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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1화 (221/733)

<제221화> 장사꾼의 영혼

레오 3세의 노호에, 아리아드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아니 그럼, 설마 값도 안 쳐 주시고 가져가려고 하셨던 건가요?”

여기에서 ‘충(忠)’을 설파하면 꼬락서니만 웃겨질 것을 간파한 레오 3세는 입만 뻐끔거렸다.

아리아드네는 나름의 자비를 베풀어, 그에게 발언을 강요하지 않고 레오 3세에게 그가 하고 있었던 착각들을 교정해 주었다.

“물론 폐하께서 언제든지 군사를 보내 제 곡식을 가져가실 수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누구에게든 작위를 내릴 수 있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곡식은 언제든지 강제로 가져갈 수 있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저는 제가 가진 곡식을 일차적으로는 랑부예 구휼원에, 이차적으로는 수도 안의 빈민 구역에 풀고 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제가 가진 곡식을 가져가신다면 누가 가장 우선적으로 이를 배급받게 될까요?”

아리아드네는 배꽃처럼 웃었다.

“군대겠지요.”

근위대는 두카토 금화로 월급을 받지만 이제 그들이 받는 월급으로도 일가족의 식량 구매가 어려워질 정도로 곡물가가 올랐다.

귀족가 출신이 많은 기사단은 가문의 재력으로 버틸 여력이 있겠지만, 보병단은 이제 슬슬 무리였다.

근위대 대상으로만 염가에 곡식을 풀어주거나, 배급량을 지정하거나 할 필요가 있었다.

“군대 몫을 빼 주느라 구휼원과 빈민가의 몫이 빠진다면 어디서 가장 먼저 원성이 들리겠습니까?”

아우성을 치기로는 직접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빈민과, 빈민 구휼에 앞장서는 교계가 맨 앞일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면 괜찮다. 한 줌이니까.

그러나 곧, 그다음 차례는 자기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대의명분을 놓친 군주의 말로는 항상 그랬다.

“상인 나부랭이들은 사실 금화만 쫓아도 욕만 먹고 말지 큰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게 상인의 본질이니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평소에도 욕을 푸지게 먹지 않습니까. 분할 지불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나라님은 경우가 다르지요.”

국왕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의 최종 책임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평성대가 왔을 때에도 칭송을 받지만, 잘못 없이 민생이 힘들어진다면 그 원망 또한 한 몸에 오롯이 받아내야 한다.

하물며, 나라님이 관여해서 내 생활이 힘들어졌을 때 참을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공권력은 지고 있는 무게가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앞장서서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요. 그게 백성이 바치는 충성의 대가입니다.”

사실 아리아드네가 구휼원과 빈민가에 풀고 있는 물량은 그녀가 들고 있는 총 수량에 비교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다.

레오 3세가 전량을 압수해 가더라도 구휼원과 빈민가의 몫을 건드리지 않고 충분히 군대에 배급할 양이 나왔다.

하지만 레오 3세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에게는 전생에서 갈고 닦은 숙련된 블러핑 기술이 있었다.

“제가 구휼원에 식량을 그만 보내게 된다면, 그건 괜찮습니다. 소녀가 사재를 털면서 최대한 노력하다가 여력이 닿지 않아 더는 못 보내게 된 거니까요. 하지만 국왕께서 제 곡식을 가져가신 후에 배급을 멈춘다면? 아니, 하다못해 줄인다면?”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당하지 못하실 겁니다.”

숫제 협박이었다.

그녀는 가급적이면 권력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빨을 드러낼 때에는 드러내야 했다.

권력이 그녀의 기반을 통째로 먹겠다고 위협할 때.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 이 고얀!”

그리고 레오 3세는 상대방이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영애가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내가 군사를 보내지 못할 것 같은가?”

그는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항상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는 입장의 사람으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기세등등하게 한 나라의 국왕에게 설교를 하는구나! 입만 살아서는!”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물론, 존경하옵는 국왕 폐하께서는 저를 투옥하실 수도 있고 제 목을 치실 수도 있나이다.”

뒷배 없는 블러핑은 하수들이나 치는 것이다. 그녀는 준비를 다 하고 왔다.

“하오나 제 곡식을 가져가시긴 힘들 것입니다.”

“무엄한지고!”

“곡식을 원하시는 높으신 분들은 국왕 폐하뿐만이 아니셨습니다. 폐하보다 더 발 빠르신 분들도 있었지요.”

레오 3세의 표정에 비로소 경각심이 깃들었다.

“아세레토 공국의 대공과, 포르토 공화국의 7인 위원회가 저에게 접촉을 해 왔습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세레토 공국에서는 1 칸타로 당 5 두카토, 포르토 공화국에서는 6 두카토 불렀습니다.”

“허!”

자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마어마한 액수에 레오 3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으르렁대며 본색을 드러냈다.

“영애. 그들과 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네.”

레오 3세가 이빨을 드러냈다.

“바로, 영애와 영애의 곡식은 내 영토 안에 있다는 사실이지.”

레오 3세는 내키는 대로 군사를 보낼 수 있고, 그들은 타국 영토 내에서 자유로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몰수’는 레오 3세만이 지니고 있는 권능이었다. 눈앞의 발칙한 계집도 그 사실을 알야 할 것이다.

“국왕 폐하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 위에 있는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레오 3세는 저 소녀가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압수하실 수 있는 것은 폐하의 신민인 ‘제’ 곡식일 뿐이지, 아세레토 공국이나 포르토 공화국이 이미 사간 곡식은 아니지요. 그건⋯⋯. 나름 외교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뭐라고!”

레오 3세는 찻잔에 놓여 있는 티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무어 제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최고급의 자기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자기들끼리 부딪혔다.

“이미 팔아버렸단 말인가! 이 고얀⋯⋯!”

“아직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세 시에서 15분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제가 앞으로 30분 안에 왕궁 밖으로 나가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아리아드네는 다시 시선을 레오 3세에게로 옮겨 산뜻하게 웃었다.

“제 대리인이 저 대신 두 나라의 대표와 계약서에 사인을 할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폐하. 저도 매국노는 아니랍니다. 곡식을 국외반출하는 것보다는 저도 가급적이면 같은 말을 쓰는 우리 백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0 두카토 대 6 두카토의 대결이라면 제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져요. 저도 이거 사서 모은 곡식입니다. 원가가 있다고요.”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카루소 대표가 할 만한 대사인데.’

뭐, 일일 장사꾼이 되어 곡식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저도 당연히 있습니다. 1 칸타로 당 4 두카토에 2만 칸타로를 드리겠습니다. 엄청난 염가입니다.”

포르토 공화국이나 아세레토 공국이 사가기로 한 가격에 비하면 바겐세일이었다.

그러나 월초에 이미 계약한 체자레 공작은 1 칸타로 당 1.25 두카토에 이미 계약을 체결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시세는 오르는 거니까.’

아리아드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물론, 제가 30분 안에 제 대리인과 만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그보다 늦으면⋯⋯. 드릴 곡식이 남아 있지 않겠군요.”

레오 3세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꽃놀이패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는데 완전히 낭패였다. 눈앞에 있는 맹랑한 것은 거기에 불을 질렀다.

“아, 혹시 외교 마찰이고 나발이고 군사를 보내 압수하실 생각이라면 빨리하셔야 할 거예요. 물량 대부분을 넘기기로 한 상대는 포르토 공화국인데요.”

포르토 공화국은 전 대륙에 상인들을 파견해 놓았으며 상시로 대선단을 운용하는 국가다.

“포르토 공화국 판매분은 계약서 사인 직후 바로 배로 옮겨가기로 되어있습니다. 오늘 자정 전에 우리 국경 밖으로 나갈 거예요.”

창고를 운하에 직면한 곳으로 계약하길 잘했지, 라며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레오 3세를 피해 식량을 반출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레오 3세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분노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어린 영애를 앞에 두고 추태를 부리기도 뭐했고, 지금 제안된 곡식이나마 잡아야 할지 고민도 되는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고려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른 꿍꿍이도 있었다. 굴을 여러 개 파놓는 것은 레오 3세의 주특기였다.

“⋯⋯거기 누구 없느냐.”

“예, 폐하.”

왕궁 시종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레오 3세 옆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왕궁 법률가를 당장 데리고 와라. 계약서를 작성해야겠다.”

한 발 전진을 위한 한 발 후퇴였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를 제지했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 지금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지금 나가야 대리인에게 연락이 가능할 것 같아서요.”

레오 3세는 이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임계점에 다다른 것을 본 그녀는 이제 빈정거리는 태도를 싹 갈무리하기로 했다.

시종 앞에서 레오 3세의 심기를 일부러 박박 긁을 필요도 없었고, 이제 위협은 끝났기 때문이다.

“대 에트루스칸 왕국의 신민으로서 국왕 폐하의 말씀이면 족하지, 굳이 그것을 당장 서면으로 남길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국왕의 체면도 좀 챙겨 줘야지.

“천천히 작성해서 보내 주십시오. 폐하께 약정한 수량만큼은 계약서 없이도 제가 조달하여 확보하고 있겠나이다.”

하지만 이건 못 참지.

“다만 계약금은 1할만큼만 준비해서 먼저 보내 주십시오.”

레오 3세는 찻잔을 던질 뻔한 스스로를 가까스로 다스렸다.

그녀는 웃으며 청했다.

“폐하께서 윤허해 주신다면 저는 먼저 일어서서 일 처리를 할까 합니다.”

“⋯⋯가 보거라.”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아리아드네는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레오 3세와의 일은 대충 잘 해결했지만 아리아드네에게는 새로운 할 일이 생겼다.

‘작위를 내린다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레오 3세의 말이 옳았다. 그 작위의 주인은 십중팔구 이폴리토일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아리아드네는 아직 이폴리토의 출생의 비밀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타란토로 사람을 내려보내 꼼꼼하게 과거 일을 파헤치고 물증을 손에 넣으려 했지만, 역병이 발발하는 바람에 물리적인 이동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있는 것으로라도 어떻게든 해 봐야겠어.’

타초경사(打草警蛇)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모든 일에는 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산차.”

“예, 아가씨.”

“발데사르 가에 내 편지를 보내.”

“줄리아 아가씨께 보내면 될까요?”

“아니, 라파엘 소후작께. 내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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