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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0화 (220/733)

<제220화> 추기경의 딸

레오 3세의 기별은 몹시 빠르게 왔다. 아리아드네는 국왕의 호출에 대비해 미리 몇 가지 준비를 해 두었다.

하지만 레오 3세가 하도 급하게 불러서, 하마터면 시기를 놓칠 뻔했다.

그녀는 간신히 상황을 정리해둔 후 지금 팔라지오 카를로에 입궁해 있는 상태였다.

“영애.”

레오 3세는 자비로워 보이는 미소를 띠며 시종에게 턱짓했다. 왕궁 시종이 재빠르게 달려와 아리아드네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 장소에 영애와 같은 어린 소녀가 들어온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니지 않을까 싶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레오 3세의 개인 서재였다.

루비나 공작 부인조차 자주 들어오지 않는, 정말로 개인적인 국왕만의 공간이었다.

차를 다 따르고 나자 국왕은 역시 턱짓으로 시종마저 물렸다.

“이 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모아온 것들이야. 주로 제왕학과 통치론에 관한 것들이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책장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았다. 선작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궁중 하녀들이 매일 쓸고 닦아 그런지 먼지가 깨끗하게 닦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손때가 타지 않은 책들이었다. 사두고, 안 읽은 게 틀림없었다.

“국왕 폐하의 깊은 심기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들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빈정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레오 3세는 흡족하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충(忠)은 국가의 근본이라네.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이 나라의 본을 바로 세우지.”

그는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의적인 눈초리였다.

“영애는 요즘 밖에서 ‘에트루스칸의 구원자’라고 불리고 있더군.”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레오 3세는 도전자를 용납하지 않는 왕이다. 분명히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저는 그저 무지렁이 미혼 처녀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왕궁의 은혜로 세워진 구휼원에 자주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챙겼을 따름입니다.”

그녀는 납작 엎드렸다. 자존심 나부랭이 따위 때문에 권력을 거스르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저런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럽습니다. 저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국왕 폐하께서 엄벌을 내려 주소서.”

“하긴⋯⋯. 부담스럽기도 하겠지.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나?”

자, 대충 레오 3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온한 선동자들을 처벌하고 아리아드네 본인도 거기에 동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자. 집에 가고 싶어. 집에 보내줘, 라고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레오 3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보답이 없는 헌신이 힘들지는 않나?”

“예?”

“나는 국왕으로서, 내 충실한 백성들에게 자원을 배분하지. 그 자원은 식량일 때도 있고, 금화일 때도 있고, ⋯⋯지위나 작위일 때도 있다네.”

레오 3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맥락 파악을 하지 못한 아리아드네는 기계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저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 생전에 왕비 폐하의 이름을 빌어 국왕 폐하께서 내려주신 하사품을 받았던 적이 있사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몹시 큰 영광으로서⋯⋯.”

“아니, 아니. 그런 사소한 것은 잊게나.”

레오 3세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보석 따위는 내가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보낼 수 있다네. 상대방이 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쉽지. 하지만 내가 보내야 하는 게 식량이라면? 지방 곳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줘야 한다면?”

레오 3세는 약간은 지쳐 보였다.

“모든 게 내 맘 같지는 않다네. 꼭 어디선가 중간에서 없어져. 내가 목적했던 곳, 내가 목적했던 사람에게 도달하는 법이 없어. 그리고⋯⋯.”

그는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곡식은 양반이지, 가장 어려운 것은 작위나 지위라네.”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의 말이 와닿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작위나 지위는 사람을 특정해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까?”

배달 사고가 날 여지가 없을 텐데.

“물론 지위나 작위는 사람을 특정해서 내리기는 하지. 그런데 그 특정 과정이⋯⋯. 쉽지 않다네.”

국왕은 말을 이었다.

“내가 새로이⋯⋯. 그래, 상인 하나를 귀족으로 만든다고 치세. 내가 캄포 데 스페지아에 걸어가서 아무 상인이나 붙들고, ‘오늘부터 이 사람은 무슨 무슨 백작이요’, 하면 사람들이 납득을 하겠나?”

“쉽지 않겠지요.”

“이런 종류의 포상을 내리려면 시와 때가 모두 맞아야 해.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내가 억지로 작위를 내려 버리면 받은 사람이 고생을 하지.”

가장 최근에 고생한 사람은 피사노 공작 체자레다.

“⋯⋯내 친애하는 아들처럼.”

레오 3세도 알고 있기는 했구나.

아리아드네는 거기에 가타부타 말을 얹을 처지가 아니라서 그저 곤란한 미소만 입가에 띠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건, 자리는 하나인데 그 작위를 받아갈 만한 사람이 여러 명인 경우야.”

뭐지? 설마 후계 이야기를 하는 건가? 나한테 왜 저런 이야기를 하지?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눈알을 굴리는 사이에 국왕의 이야기는 다시금 그녀가 모르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혈통과 지위로는 첫 번째 사람이 받아가야 하는데, 성취와 업적으로는 두 번째 사람이 받아가는 게 합당하다면 나는 그 하사품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가?”

대답하기 까다로운 이야기였다.

평소의 아리아드네는 단연코 후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답하면 그녀가 체자레를 지지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알폰소와 체자레의 이야기라면 혈통과 능력이 합치하는 자가 있는데 굳이 다른 후보자를 찾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레오 3세 앞에서 그의 후계자에 대해 입을 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고매하신 국왕 폐하께서 오롯이 용단을 내리실 부분이라고 생각하나이다.”

한 발짝 뒤로 뺀 고상한 어투로 전하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였다.

레오 3세도 아리아드네에게 자신의 후계 계승에 대해 의견을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더 추궁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계속했다.

“난 참 안타까워. 만약 두 번째 사람의 공이 하늘을 찔렀다면, 첫 번째 사람을 물리치고 작위를 받아갔을 텐데. 아주 요만큼, 아주 요만큼 모자랄 때는 귀띔이라도 해 주고 싶어진단 말이지.”

잠깐만. 이것은 국왕의 후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리아드네는 복잡한 심경으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이에, 레오 3세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영애의 부친에게 약속한 작위가 하나 있네.”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뜬 채 레오 3세를 바라보았다.

“금시초문인가 보군.”

레오 3세는 클클 웃었다.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성직자는 작위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제 부친이신 데 마레 추기경께 작위를⋯⋯?”

“그렇지. 성직자는 작위를 가지지 못하지. 그래서.”

레오 3세는 진한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데 마레의 성을 가진 자식에게 추기경이 받아갔어야 할 작위를 하사하기로 했어. 올해 말쯤, 그래. 거의 때가 다 됐구먼.”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무슨 거래의 대가로 작위를 받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피사노 공작위 승계에 협력하신 일로 받는 작위로군요.”

물론 데 마레 추기경이 한 것은 혈통서 위조였지만.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역시 영민해!”

레오 3세는 여러 가지 칭찬의 의미를 담아 박수를 쳤다.

“부녀자의 몸에 갇히지만 않았다면 내 영애를 크게 중용했을 것이야. 아까운지고.”

그는 크게 웃었다.

“내가 그 약속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난 당연히 데 마레 추기경의 장자에게 작위를 내리게 될 줄 알았다네.”

체자레와 꼭 닮은 물빛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쏘아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의 눈을 바라보며, 색깔은 같지만 채도가 탁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세월의 더께일까, 아니면⋯⋯.

“그리고 추기경이 영애에게는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걸 보니 추기경 역시 큰아들에게 작위를 주고자 했던 모양이야.”

그는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짐의 추측일 뿐일세. 늙은이의 추측에만 기반해서 아버지와 싸우지는 말게나. 한 가정의 평온이 나 때문에 깨진다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아리아드네는 이 와중에도 레오 3세가 참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깨질 가정이 깨지는 거고 깨지지 않을 가정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깨지지 않을 텐데.

데 마레 가문이 이번 일로 발칵 뒤집어진다면 그건 추기경이 그간 쌓아 올린 업보 탓이지 국왕이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야. 짐은 참 아쉽기도 해. 이렇게나 좋은 후보가 있는데 말이야.”

그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산 카를로의 역병 퇴치에 일조했지, 빈민들을 구휼중이지, 영애는 랑부예 구휼원만 도왔다고 겸양을 보였지만 짐은 영애가 코뮨 누오바에 식량을 뿌린 사실도 알고 있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였다.

“내 영애에게 작위를 내리게 된다면 만인이 수긍할 텐데, 그대의 오빠에게 작위를 내리게 된다면 수도가 또 한 번 자격 검증을 하겠다고 난리가 나지 않겠나?”

이폴리토는 한 게 없었다.

작년에 끓어오르는 추문의 주인공이 될 뻔한 것을 친모의 목숨으로 막은 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느닷없이 이폴리토가 귀족 작위를 수여받게 된다면 수도에선 틀림없이 수군대는 말이 퍼져 나갈 것이다.

국왕과 데 마레 추기경 사이에 뭔가 더러운 꿍꿍이가 있었다고. 그리고 그 협잡은 아마 체자레의 조카로서의 인지와 관련된 것이었을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아주 요만큼 모자라.”

레오 3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영애가 한 것은 나에 대한 충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자유분방하게. 주고 싶은 사람을 도와준 것뿐이 아닌가?”

그는 ‘제멋대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다가 ‘자유분방’으로 말을 골랐다.

“내게 조금의 변명거리를 주지 않겠나?”

“성심을 밝혀주신다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이며 레오 3세에게 청했다.

“영애가 가진 곡식을 국가에 바치시게.”

아리아드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가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작위 욕심에 눈이 뒤집어진 것인지, 가늠이 어려웠던 레오 3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영애가 하던 구휼 사업은 짐이 책임지고 국가에서 계속 꾸려나가겠네.”

어르고 달래면 통째로 먹을 수 있다.

어차피 갓 열여섯이 된 소녀일 뿐이다.

그 아비가 딱히 끼고도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 아비도 성직자일 뿐이지 권력에 위협을 주는 대귀족이거나 세력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이런 어린 여아는 살살 달래면 넘어온다. 레오 3세는 그리 믿어 마지않았다.

“곡식을⋯⋯.”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볼을 쓸며 떨어졌고, 깊은 녹색 눈이 레오 3세를 똑바로 주시했다.

레오 3세는 아리아드네를 듬뿍 칭찬할 준비를 했다.

“그래, 곡식. 곡식은 백성의 기초이자 기반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상천외했다.

“그러면, 얼마까지 알아보시고 오셨어요?”

“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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