하고. 당신이라면 절대로 이런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았을걸.”

“다르긴요. 저는 아가씨댁의 일 도메스티코일 뿐입니다.”

프랑수아는 약간 모멸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사실은 제가 라탄어를 읽고 쓸 줄 안다거나 마상 창시합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요.”

그의 잘생긴 이마와 긴 속눈썹 아래 눈은 다소 울분에 차 보였다.

“제가 해도 되는 일의 선은 어디까지입니까?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의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명령 없이 의사를 구해와도 됩니까?”

“그건 달라! 아플 때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지금 당신 친구의 몸종이 한 일도 그와 똑같습니다.”

프랑수아는 약간 화난 어투로 내뱉었다.

“당신 친구는 아픈 거고, 그녀는 도움이 필요해요. 아가씨께서 형식을 보지 않고 실질을 보실 수 있으시다면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날아들었다.

“누가 아파?”

서재에 책을 찾으러 들어온 줄리아의 오빠, 소후작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이 나타난 것을 보자 프랑수아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깊게 목례를 한 후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줄리아는 낭패한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게⋯⋯.”

동생으로부터 사정 설명을 대충 들은 라파엘은 혀를 찼다.

‘대놓고 자존심을 박박 긁었구먼.’

그는 여동생과 자기 집 일 도메스티코 사이의 기류를 대충은 눈치챘지만 별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별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불꽃은 동생이 분별력이 있다기보다는 일 도메스티코 쪽이 희한하게 콧대 높은 철벽이라 성사되기 쉽지 않았다.

다만 그가 관심이 있는 내용은 다른 쪽이었다.

“그래서, 갈 거야?”

“아리가 상태가 안 좋다니 보러 가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자존심이 상했군?”

줄리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곡이었다.

발데사르 가문의 귀족주의자 기질은 라파엘에게만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줄리아도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실 그녀가 추기경의 사생아인 아리아드네와 친구 사이가 된 것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아리아드네를 괴롭히던 이사벨라 데 마레가 꼴 보기 싫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그 과정을 몹시 고상하게 돌파해나가지 않았다면 결코 줄리아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사실 줄리아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리아드네 마레’가 맞다고 생각했다—와 겸상할 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하녀 주제에 날 오라 가라 하다니 말이야. 맞지?”

“⋯⋯순순히 가면 진짜로 부르면 가는 사람 같잖아.”

줄리아는 부인은 하지 않았지만 찝찝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아리가 직접 불렀으면 당연히 갔을 거야! 정말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

라파엘이 말간 얼굴로 해법을 제시했다.

“내가 너 대신 갈게.”

“응?”

“이 하녀의 초대장은 너한테 온 거지 나한테 온 게 아니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

“난 그냥 친구가 기분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문병을 간 거야. 그렇지만 발데사르 가문은 분명히 대표를 보냈으니 친구의 어려움을 무시한 건 아니지. 어때?”

“아⋯⋯. 괜찮기는 한데.”

오빠의 음험한 속내를 짐작조차 못 한 줄리아는 이래도 찝찝하고 저래도 찝찝한 모양이었다.

“오빠, 가면 아리한테 꼭 물어봐 줘.”

“뭐라고 전할까?”

“줄리아도 왔으면 싶으냐고!”

아리아드네를 보러 가고는 싶지만 몸종의 초대에 응하기는 싫었던 줄리아가 열심히 보탰다.

“나 보고 싶다는 이야기 아리한테 받아와 줘!”

“알았어.”

라파엘은 예쁘게 웃었다.

“그 정도 심부름쯤이야. 물어는 볼게. 답이 뭐라고 나올지는 내 소관이 아니고.”

줄리아가 인상을 찡그리고 팩 쏘아붙였다.

“무슨 뜻이야 그게? 아리가 나 보기 싫어할 거라는 소리야?”

“아니 아니. 난 그런 예단을 할 수는 없다고. 초대할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뜻대로지.”

라파엘은 덧붙였다.

“물어는 볼 텐데, 원하는 답변을 받아온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지. 내가 어찌 감히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가 있겠어.”

하지만 그는 승낙을 받아올 작정이었다. 그녀와 동생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그도 꼽사리로 끼어 한 번 더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당장 다녀올게.”

* * *

데 마레 가문의 하녀 산차는 세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발데사르 가문에 보낸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이 이렇게나 신속하게 돌아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답장인 편지가 아니라 방문객인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며, 세 번째로는 나타난 사람이 그녀가 청한 시뇨라 줄리아가 아닌 라파엘 데 발데사르 소후작이었기 때문이다.

“초대장을 받고 방문하러 왔습니다.”

라파엘은 고개를 숙이며 산차에게 인사했다. 산차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제가 주제도 모르고 편지를 보냈는데 방문해주셔서 너무나 감사⋯⋯.”

“아닙니다. 주군을 염려하는 충심 깊은 편지였어요.”

라파엘은 상큼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얼굴이 빛나는 것 같아 어질해진 산차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들고 물었다.

“그런데 왜 줄리아 아가씨가 아니라 발데사르 소후작님께서⋯⋯.”

“빨리 와야 할 것 같았는데, 줄리아가 사정이 있었습니다.”

라파엘은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필살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빨강머리 하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냉큼 대신 받아왔지요. 아리아드네 양은 댁에 계신가요?”

“아, 네네. 아가씨께서는 방에 계십니다. 얼른 모셔오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 산차를 라파엘이 잡았다.

“혹시, 아리아드네 양의 상태는 어떤가요?”

라파엘은 챙겨온 왕골 바구니와 무릎 담요를 들어 보였다.

“아리아드네 양만 괜찮으시다면 잠깐 바깥에 마실을 나갈까 하는데요.”

체자레 공작이 왔을 때는 칼 같이 잘랐던 산차였지만, 무해해 보이는 라파엘 앞에서는 경계심이 절로 내려갔다. 산차는 얼떨결에 답해 버렸다.

“아,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라파엘은 거기에 덧붙였다. 한 번 더 말갛게 웃는 것도 함께였다.

“네네. 부담 갖지 마세요. 그녀가 불편하다면 저는 응접실에서의 차 한잔으로도 족하니까.”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 * *

“아가씨⋯⋯.”

간밤에 우울함에 잠식되다 못해 지쳐 잠든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고개만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스스한 느낌이었다. 두꺼운 커튼 탓에 해가 전혀 안 들어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몇 시지?”

“점심께가 조금 지났습니다. 배고프지는 않으세요?”

“⋯⋯안 먹을래.”

식욕이 한 톨 만큼도 들지 않았다.

산차는 아리아드네의 식사 거절에 한 톨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기별을 전했다. 식사 대신 응접실에 핑거푸드를 차려둘 속셈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뭐?”

“발데사르 가에서 오셨어요.”

산차는 전략적으로 손님이 발데사르 가의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남자라면 아가씨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뭐? 왜 갑자기?”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셔서, 걱정되셔서 방문하셨다고⋯⋯.”

주어를 빼먹은 소개문에, 아리아드네는 줄리아가 방문한 줄 알고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려 걱정을 해줘서 이 시국에 방문한 사교계의 여자 사람 친구를 얼굴도 보지 않고 돌려보낼 수는 없다.

아리아드네가 정말로 죽을 병을 앓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우울할 뿐이었다.

“준비하고 내려갈게. 몸단장하게 안나를 불러 줘.”

아리아드네는 덧붙였다.

“장갑은 꼭 챙겨오라고 안나한테 전해줘. 아니다, 안나한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가져다줄래?”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는 못내 우울해 보였다.

산차는 기회가 된다면 ‘손님과 함께 외출도 하시겠어요?’라고 아가씨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황을 보니 그런 말을 꺼낼 상태가 아니었다.

손님은 당장 돌려보내고 나는 마저 앓겠다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뭐, 발데사르 소후작님 본인이 응접실에서 차 한잔도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산차는 상황을 합리화하며 아리아드네에게 긍정적으로 웃어 보였다.

“장갑, 종류별로 다 가져올게요. 예쁜 걸로 골라요, 우리.”

* * *

응접실로 내려간 아리아드네는 멍청하게 물었다.

“⋯⋯라파엘이 왜 거기서 나와요?”

“못 들었어요?”

라파엘은 흰 이를 드러내며 눈부시게 웃었다. 붉은 눈과 하얀 피부가 몹시 고왔다.

아리아드네는 저 남자가 자기보다 예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줄리아 대신 왔습니다.”

“네?”

걱정이 되어서 초대도 없이 방문했다면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냈다고? 줄리아의 심부름인가? 이게 무슨 소리지?

산차의 초대장에 대해 까맣게 모르는 아리아드네는 혼란에 빠졌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가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무릎 담요를 던졌다.

“자, 우리 놀러 나갑시다.”

“예?”

“집 안에만 있으면 축축 쳐져요. 소풍 나갑시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에게 손짓했다.

“겉옷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해요. 나머지는 내가 다 준비해 왔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리아드네에게 굳이 하녀를 직접 부르는 노동을 시키지 않고, 라파엘은 직접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불렀다.

“거기, 아가씨 겉옷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우리 잠시 외출할 예정입니다.”

“어? 어어?”

“가볍게 갈 거니까 굳이 승마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돼요. 마필도 꺼내오라고 할게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렇게 라파엘은 체자레 공작도 생각만 했지 성공은 하지 못한 야외 데이트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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