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5화 (225/733)

<제225화> 삼자대면 (2)

“발데사르 후작의 자제분이군.”

떨떠름한 표정으로 데 마레 추기경이 먼저 인사했다.

발데사르 후작의 아들이라 예를 갖췄다기보다는, 방 안의 상황이 워낙에 난장판이라 무슨 말이라도 해서 상황 정리를 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아주 어릴 때 보고는 처음이지? 그쪽에 앉으시게.”

“추기경 예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라파엘은 희멀건 사기꾼 새끼 소리를 듣고도 전혀 표정을 구기지 않은 채 방글방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삽시간에 봉변을 당한 이폴리토만 어찌할 줄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이 광경만 본다면 누가 폭언을 한 거고 누가 폭언을 들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데사르 소후작님.”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호칭이 이리 딱딱했나요, 아리.”

라파엘은 눈까지 곱게 접으며 답했다. 아리아드네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보다도 더 동요한 것은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이폴리토는 자신의 심증이 확인된 사실에 분개했다.

역시,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우리 집 사생아에게 잘 보일 욕심에 자기 아카데미 동기를 팔아넘기기로 한 것이 틀림없다.

데 마레 추기경은 당당한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발언에 순식간에 주판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 친구 지금, 사윗감 후보라고 얼굴도장 찍으러 온 건가?

아리아드네는 이 애매한 야릇한 분위기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애초에 데 마레 추기경과 이폴리토를 앞에 앉혀놓고 진지한 해명을 하는 것도 우습다. 아니, 해명을 할 게 없는데.

“라파엘. 오늘 당신을 이렇게 청한 것은, 면구스럽지만, 파두아의 군사학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여쭙기 위해서예요.”

“아아. 그 일 말이로군요.”

라파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폴리토는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 안쪽의 피부를 씹었다. 아리아드네는 질문했다.

“파두아 군사학 아카데미의 제21기 학생들은 이미 졸업을 다 했나요?”

데 마레 추기경의 눈이 라파엘을 쫓았다. 이폴리토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거운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라파엘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자격이 되는 자는 전원 졸업했습니다.”

이폴리토는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라파엘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21기의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 졸업식도 있었고, 졸업장 수여도 끝났지요.”

라파엘은 붉은 눈동자로 이폴리토를 흘깃 곁눈질했다.

“아직까지도 졸업장을 수여 받지 못한 학우가 있다면⋯⋯. 졸업을 못 한 겁니다.”

“⋯⋯발데사르 군.”

이폴리토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데 마레 추기경이 먼저 끼어들었다.

“졸업장 수여와 졸업장 전달은 다르지 않나?”

반쯤은 라파엘 데 발데사르 앞에서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는 제 자식이 안타까웠기 때문이고, 반쯤은 이폴리토가 급발진을 해서 손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추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라파엘은 방긋 웃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추기경 예하.”

“졸업장이 단순하게 배달 사고가 난 거라면⋯⋯.”

이폴리토에게 빨리 파두아에 연락해 없어진 졸업장을 받아 오라고 채근하고 이 사태를 마무리 짓고 싶어진 추기경이 운을 띄웠다.

하지만 발데사르 가의 아들은 데 마레 가문 아버지의 꿈과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이미 수여된 졸업장이 배달 사고가 났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친애하는 제 입학 동기, 이폴리토 데 마레 군의 경우에는 아닙니다.”

이폴리토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성미 같아서는 ‘이게 무슨 헛소리야 발데사르―!!!’ 라며 호통을 치고도 남았지만,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그 뒤에 나올 폭로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폴리토의 순응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은 봐주지 않았다. 그의 폭탄선언이 결국 터졌다.

“이폴리토는 기말고사를 치지 않았어요.”

추기경이 경악한 표정으로 이폴리토를 쳐다보았다. 라파엘의 폭로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당연히,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요. 졸업요건은 물론이요, 수료요건 충족도 못 했습니다.”

“이, 이폴리토!”

추기경의 머릿속에서 이폴리토의 변명 몇 가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제가 학생 대표로 학사일정 거부를 조직했어요. 저희 과는 단체로 기말시험을 안 쳤습니다.”

- “제가 우등 졸업에 인기투표로 졸업식 축사를 읊게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는요.”

- “어머니 아들이, 어머니가 곤란을 겪고 계신데 어떻게 파두아에 앉아서 자기 공부에만 신경을 씁니까.”

“정말로 기말고사를 안 친 게냐?!”

이폴리토는 기말시험 거부를 했다고 했으면서, 기말시험을 치러 파두아로 돌아가 봐야 한다던가, 기말시험이 면제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녀와 시시덕대며 놀다가 타란토로 겨울 파티를 즐기러 떠나버렸을 뿐이다.

아리아드네가 밝은 눈으로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파엘, 파두아 시가 파두아 대학에 세금을 매기기로 해서 학생들의 단체 학사일정 거부가 있었다는 건 사실인가요?”

“하하하하!”

라파엘은 크게 웃었다.

“그런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이 어디 예전 같나요? 이야기는 좀 있었지만 흐지부지됐고 다들 시험 날짜가 되자 기말고사를 치러 얌전히 시험장에 들어갔지요.”

“⋯⋯이폴리토.”

데 마레 추기경이 엄중하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폴―리―토!!!가 터지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손님이 있는 것을 감안해서 누르고 누른 반응이었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 기말고사를 안 친 것은 맞아?”

얼굴이 시뻘게진 이폴리토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4 피에디 2 디토(약 182cm)나 되는 거한이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자 그 꼬락서니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그는 여물을 씹는 소처럼 우물거리며 답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도외시하고, 바로 옆에 라파엘이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무시한 채 아버지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어머니께서 집에서 쫓겨나서 베르가모 농장에 감금당하셨다고⋯⋯. 매일 집에서 편지가 오는데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매달릴 상대는 데 마레 추기경뿐이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사교계에서 뭐라고 입을 털고 다니든, 밉살스러운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얼마나 눈을 부릅뜨고 그를 감시하건, 결국에 이폴리토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 혼자다.

“기말고사를 치지 않았다고 어머니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때 집안 분위기가 너무 살얼음판이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이폴리토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호화로운 자주색 공단 바지를 점점이 적셨다.

“⋯⋯저라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폴리토는 흐느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메꿀게요⋯⋯.”

라파엘은 이폴리토가 대학 생활 내내 몹시 불성실했으며, 코라지오 학장이 그에게 준 리포트로 기말고사를 대체하는 옵션 역시 무시해서 학장이 크게 분노했고, 유학생들 사이에서 연초 밀매로 악명을 떨쳤다는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었으나 이폴리토가 도저히 그럴 짬을 내주지 않았다.

그가 가여운 소처럼 몸을 떨면서 계속 아버지 앞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어머니가 그리워요⋯⋯.”

그리고 그 앞에서 죽어버린 루크레치아를 생각한 추기경의 표정도 누그러지고 있었다.

루크레치아. 생각이 짧고 성격이 급하긴 했지만 정이 많고 착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애들 엄마였다.

죄책감은 강렬한 감정이었다.

“이폴리토⋯⋯. 얘야⋯⋯.”

추기경은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흐느끼고 있는 이폴리토의 손을 잡았다.

이폴리토는 죽은 애들 엄마가 남기고 간 금쪽같은 아들이었다. 그들이 함께했던 세월이 자식에게 묻어 있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단다. 실수에 대가가 따르기는 한다만⋯⋯.”

이폴리토는 더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 대가를 치르고 나면 다시 한번 시도해 볼 수 있는 게야.”

서재가 부자간의 신파극으로 흐르고 있었다. 외부인인 라파엘로서는 참 불편한 자리가 되었다.

이 상황을 정리한 것은 착 가라앉은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였다.

“라파엘.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제 몫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바래다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축객령이었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네, 여기 더 계시면 가족의 치부를 너무 많이 보여드리는 셈이 되겠어요.”

라파엘은 가볍게 웃으며 생각했다. 치부요? 볼 건 다 본 거 같은데요.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말한 치부는 이폴리토의 졸업 실패라던가, 사랑하는 어머니 루크레치아를 잃은 가족의 상실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두 번째 손님을 만나보셔야 하겠어요.”

흐느끼는 이폴리토를 토닥이던 추기경의 목소리에 드디어 짜증이 섞였다.

“아리아드네, 거기까지 해!”

데 마레 추기경은 화가 나는 것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차녀는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도무지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이만큼 했으면 충분해! 넌 네 오라비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셈이냐!”

추기경은 세상을 항상 강 대 강 대치로 보았다. 바깥세상은 무한 경쟁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고 뜯었고, 남의 뒤통수를 쳤고,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더러운 인세에도 구원이 있었으니, 그것은 가족이었다. 가족은, 그리고 그 확장인 하나의 가문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

등을 맡길 수 있는 것이 가족이었다. 고아였던 그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한평생 가족과 가문의 울타리를 가진 사람들이 극도로 부러웠고 자기 대에는 그런 울타리를 꼭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제 자식 농사가 이따위라니! 하나는 무능하고, 하나는 사치스럽고, 하나는 가족의 등에 칼을 꽂는다!

“네가 제일 나빠, 아리아드네!”

추기경은 이성을 잃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 너를 어떻게 가르쳤어, 내 너희들을 어떻게 가르쳤어! 이 험한 세상에 나 죽고 나면 너희들만 남는다! 너희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그 알량한 이득 한 줌 얻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면 끝이 어떻게 될 줄 알아!”

‘못 들을 걸 듣게 된 건 맞네.’

라파엘은 이게 아리아드네가 말한 가문의 치부인가, 라고 생각하며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를 떠났다.

방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지만 아직 덜 닫힌 문 사이로 추기경의 노호가 그대로 들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라파엘은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사람은 이폴리토 오빠예요.”

- 달칵.

* * *

데 마레 추기경의 눈이 커졌다. 눈물이 번져 있던 이폴리토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아리아드네는 냉정하게 그 둘을 노려보았다.

루크레치아가 평민 여자를 죽였다고 그 평민의 아비가 길길이 날뛰니 가문 전체가 ‘왕궁 법정’에 끌려가기 전에 루크레치아를 죽여 없애자고 결정한 것은 데 마레 추기경, 본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마음을 바꿀 것을 미리 알고 직접 독약을 들고 루크레치아의 입에 들이민 것은 아리아드네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살인자는 결정을 내린 데 마레 추기경도, 독약을 루크레치아의 손에 쥐여주고 음독을 부추긴 자신도 아닌, 루크레치아가 끔찍하게 사랑했던 이폴리토라고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추기경은 황망하게 물었다.

대답은 그의 딸이 하지 않았다.

- 똑똑똑.

노크가 울렸고, 방문이 열렸다.

“보카네그로 대표의 카루소 대표님 오셨습니다.”

응접실에 있다던 두 번째 손님이었다.

답은 이 남자가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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