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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27화 (227/733)

<제227화> 완벽한 자식은 없다

데 마레 추기경을 위시한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부두 노동자에게 집중했다.

그는 관심이 어색한지 뒷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주문이 하도 특이해서 기억합죠.”

그는 이폴리토가 연초 밀무역을 하는 친구를 통해 접선한 부랑자 중 하나였다.

이폴리토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반대로 이폴리토는 부랑자의 인상에 똑똑히 남았다.

“보통 죽여달라는 얘기는 많이들 하시는데, 목을 잘라서 생선가게에 맡겨달라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걍 강물에 던져 버리라던가, 외곽에 버리라던가, 뭐 들키지 않게 하라 정도지. 아, 실내에서도 곰방대를 빡빡 피셔서 기억해요.”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답네, 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이 다른 의미인 줄 알고 변명했다.

“아, 실내 흡연은 우리 동네에서는 다들 하는데, 곰방대가 유행이 좀 지나서. 다들 궐련 피거든요.”

이폴리토는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부두 노동자에게 삿대질했다.

“모함이야!”

그는 꾀죄죄한 남자에게 덤벼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버지 앞에서 주먹질하는 추태를 보일 수 없단 마음에 간신히 이성을 잡은 이폴리토는 데 마레 추기경을 보며 호소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죽은 하녀의 목을 잘라서 생선가게에 맡겨달라고 했었던 건 수도 전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사실입니다! 누구든 이 얘기를 알고 있으니 그냥 꾸며대면 되는 이야기라고요!”

“도련님이 꽤 유명한 건 알고 계시죠?”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추기경이 인상을 찌푸린 채 부두 노동자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높으신 분의 관심을 받은 부두 노동자는 약간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저희가 그 뭐냐, 연초, 담배. 그걸 좀 팔거든요.”

그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손짓·발짓으로 담배가 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곰방대에 넣거나 말아서 피면 아주 캬, 머리 꼭대기까지 뚫리는 기분인데! 요새는 곰방대보다는 말아서 피우는 게 좀 더 유행이라―.”

추기경은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그가 하층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인생을 말아먹는 마약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는 전혀 없었다.

“본론만 얘기해.”

“데 마레 도련님께서는 유명한 유통업자셔서, 저희들 사이에선 성함이 알려져 있습죠.”

“쿨럭!”

추기경은 사레가 들려 정신없이 기침했다.

“쿨럭, 쿨럭!”

아리아드네가 서둘러 물잔을 건넸다.

그 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들이킨 추기경은 폐부 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용트림을 뱉었다.

“뭐라고―?! 이폴리토가 유통업자?!”

추기경의 격한 반응에 조금 놀란 부두 노동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 그것이, 막 아주 크게 하시는 건 아니고요, 북부 유학생들 사이에서 거래하는 물량은 다 저 데 마레 도련님을 거쳐야 한다고⋯⋯.”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부두 노동자의 친절한 설명은 추기경의 고함으로 끝이 났다.

“네놈,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카루소 대표는 이 상황을 관전하며, 아들이 사람을 죽인 것보다 담배 유통업자인 게 더 충격인 아버지가 참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했다.

‘성직자라서 그래, 성황청에서는 일체의 기분을 건드리는 약물을 유해하다고 가르치니까.

아니, 근데 캐비닛 위에 있는 건 술병인데? 아니, 근데 잠깐만. 성황서에서는 유해 물질도 나쁘지만 살인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영민한 카루소 대표마저 데 마레 가문의 가정교육 방침 때문에 혼돈에 빠져 있는 사이, 이런 괴리에 익숙한 아리아드네가 재빠르게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이폴리토 오빠가 직접 살인청부업자를 찾아서 말레타 살해를 사주했다는 말씀이시지요?”

“아, 저희가 막 살인청부업자 그런 건 아니고요.”

부두 노동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평소에는 걍 ‘무역업’을 하다가, 가끔 의뢰가 들어오면 받고, 뭐 그런 정도입니다요. 아무한테나 안 받아요! 원래 거래가 있었던 단골이 부탁할 때만 받는 거예요!”

아리아드네가 듣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그녀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연이 있어야 하는군요. 그럼 평범한 부녀자였던 어머니가 그쪽에 연락하시기는 참 어려웠겠네요.”

그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였다.

“귀부인님 뵐 일이 없죠. 저희가 다루는 것이 연초, 술, 뭐 이런 것이고 부인네들 쓰실 사치품이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결국 오빠가 주도적으로 이끈 일이로군요, 말레타 살해는?”

부두 노동자가 대답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역시 대답을 기대하고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몸을 돌려 데 마레 추기경과 이폴리토를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폴리토 오라버니는 말레타 살해를 자기가 주도했으면서, 아버지께서 일이 커진 것에 대해 어머니께 책임을 묻기로 했을 때 어머니를 위한 변명은 단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그냥 다 어머니께 책임을 떠밀었네요.”

데 마레 추기경의 염소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머니는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몰랐어요.”

아리아드네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이 데 마레 추기경을 훑었다.

“친아들이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건 더더욱 모르셨고요. 아버지도 어머니한테 안 물어보셨잖아요, 그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맞는 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흑마법 사태 이후로 루크레치아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추기경은 거기에서 약간의 회한을 느꼈다.

‘그때 내가 루크레치아에게 물어보기라도 했었으면⋯⋯.’

무의식중에 찰나로 스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런 관념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몹시 괴로웠다.

저렇게 생각하면, 루크레치아가 죽은 것은 데 마레 추기경 탓이 된다.

루크레치아의 경솔함 탓도, 이폴리토의 후안무치함 탓도 아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성적으로는 저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그 자리를 둘째 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오빠가 사람이에요? 오빠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자고 할 때 그게 어머니가 한 짓이 아니라 자기가 한 짓인 거 알고 있었잖아!”

“닥쳐!!”

장남이 거칠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입 다물어!!”

이폴리토는 데시벨을 최대한으로 올려서 자기가 지를 수 있는 가장 큰 고함을 쳤다.

논리로 이길 수 없으니 성량으로 이겨버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아들이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닥쳐, 닥치라고!! 주둥아리 다물라고!!”

머리가 한없이 아파져 왔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었다.

자식들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버지 속이라고는 하나도 몰랐다.

둘째 딸이 빽빽거렸다.

“어머니가 오빠를 얼마나 싸고돌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자기 엄마 뒤통수를 쳐? 이 살인자야!”

“이게 뒈지려고!!!”

이폴리토는 손을 들고 아리아드네에게 접근했다. 아리아드네가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이게 맞아봐야 무서운 줄 알지!”

“다들 그만해!!!!!”

추기경은 고함을 질렀다. 삽시간에 서재 안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추기경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외쳤다.

“그만!!! 다 나가!! 다 나가!!! 꼴도 보기 싫다!!!”

그는 이폴리토와 아리아드네를 차례차례 바라보며 서재 문 쪽을 가리켰다.

“너희 둘 다, 나가.”

카루소 대표와 그의 똘마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 둘은 알아서 슬금슬금 자리를 수습하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이폴리토는 분에 겨워 씩씩대며 제일 먼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뒤를 따른 건 손님 둘이었다.

마지막으로 방에 남은 아리아드네는 독기 찬 눈으로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도 아리아드네를 마주 쏘아보았다. 내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를 똑 닮은 차녀는 호락호락하게 아버지를 놔주지 않았다.

“아버지. 가주는 가족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녀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제 어미의 등에도 칼을 꽂는 자식에게 칼자루를 쥐여주시려고요?”

추기경의 녹색 눈이 어두워졌다.

- 달칵.

차녀마저도 나가고, 혼자 남은 추기경의 서재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 * *

아리아드네가 복도에 나와 보니 이폴리토는 이미 쿵쿵대며 아버지의 서재가 있는 동쪽 날개를 떠나간 상태였다.

카루소 대표와 그가 데려온 부랑자만 엉거주춤하게 서서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카루소 대표를 보며 미소지었다.

일이 다 매끄럽게 풀린 건 아니었지만, 인간사가 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전달해야 할 것은 대강 다 전달한 것 같았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그녀 덕에 큰돈을 만진 카루소 대표는 깍듯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가씨를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 게 없지요. 다 이 친구가 한 겁니다.”

카루소 대표는 부랑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리아드네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추기경 예하 말씀 들으셨죠.”

그녀는 부랑자에게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리아드네는 품에서 금화 한 줌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부랑자에게 건넸다.

“이건 오늘치 수고비예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와 목례하고 천천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사실 정말로 부랑자의 입을 막으려면 죽여 없애는 것이 맞았다.

좀 더 인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더라도 최소한 산 카를로를 떠나게는 해야 했다.

저런 치들이 할 일이란 뻔하지 않은가.

부두의 선술집에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떠벌리며 높으신 분의 치부를 보았다고 신나게 자랑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의 이익은 꼭 추기경의 이익과 부합하지는 않았다.

‘이폴리토 데 마레가 하녀 뱃속의 자기 아기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배신하고 제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버렸다고 소문이 나는 게 뭐가 어디가 어때서?’

억울한 소문도 아니잖아?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잘 봤다.

저런 소문이 동네방네 난다면 가문에는 타격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데 마레 가문’ 자체에는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

그렇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알아야 했다. 그에게는 애초에 옵션이 많이 없었다는 거.

그에게는 뻐꾸기 새끼인 가짜 장남, 치장과 사치에만 정신이 팔린 장녀, 그리고 계산은 빠르고 잇속에는 치밀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차녀가 있을 뿐이다.

‘오늘 이폴리토가 아버지의 씨가 아니라고 폭로했다면 아버지가 좀 더 전향적으로 나오셨을까?’

아리아드네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증거 없는 주장을 믿을 위인이 아니다.

괜히 먼저 말을 꺼냈다가 멍청한 이폴리토가 사전 대비를 할 시간을 주거나, 추기경이 가진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망치는 것보다는 조용히 치밀하게 모아서 단박에 쳐 버리는 게 나았다.

‘⋯⋯작위가 이폴리토 개인에게 가지 않는다면 말이지.’

이폴리토가 작위를 받아 버린다면 데 마레 추기경도 가짜 아들인 이폴리토를 팽하기 어려워질 텐데.

아리아드네는 다시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그녀는 슬슬 부하를 견뎌내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이폴리토가 작위를 받아 버린다면 난 수녀원에라도 투신해야 하나.’

데 마레 추기경 생전에 들어간다면 수녀원장 자리 하나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태생적으로 생각이 많은 성격은 내려놓으려고 해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한 가지는 확신했다.

아버지의 상태도 지금 꼭 자기와 같을 거라고.

‘아버지. 현명한 판단을 내리세요.’

* * *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집안은 살얼음판이었다. 점차 추워지는 바깥 날씨를 따라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무도 서로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숫제 처소에 틀어박혀 식사도 따로 받았다.

이폴리토와 이사벨라도 아리아드네와 마주치는 걸 극히 싫어해서 시간을 피해 내려왔다.

데 마레 대저택의 부엌 인원들이 강제로 식사를 두 번씩 따로 차리게 된 것을 제외하면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가족의 일상을 깬 것은 왕궁에서 도착한 파발꾼이었다.

- “국왕 폐하의 교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에 생기가 돌았다. 2층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추기경도 서재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폴리토와 이사벨라만 무슨 일인지 까맣게 모른 채 일 층 계단참에 내려와 둘이 수군수군 떠들었다.

“이게 뭐야?”

“몰라, 우리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작위다, 머저리들아.’

문제는 저 작위를 누가 받을 것인지 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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