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다시, 달리기
라파엘 데 발데사르와의 강변 소풍 이후, 아리아드네는 이틀 정도 더 앓아누워 있다가 결국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상황은 연일 나아지고 있었다. 우선, 갈리코 왕국에서 비보가 들려왔다.
오귀스트 공주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필리프 4세가 국사를 모두 내던지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칩거 중이라고 합니다.”
외부 소식은 최근 접견을 다시 허락받은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가 정리해서 보고했다.
그 덕에 할 일이 없어진 페트루치아는 그 옆에서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앉아 있었다.
“다 큰 남매가 저렇게까지 친하기 쉽지 않은데, 우애가 대단합니다.”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있는 아리아드네는 그저 비뚜름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린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국경지대에서의 일체의 도발이 끊겼습니다.”
“좋네요.”
산 카를로의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랑부예 구휼원 간호원단의 활약 덕분에 수도의 흑사병 환자의 수는 통제 가능한 정도로 유지되는 중이었다.
지방 도시 중 몇몇은 영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폐허가 된 것을 고려하면, 그리고 갈리코의 국토와 행정력이 초토화되어가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아리아드네의 개인적인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곡물 가격도 미친 듯이 오르고 있습니다. 열 배가 뭡니까, 이미 서른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대역병이 에트루스칸 왕국 최북단에서 멈췄던 전생과 다르게, 이번 생에서는 흑사병이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 거침없이 진군했다.
이제 한 해 농사를 망친 것은 에트루스칸 왕국뿐만이 아니었다. 중앙 대륙 전체의 추수가 멈췄다.
“내년 봄까지는 계속 오르겠네요.”
“예. 팔아달라고 성화들인데, 최소 수량으로 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판매한 양은 전체 비축분의 1할 5푼 정도 됩니다.”
“안전하게 가지요. 조금 더 푸세요.”
끝까지 버티다가 내년 봄 수확기 직전에 처분한다면 가장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창고에 불이 날 수도 있고, 분노한 군중이 약탈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분노한 군중보다는 그들 위에 군림하는 우매한 군주가 몰수를 시도하는 거였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라도 미리 금화로 바꾸어 놓는 편이 나았다.
“아가씨,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손님이 아가씨를 뵙기를 청합니다. 약속을 언제로 잡으면 좋으실지 여쭈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누구시길래?”
“포르토 공화국의 대사십니다. 그리고 보셔야 할 편지도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아세레토 공국에서 보낸 편지네요.”
“예. 그렇습니다.”
카루소 대표는 아리아드네가 편지를 확인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설명했다.
“둘 다, 식량 구매가 가능할지 타진하는 내용의 문의입니다.”
아세레토 공국에서 보낸 편지의 수취인은 카루소 대표가 아닌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소문이 국경을 넘어서 났군요.”
“상인계의 말은 빠르지요.”
“대량으로 외국에 한 번에 처분하는 게 시장에 쪼개서 푸는 것보다 편하기는 할 텐데⋯⋯.”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오른손의 빛무리가 부르르 떨었다.
식량을 해외로 반출하지 마라, 이 매국노! 라고 외치는 듯했다.
아리아드네는 이 빛무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지만—청개구리 심보로 빛무리가 원한다면 그 반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전생에 에트루스칸의 국모 자리에 몹시 가까웠던 사람으로서, 일말의 망설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야기는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조건을 준비해서 조만간 방문해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 * *
카루소 대표가 전달해 주는 바깥소식만으로도 본인의 위상이 상승한 것은 충분히 체감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말로 바깥에 나가보는 것은 또 천지 차이였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가는 길이었다.
대성황당 앞 광장에 운집한 대중은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를 발견하자마자 마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 “데 마레 영애다!”
-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
- “성녀님께 축복을!”
- “축복을 내려 주세요, 축복을 내려 주세요!”
은마차 맞은편에 타고 있던 이사벨라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삐죽였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뭐라고 했다면 아마 이폴리토가 그녀의 정강이를 찼을 것이다.
“대단한데, 아리아드네.”
이폴리토는 과장된 여유로움으로 배다른 여동생을 치하했다.
“네가 우리 집안의 이름을 드높였어. 훌륭해.”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긴 했지만 말만큼은 상냥하게 답했다.
“과찬이세요.”
이폴리토는 이제 와서 아리아드네의 명성에 숟가락을 얹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라파엘과의 대화는 그녀에게 ‘용서’와 ‘너그러움’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게 만들었다.
지난 며칠간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와 체자레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나는 어디까지 단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고심이었다.
그러나 이폴리토는 그 고려에 끼지도 못했다.
용서나 너그러움 같은 문제가 아니라, 너무 시시하고 얄팍해서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친해지기 어려운 부류다.
“다 왔다.”
이폴리토와의 대화를 끊고 싶었던 아리아드네는 마부가 도착을 알리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광장의 군중이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에 접근하려고 몰려들었지만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가드들에게 제지당해 성당 입구 문간에 빼곡하게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 “식량 감사합니다!”
- “빈민의 어머니!”
- “성녀님께 축복을!”
아리아드네는 여유 있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빈민 구제 사업은 애초에 명성을 드높여서 국왕이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이럴 때 몸을 사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날씨가 추워져서 두꺼운 장갑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환호성과 열광이 들렸고 아리아드네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대성황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성황당 내부의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대중처럼 날것으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선망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안녕하세요, 데 마레 영애.”
-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교계에서 약간의 안면이라도 있었던 사람은 앞다투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치보 후작 부인. 그간 잘 지내셨어요, 로마니 부인?”
아리아드네와 친분이 있던 사람은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는 주변에 그녀와의 친분을 떠벌렸다.
- “제가 아리아드네 양에게 갈리코 어를 가르쳤지 뭡니까! 그럼요,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어요. 호호, 이 선생을 잊지 않고 있어 주다니! 부탁이요? 그럼요, 하나쯤은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친분이 깊지 않은데도 그녀와 인사를 나누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데 마레 영애 아니에요?”
‘은십자 부녀회’에서 발조 백작 부인의 시녀를 맡고 있는 로레단 남작 부인이 이사벨라에게 과도하게 친한 척을 하며 인사했다.
“로, 로레단 남작 부인.”
이사벨라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저 여자가 나한테 이렇게 반가운 척을 할 리가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로레단 남작 부인은 대성황당의 통로를 몸으로 막은 채 이사벨라에게 눈치를 줬다.
“여동생이 정말 그 명성에 걸맞게 고우시네요! 소개 좀 해주세요, 이사벨라 양.”
이사벨라로서는 죽기보다도 싫은 상황이었지만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이사벨라는 제발 아리아드네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창피 주지 않기를 하늘에 기도하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아리아드네에게 말을 꺼냈다.
“아리아드네. 이쪽은 ‘은십자 부녀회’에서 친해진 로레단 남작 부인이셔. 발도 넓으시고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는 분이야.”
입 싼 여자니까 박대하면 네 평판에도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힌트를 말 안에 가득 담은 채였다.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용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거기에는 이사벨라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지 여부도 당연히 들어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사벨라 본인부터가 진심이라고는 없었다.
‘도대체, 들숨 한번 날숨 한 번이라도 남을 조종하려는 의도 없이 내쉴 수는 없는 거야?’
하지만 이사벨라의 위협은 어느 정도는 먹혔다.
로레단 남작 부인이 사교계에서 유명한 빅마우스라는 사실은 아리아드네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로레단 남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로레단 남작 부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고 합니다.”
언니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다거나 하는 공치사를 추가해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괘념치 않는 듯했다.
“어머머, 목소리도 예쁘지!”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하게 울리는 목소리여서 듣기 좋은 것과는 별개로 사교계에서 선호하는 전형적인 여자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열망은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위는 모두 뭉갰다.
“우리 앞으로 자주 얼굴 보며 지내요!”
아리아드네는 딱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목례를 하고 로레단 남작 부인을 지나쳤다.
이사벨라는 자기 체면을 세워 줘서 고맙다느니 같은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은 채 자존심 상한 얼굴로 앞만 보며 걸었다. 뭐, 기대도 안 했다.
그들 일행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맨 앞줄, 데 마레 가족석 쪽으로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고, 한참을 고생한 이후에야 간신히 좌석에 도달했다.
‘드디어.’
이제는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 사람이 없었다. 대성황당 안에 있기만 해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설교가 시작될 때까지 조용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 등 뒤의 인파가 웅성웅성했다.
“이런, 데 마레 영애 아닌가!”
‘데 마레 영애’ 소리에 이사벨라는 본능적으로 가장 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사벨라를 찾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국왕, 레오 3세가 버티고 서 있었다.
왕가의 가족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데 마레 가문의 좌석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둥근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에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는 아는 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절로 나오는 한숨과는 별개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취하려 했다.
“왕국의 태양이신 국왕 폐하를 뵙습⋯⋯.”
“아니, 아니, 일어서게. 이런 딱딱한 돌바닥에서 무슨 예를 차리려고 해.”
레오 3세는 친근하게 다가와 손수 아리아드네를 일으켜 세웠다.
“내 영애의 이름이 저잣거리에 드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과찬이십니다.”
“아니! 과찬이라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어린 영애가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빈민들을 거두어 먹였다니,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자 영애의 명성이 지금보다도 더 드높아져야 할 일이지. 이 얼마나 예쁜 마음이란 말인가!”
레오 3세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 아리아드네를 세워놓고 그녀의 얼굴에 금칠하고 있었다. 좋지 않았다.
“송구스럽습니다.”
레오 3세는 ‘송구스럽다’는 아리아드네의 말에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조만간 영애를 한 번 왕궁으로 부르려고 하네.”
혹시나 레오 3세가 자신을 대성황당의 왕실 가족석으로 부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레오 3세의 어깨 너머에는 ‘국왕의 조카’인 피사노 공작 체자레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는 데 카를로 왕가의 방계로 인정받은 이후로는 알폰소 왕자와 마르그리트 왕비가 없는 왕가의 가족석에 앉는 것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오늘 가족석에 끌려 올라간다면 꼼짝없이 체자레와 설교 내내 부대껴야 한다.
“영애.”
아리아드네는 문득 놀라 레오 3세 앞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조만간 시일을 정해 사람을 보내겠네.”
“무한한 영광에 감사드리옵니다, 폐하.”
좋게 생각한다면 치하와, 운이 좋다면 하사품이 내려올 수도 있었다. 운이 하늘에 닿는다면 작위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낙천주의자는 아니었고, 상황이 레오 3세와 연관되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곡식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