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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4화 (224/733)

<제224화> 삼자대면 (1)

데 마레 추기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의 차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 그런지,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너는 시집가면 끝이지 않느냐. 가문을 잇는 것은 결국엔 아들이야. 내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데 마레 추기경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드리 자라난 감탕나무 이파리가 정원을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가문은, 저 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집안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뿌리가 있어야 거기서 뻗어 나갈 가지와 나뭇잎도 융성할 수 있는 게야!”

아리아드네는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이폴리토가 뿌리고, 내가 가지렷다. 아니, 나뭇잎인가?

그녀는 반문했다.

“뿌리가 제대로 된 뿌리가 아니라면 어떻게 됩니까?”

“뭐라고?”

“아버지께선 나무를 크게 키우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뿌리가 썩었다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이폴리토의 자질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폴리토가 못 미더워 보인다는 이야기지? 네 눈엔 그렇게 보일 수 있지. 인정한다.”

깔끔한 수긍이었다.

“이폴리토는 아직 보여준 게 없지. 학교를 갓 졸업하고 돌아왔을 뿐이고, 뭔가 지위를 맡거나 혼처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두각을 나타내는 너보다 객관적으로 못해.”

그는 차가운 녹색 눈으로 말을 이었다.

“증명 여부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보기엔 사실 판단력도, 이해력도, 이폴리토가 떨어진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사벨라도 이폴리토보다는 낫지.”

자기를 편애한다 믿었던 아버지의 냉정한 평가였다.

이폴리토 본인이 들었다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자기 방에 처박힐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좀 썩었어도 뿌리는 뿌리다. 뿌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어! 나뭇잎을 흙에 꽂는다고 나무가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조소했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썩었어요.”

이건 이폴리토가 조금 무능하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양심이 없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쥐여주면 결코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친애하는 이폴리토 오라버니는 파두아 대학의 군사학 학사라고 했지요?”

데 마레 추기경이 한쪽 눈썹 끝을 추켜올렸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졸업생 대표로 축사를 읊을 예정이라고 했고요.”

“그렇지.”

“그래서, 이폴리토 오라버니가 결국 파두아로 돌아갔나요?”

축사 낭송을 하지 않았다는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리아드네, 네가 네 오빠에게 불만이 많은 건 알겠지만 그 정도는 지엽적인⋯⋯.”

“아버지께서는 오라버니의 졸업장을 보신 적이 있나요?”

없었다.

“⋯⋯이폴리토는 파두아에서 학사 거부 사태가 일어나서 졸업장 발부가 늦어진다고 했어.”

“믿으세요?”

데 마레 추기경은 차갑게 딸의 말을 끊었다.

“아리아드네.”

그는 딸의 이야기를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게 크게 실망했다. 증거도 없이 남을 모함하는 건 섣부른 짓이야.”

그는 근거 없는 주장을 가장 싫어했다. 그게 타인을 헐뜯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난 네가 이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일 줄 알았어.”

절체절명의 이득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아야 진정한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렇게 믿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추기경은 딸에게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다.

“이제 나가⋯⋯.”

- 탁.

그가 입을 연 것은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상자에서 두 번째 물건을 꺼내 추기경의 책상 위에 놓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한 장의 양피지였다.

그는 외알 안경을 추켜올린 채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졸업장.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훌륭한 성적으로 제21기 파두아 아카데미 군사학 전공 과정을 수료하였고, 그 외 필요한 자격시험을 모두 통과하였으므로, 이에 군사학 학사 학위를 수여함.

파두아 아카데미 군사학 학장,

제로니모 데 코라지오.」

양피지 아래에는 올해 초의 날짜와, 학장의 인장 및 유려한 서명이 들어 있었다.

“이건⋯⋯.”

21기라면 이폴리토와 같은 기수였다. 아리아드네는 딱딱하게 답했다.

“파두아의 군사학교는 이미 작년 말에 졸업생 전원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졸업식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어요. 이폴리토 오라버니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으셨고요.”

아리아드네는 재차 물었다.

“아버지께서도 오라버니의 졸업장 확인 못 하셨죠?”

“⋯⋯.”

데 마레 추기경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라버니 본인께 직접 물어보죠.”

아리아드네는 추기경이 가타부타 말을 얹을 타이밍을 주지 않고 단호하게 외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집사 니콜로가 서재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예, 아리아드네 아가씨.”

“이폴리토 오라버니를 모셔와. 지금 당장.”

심상치 않은 기색에 집사 니콜로는 고개를 주억였다.

“바로 모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추기경은 심정적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느냐고 딸을 질타하고 싶었지만, 이성이 그를 멈췄다.

이폴리토가 졸업을 못 했다고 해서 바로 작위를 수여 받을 자식을 바꾸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관계 확인은 필요했다.

그는 굳이 딸에게 헛수고하지 말라는 말은 꺼내지 않은 채 묵묵히 앞만 바라보았다.

반대로 아리아드네는 칼처럼 벼려진 표정으로 제 아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팽팽한,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서재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똑똑똑.

“들어갑니다, 아버지.”

우쭐대는 목소리였다. 지금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꿈에도 모르는 채 해맑게 인사하는 이폴리토였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바로 들어온 이폴리토는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리아드네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리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아리아드네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을 뿐이다.

“이폴리토.”

데 마레 추기경이 아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하기로는, 아직 졸업장이 안 나왔다고 했지.”

졸업장 이야기가 나오자 이폴리토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 이야기가 왜 지금 나와?!

“아, 예, 예. 그랬죠.”

“지금은 도착했느냐?”

그는 눈알을 굴렸다.

“아뇨, 아직⋯⋯.”

데 마레 추기경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아리아드네와 이폴리토는 각기 초조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속내를 읽으려 주판알을 튕겼다.

추기경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양피지를 쓱 앞으로 내밀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졸업장이었다.

“네 동기들은 이미 다 졸업장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이폴리토는 양피지를 집어 들고 그 내용을 읽었다. 첫 줄에 쓰인 이름을 확인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

망할 기생오라비 새끼가⋯⋯!

이게 왜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 감을 잡은 이폴리토가 고개를 홱 돌려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미동도 없이 앞만 쳐다보았다.

이폴리토는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죽은 루크레치아를 닮아 본능적인 감이 있었다.

사내새끼가 분 냄새 풍기며 제 배다른 여동생 주변을 맴돌더니, 계집애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이딴 걸 내민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일단 이 곤경을 헤쳐나가야 했다. 이폴리토는 크게 웃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라파엘은 저보다 늦게 수도로 돌아왔으니까요! 아마 현지에서 받아서 일찍 받지 않았을까요? 파두아와 산 카를로 사이 우편은 시일이 있으니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아리아드네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폴리토가 힘겹게 쌓아 올린 텐션을 무너뜨렸다.

“제아무리 파두아가 멀다고 해도 편지 한 장이 오는 데 10개월이 넘게 걸립니까?”

라파엘의 졸업장에 쓰인 날짜는 올해 1월이었다.

지금은 11월 초순,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였다.

이폴리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너, 입조심해라⋯⋯!”

아까부터 주먹질이 몹시 하고 싶었던 차였다. 위협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대뜸 답했다.

“내가 어디 못 할 말 했나요?”

이폴리토는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해 간신히 책상 위로 들어 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게 어딜 손윗오라비한테 오만불손하게!”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이폴리토는 그 격언에 충실하게 아리아드네의 태도를 걸고넘어졌다.

“어디서 눈깔을 똑바로 쳐들고 감히 날 쳐다봐?!”

“이폴리토!”

이폴리토의 언사는 데 마레 추기경의 엄한 주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항의했다.

“아버지! 쟤가 재수 없게 굴잖아요!”

그러나 추기경은 논점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장은 배달 사고다?”

이폴리토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우기기로 했다.

“그런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라파엘한테만 주고 저한테는 안 줬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리아드네는 코웃음을 쳤다. 상식이란 단어가 엄한 곳에서 고생하네.

“이폴리토. 빠른 시일 안에 파두아로 파발을 보내서 네 졸업장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서 나에게 보고해.”

데 마레 추기경의 말에, 이폴리토와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동시에 뭉개졌다.

“예?”

“10개월이나 졸업장 수여가 늦어지는 건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 아직까지도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니 이 아비는 좀 실망스럽구나.”

날카로운 추기경의 녹색 눈빛에 이폴리토가 고개를 떨궜다.

“아⋯⋯.”

“이렇게 나태해서야 어찌 좋은 가주가 되겠느냐?”

가주.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졸업장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을 별생각 없이 당사자인 이폴리토에게 맡겼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졸업장 배송오류까지 직접 뒤를 닦아줘야 하냐’가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입장에서는 저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입으로는 이폴리토를 질타하는 것 같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빈틈이 너무 많다.

그녀가 아는 이폴리토라면 바로 졸업장부터 하나 위조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흑사병이 창궐하는 시대였다.

설령 이폴리토가 범법에 손을 대지 않고 상식적인 절차에 따라 일처리를 하기로 했다고 치더라도, 파두아로 전령을 보내고, 학장을 찾고, 졸업장을 수소문하고 등등에 들어가는 시간은 최소 두세 달, 길면 반년까지도 걸릴 것이다.

국왕이 내릴 작위의 행방은 늦어도 두 달 안에 결판이 날 텐데 말이다.

이건 이폴리토가 시간을 끌기만 해도 이기는 게임이다. 그녀는 질 수 없었다.

“아버지.”

아리아드네의 말에 데 마레 추기경과 이폴리토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들으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지?”

“현장에 있던 사람에게 직접 들으시죠.”

아리아드네는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제 입으로 들으셔 봤자 안 믿으실 것 같아요.”

- 짝!

그녀가 손뼉을 쳤다. 기척을 알아챈 서재 문이 재차 열렸다.

집사 니콜로였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여쭸다.

“아리아드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응접실에 계신 손님을 모셔와요.”

“어느 분을⋯⋯.”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발데사르 소후작님께 제가 위층에서 청한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즉시 모셔오겠습니다.”

집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폴리토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그⋯⋯. 그 새끼는 왜?”

“오라버니.”

아리아드네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폴리토를 불렀다.

“오라버니, 졸업 못 하셨잖아요.”

데 마레 추기경의 눈썹이 정수리에 닿을 듯이 올라갔다.

“기말고사 성적이 없어서 전공 과정 수료도 못 하셨고 시험 통과를 못 하셨으니 당연히 졸업장 받을 자격도 없다고 하던데요.”

이폴리토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심호흡했다. 그는 간신히 숨을 쉬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 희멀건 한 사기꾼 새끼가 너한테 그러든?!”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그딴 음해를 듣고 와서 감히 네 친 오라버니를 모욕하려고! 넌 도대체 누구 편이야? 날 네 오빠로 생각하기는 해? 요새 좀 잘 나간다고 완전 오만불손해져서, 이걸 아주 그냥 확!”

- 똑똑.

그때 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서재의 문이 열리고, 집사 니콜로가 민망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라파엘 데 발데사르를 뒤에 달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라파엘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멀건 한 사기꾼 새끼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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