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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3화 (223/733)

<제223화> 동족 혐오

“이야기 좀 하자.”

왕궁에서 돌아온 데 마레 추기경의 첫 마디에, 아리아드네는 직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녀는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버지?”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도 만만찮은 고수였다.

“그간 집안일을 네게 전적으로 맡겨놓았었는데, 어린 여식에게 지우기엔 무거운 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자상하게 말했다.

“그간 어떻게 꾸려왔는지 한 번 보고, 가르칠 건 가르쳐주마. 장부를 가져오련? 아비 서재에서 같이 보자꾸나.”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리아드네는 이 말만 듣고도 데 마레 추기경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파악했다.

레오 3세는 십중팔구 곡식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데 마레 추기경은 그 곡식에 숟가락을 얹을 방도를 찾는 중일 것이다.

아리아드네에게 돈이 없을 테니 곡식을 사 모은 밑천은 집안 돈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장부를 같이 봐 주는 척하면서 유용한 항목을 찾아내 바치라고 협박하게 하려는 속내였다.

서운하면서도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서운한 것은, 아버지에게 일말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리아드네는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새삼 기대를 하는 것도 우습다.

루크레치아 시절에는 ‘루-크-레-치-아!! 장부를 가져와!!’로 밥 먹듯이 장부를 검사하던 데 마레 추기경이었는데, 조미료라도 뿌리며 대화를 시작하는 걸 보니 그간 내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컸다고 생각하고 치워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아버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서재로 부르기 전에 장부를 가지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은 좋은 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안 그래도 자기의 서재에서 장부 외에도 아버지에게 가져갈 것이 한두 가지 더 있었다.

예컨대 졸업장, 같은.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사진의 서재로 향하기 전에 산차를 불러 그녀에게 귓속말했다.

“⋯⋯를 모셔와.”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내가 부탁했더라고 전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증거들은 서증으로 보는 것보다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것이 훨씬 충격이 큰 법이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딸을 앞에 앉혀놓은 채 회계장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리아드네는 마치 고문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기서 50여 페이지를 더 넘기면 그녀가 데 마레 가문의 예산 5000 두카토를 빼서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에게 융통했던 내역이 나온다. 물론 이미 다 채워 넣기는 했지만.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아버지. 다 보실 동안 전 밖에 나가 있을까요?”

거의 한 시간 가깝게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에 앉아 있던 아리아드네는 더는 참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추기경에게 물었다.

추기경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담당자를 앞에 앉혀놓은 채 그의 업무를 헤집는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이 아랫사람을 길들일 때 쓰는 수법이었다.

아무 말 없이 검토만 하더라도 아랫사람은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별말 없이도 사람 길들이기 딱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의 차녀는 ‘일 없으면 전 나가보겠다’라고 하다니, 애가 철이 없어서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중이거나, 데 마레 추기경이 두렵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건 장부 뒤지기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 마레 추기경이 탁, 소리를 내며 장부를 덮었다.

“아니. 이건 나중에 마저 볼 테니. 이야기부터 하자꾸나.”

아리아드네는 화사하게 웃었다. 추기경은 저 웃음이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데 마레 가문의 사생아 둘째 딸이 아니라, 팔라지오 카를로의 임시 섭정공비로 일할 때 몸에 뱄던 여유였다.

“⋯⋯네가 몹시 큰 규모로 곡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수도에 들린다.”

“수도 특유의 과장이겠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겸손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한 번쯤 겸양을 떠는 것은 예의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국왕 폐하께서 직접 언급을 하실 정도이더구나. 대체 그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느냐?”

데 마레 추기경은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으로 훅 들어왔다.

아리아드네의 미소에 기분이 상한 그는 더는 딸을 배려하지 않았다.

주변 이야기를 하며 양념을 치는 것은 덜 친한 사람,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람,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다.

추기경의 생각에, 아리아드네는 그 셋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흔들리지 않고 추기경의 질문을 버텼다.

“정확한 규모가 왜 중요할까요? 당분간 구휼원을 먹일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다 거기에 쓸 거예요.”

“아리아드네.”

추기경의 녹색 눈이 좁아졌다.

“너는 작년 초에 무일푼으로 베르가모 농장에서 산 카를로로 올라왔어. 네 어미⋯⋯.”

습관적으로 루크레치아를 칭한 추기경은 입을 다물었다.

루크레치아는 더 이상 집안의 안주인도 아니고, 아리아드네의 엄마도 아니다.

“⋯⋯루크레치아가 생활비 가지고 너에게 치사를 떨던 걸 내가 다 막아주었지.”

‘다는 아니고요.’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했던 일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데 마레 추기경 개인의 악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악덕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 정도 크레딧은 주기로 했다.

추기경이 계모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둘째 딸을 일정 부분 지켜준 것은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네 개인 재산은 돌아가신 왕비 폐하의 희사품과 약간의 두카토 금화 빼고는 없어. 그런데 이 큰 부가 다 어디서 왔을까? 그것도 집안 장부를 네게 맡긴 이후로 일궈진 부로구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차녀를 바라보았다.

“내 네가 집안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가는 것 같아 그간 별다른 말은 안 했다만.”

추기경은 본론을 던졌다.

“네가 부를 일군 원천이 집안 재산이라면 네가 벌어온 것도 결국에는 집안 재산 아니더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집안 재산이라면 그 규모를 내가 아는 것이 마땅하다. 필히 곡식 관련한 장부도 있겠지. 장부를 내놓거라.”

아리아드네는 그 앞에 꼿꼿이 서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추리였어요,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갔다.

“하지만 곡식을 산 밑천은 데 마레 가문의 재산이 아닙니다.”

“뭐라고?”

“제게 왕비 폐하의 희사품 외에는 다른 재산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씀이에요.”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로 들어올 때 커다란 상자 하나를 함께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 상자 뚜껑을 열어, 오늘의 무기 중 첫 번째를 꺼내놓았다. 눈부신 휘광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이건⋯⋯. ‘푸른 심해의 심장’ 아니냐?”

아리아드네가 7만 두카토를 융통하는 조건으로 카루소 대표에게 맡겼던 ‘푸른 심해의 심장’이었다.

그녀는 곡식 판매로 인한 자기 몫의 수익이 7만 두카토를 넘기자마자 그 액수를 카루소 대표에게 정산해주고 ‘푸른 심해의 심장’을 되돌려 받아왔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목줄을 죌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모두 제거해둬야 한다.

“예, 아버지, ‘푸른 심해의 심장’입니다. 명실상부한 제 개인의 재산이지요.”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가 왜 이 목걸이를 꺼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목걸이를 팔아서 곡식값을 댔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목걸이는 여기 있지 않은가!

아리아드네는 이내 데 마레 추기경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저는 이 목걸이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을 밑천 삼아 지난봄부터 전국의 밀을 수매했어요.”

“네가 정녕 미쳤느냐?! 국왕의 눈을 어떻게 속이려고⋯⋯!”

데 마레 추기경은 기겁했다. 이 사실이 레오 3세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가뜩이나 아리아드네를 손대려고 핑계를 찾고 있는 와중일 텐데, 이게 국왕에게 알려지면 국왕모독죄로 무리해서 그녀를 투옥하는 것 같은 짓거리를 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놀라지 않았다.

“여력이 생기자마자 되찾아 왔습니다. 관련 서류들은 모두 소각했어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저에게 여러모로 빚을 지고 있지요.”

엄밀히 따지자면 인질을 잡고 있다.

아리아드네는 아직 페트루치아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저라고 안전하게 가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르그리트 왕비의 서거 전에,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백성 구휼을 위해 밀을 수매하고 싶은데 집안 재산을 써도 되냐고.

“정확하게는 1000 두카토까지는 써도 된다고 말씀 주셨었죠. 제가 동원하게 된 돈의 1푼 정도는 될까요? 참고로 그건 창고 대여비에 보태 썼습니다.”

그 정도는 아리아드네도 집에 토해낼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선은 거기까지였죠. 결국 제가 알아서 금전을 융통했고 제가 알아서 사 모았습니다. 결국, 제가 가진 곡식과 그 곡식을 판매한 돈은 오롯이 제 개인 재산입니다. 제가 만든 저만의 재산이요.”

“허!”

데 마레 추기경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가문의 비호 없이 그 재산을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리아드네는 서재 책상 위에 놓인 눈부신 사파이어의 광채를 눈으로 훑으며 천천히 답했다.

“어려웠겠지만, 어떻게든 해내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장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실직고할게요, 중간에 5000 두카토 정도는 잠깐 빌려 썼어요. 물론 다 채워 넣기는 했습니다만. 6000 두카토 만큼은 데 마레 가문의 수고가 들어가 있지요.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거기에 합당한 사례는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최종 수익금은 제 재산이에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로 무슨 그림을 그리시는 건가요?”

데 마레 추기경은 계산속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노호를 터트렸다.

“네가 가문에 있는 한 네 생활과 지출은 가주의 명을 따라야 해!”

하지만 그의 차녀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결혼해서 나가면 될까요?”

“하!”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데 마레 추기경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홀라당 남의 집으로 뺏기게 된다니!

그는 강 대 강으로 재차 딸을 윽박질렀다.

“가주의 명 없는 혼인은 무효라는 사실을 모르느냐?”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허락 없는 혼인은 축복받지 못했고, 그 부친이 딸을 데려간 집에 정식으로 항의하면 혼인을 무르고 딸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딸려갔던 재산도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

“국왕 폐하의 명이 있다면 가주의 명 없이도 결혼할 수 있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물론 레오 3세가 아리아드네에게 혼처를 지목해주진 않을 것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원하는 상대와는 더더욱. 그녀가 원하는 남자는 바다 건너 전쟁터에 있다.

좀 더 현실적인 선택지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게다가, 부친의 ‘회수권’은 허락 없이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있으면 없어지지 않습니까?”

야반도주하는 커플들이 애부터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식이 태어날 때까지만 숨어 살면 그들은 완전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이냐!”

언제나 평온한 데 마레 추기경도 여기에서는 못 참고 책상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지금 아비 앞에서 아무 놈팡이나 붙들고 집을 나가겠다고 협박하는 게야!”

“집안에서 제 자리를 만들어주시지 않으니까 제가 궁여지책이라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아리아드네의 언성 역시 높아졌다.

“아버지, 저를 자식으로 생각하기는 하시나요?”

“뭐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의 공격에 데 마레 추기경은 이상한 표정으로 딸을 노려보았다.

“내 너를 먹이고, 입히고, 수도로 데려와 번듯한 귀족 가문의 여식처럼 키웠다.”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사생아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었다.

추기경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극상이자, 은혜를 모르는 항의였다.

“난 너를 평생 베르가모 농장에 버려둘 수도 있었어! 당연히 널 내 자식으로 생각했으니 보살핀 것이지, 이제 와서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냉담한 목소리는 풀리지 않았다.

“국왕 폐하와의 독대 자리에서, 폐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본인께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약속한 작위가 하나 있다‘고요.”

데 마레 추기경의 이마에 지렁이처럼 굵은 주름이 갔다.

“올겨울에 하사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귀띔조차 없으셨고요. 그 말인즉슨.”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는 그 작위를 제가 아닌 이폴리토 오빠에게 주실 생각이라는 것 아닙니까?”

험악하게 인상을 짓고 있던 데 마레 추기경은 여기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아리아드네는 미간을 찡그린 채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직전에 제 아비가 짓고 있던 인상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부녀가 짓고 있던 표정이 삽시간에 서로 바뀌었다.

“그것 때문이었느냐? 네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

데 마레 추기경은 웃음기를 갈무리하고 딸에게 말했다.

“너는 딸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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