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교활한 토끼의 꼬리
“예?”
델피아노사 경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무슨 아이디어 말씀이십니까? 군사를 보내서 강제수용도 불가능하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였지만, 델피아노사 경은 차마 그렇게는 말을 못 하고 지엽적인 부분에 딴지를 걸었다.
그러나 뉘앙스는 전해지는 법이다.
레오 3세도 자신을 향한 보좌관의 시선—한심하다는 눈초리—이 신경 쓰였는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정말로 기막힌 거라고! 임자, 귀 좀 대봐.”
델피아노사 경은 ‘도대체 국왕의 집무실 안에 피해야 할 귀가 어디 있다고, 죄다 왕실 시종들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국왕의 장단에 맞춰 귀를 내줬다.
그는 처음에는 예순이 넘은 국왕의 입김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참 불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니까, ⋯⋯이렇게 하면⋯⋯!”
그러나 그는 레오 3세가 말을 계속 이어나가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다고! 어때, 내 생각이?”
“아니⋯⋯. 이건⋯⋯! 정말로 귓속말하실 만하네요.”
“어때? 놀랍지? 대단하지?”
“확실히⋯⋯. 놀랍기는 한데⋯⋯.”
“이거면 우리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게는 한데⋯⋯.”
기상천외했다. 델피아노사 경 같은 상식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해 볼 일이었다.
태클 거리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아득했다.
‘상식이⋯⋯. 도덕이⋯⋯. 관련자들이 승낙을 할까요⋯⋯?’
그러나 레오 3세는 미적대는 델피아노사 경에게 언성을 높였다.
“이봐, 델피아노사. 지금은 긴급 상황이야!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모두 다 가용해야 할 것 아닌가!”
“그, 그렇기는 한데⋯⋯.”
“생각을 해 보라고. 지금 지방 영주 놈들이 세금을 안 올려보내고 있어! 나라 곳간에 채워놓은 걸 다 쓰면 그 뒤는 끝장일세! 이거 한 건이면 모르긴 몰라도 일 년간은 세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양이 그렇게나 많을까요?”
“많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펑펑 쓰겠나?”
레오 3세의 눈이 반짝거렸다.
“게다가 말이야, 귀족 놈들이 말을 안 들으면 결국 우리는 어디에 의탁을 해야 하겠는가?”
“⋯⋯해외 군주요?”
“멍청하긴! 백성이야!”
레오 3세는 침까지 튀기며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가 지방 호족한테서 얻어내야 하는 게 뭔가! 결국엔 세금과 군사 아닌가! 돈은 이걸로 해결되지, 게다가 이 방법을 택하기만 하면 백성의 인망도 확 높아질 거야!”
레오 3세는 저잣거리에서 슬슬 국왕의 욕을 하는 노래가 많아지는 것에 적잖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정통성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 없는 왕이었지만 귀족들의 지지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재위 기간 내내 지방 영주들을 후려친 탓이었다.
그런 관계로, 풀뿌리 하층민의 지지라도 탄탄해야 했다.
“돈 있고, 인망 있으면 중앙군을 키우면 되네. 더 이상 호족놈들한테 의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무지렁이 백성들한테 중앙군에 직접 입대하라고 독려해서 상비군을 만들면 돼!”
그는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왕궁 근위대 규모에서 벗어나서, 전 국토에 주둔 가능한 상비군을 창설하는 거지! 평민들한테는 연봉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도 선망하는 집단만 만들어주고 소속감을 고취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델피아노사는 그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지금 국왕의 독백에 끼어들었다가는 경을 칠 것 같았다.
레오 3세는 스스로에게 심취해 꿈꾸는 미래를 외쳤다.
“그러면 지방 여우들도 이제 끝이야! 수도에 의한, 수도의 치세가 시작되는 걸세!”
그때 흥분한 레오 3세의 고성을 뚫고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드레스 자락 소리였다.
“어머, 두 분이서 저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는 건가요?”
손수 은쟁반에 오렌지를 가득 담아 들어온 루비나 공작 부인이었다.
“남쪽에서 과일이 올라왔어요. 요새 교역이 다 끊겨서, 어렵게 구한 신선한 오렌지랍니다.”
그녀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권했다.
“맛 좀 봐 보셔요, 폐하.”
그리고 시혜를 내린다는 듯이 덧붙였다.
“거기, 델피아노사 경도 함께 좀 들어요.”
하지만 델피아노사 경은 루비나 공작 부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바라다보다가, 그만 딸꾹질을 시작했다.
- 히끅!
“어머, 왜 그렇게 놀라?”
- 히끅!
델피아노사 경은 두 손으로 코를 막고 필사적으로 딸꾹질을 멈춰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의 횡격막은 그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 히끅!
델피아노사 경의 딸꾹질이 제어 가능한 상태를 벗어나자, 레오 3세는 루비나 공작 부인에게 역정을 부렸다.
“아니, 당신은 또 왜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들어와?!”
루비나 공작 부인은 국왕에게 살포시 눈을 흘겼다.
“제가 어디 못 들어올 곳 들어왔어요?”
장성한 아들을 둔 나이 많은 부인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고운 자태였다.
웬만한 젊은이가 와서 보았어도 얼굴을 붉혔을 미모였다. 하지만 레오 3세는 그 고운 부인에게 발칵 짜증을 냈다.
“못 들어올 곳 맞지! 당신은 공식적으로 내 제수씨인데 남편 형 집무실에 살랑살랑 돌아다니는 게 말이나 되오!”
루비나 공작 부인은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으로 레오 3세를 바라보았다.
“아니, 언제부터 그런 거 따지셨다고 그래요?”
체자레를 피사노 공작으로 선포한 이후부터 루비나는 산 카를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대역병 때문에 재미를 본 기간이 짧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 위치를 십분 만끽했다.
그 어떤 파티에도, 그 어떤 사교모임에도 루비나는 최상석에 앉았다. 명실공히 나라 전체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인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떠난 왕궁 살림도 루비나 공작 부인이 그러쥐었다.
왕의 제수씨라니 핑계도 좋았다. 왕비궁에 지급되던 녹봉도 그녀에게 고스란히 들어갔다.
마르그리트는 그 검소하다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씀씀이가 작지 않았다.
특히 랑부예 구휼원에 들어가는 돈이 몹시 컸다. 루비나는 그걸 모두 삭감해서 왕궁 살림 자체에 쏟아부었다.
사용하는 양초도, 시종들의 옷감도 한 레벨씩 업그레이드했다. 시종들의 칭송이 하늘을 찔렀다. 좋은 시절이었다.
“폐하, 그러지 말고 오렌지 한 입 드셔보세요. 아—.”
루비나 공작 부인은 까 놓은 오렌지 한쪽을 들어 레오 3세의 입 근처에 갖다 댔다.
평소라면 좋다며 받아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팩 짜증을 내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내가 그만하랬지! 보는 눈이 있는데!”
루비나 공작 부인도 이쯤 되자 화가 치밀었다.
“폐하, 도대체 오늘 왜 이러세요?”
실질적으로 왕비 노릇은 다 시켜줬으면서 이제 와서 집무실에 좀 들어왔다고 체통을 지키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소리였다.
그녀는 제법 눈을 부라리며 레오 3세를 노려보았다.
아들 체자레나 자기 아래의 사용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성정을 그대로 내보인 루비나였지만, 그녀의 마흔셋 평생 레오 3세에게는 손톱 한 번 세운 적이 없었다.
정부(情夫)라는 위치가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실질적인 왕비 대행이었고, 그녀의 아들은 왕위계승권을 가진 이 나라의 공작이다.
그녀의 아들내미 앞에 있는 건 알폰소 한 명밖에 없는데, 그놈은 이역만리 타국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다. 운이 좋으면 전쟁터에서 죽어버릴 테지.
그게 루비나의 배짱을 두둑하게 했다.
“보는 눈이 도대체 어디 있다고! 누가 봐요, 누가? 여기 이 델피아노사? 저기 왕궁 시종? 오늘 안 보면, 어제 봤던 건 뇌에서 지워진답니까?”
“뭐, 뭐?”
“제가 폐하 변덕을 참은 지가 25년이 훌쩍 넘는데 더는 못 해 먹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도대체가!”
“허!”
레오 3세는 뒷머리를 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내 말 맞지, 델피아노사!”
딸꾹질과 여전히 사투를 벌이고 있던 델피아노사 경운 눈치를 보며 답했다.
“아, 예, 예⋯⋯. 딸꾹!”
레오 3세는 그 정갈하지 못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해! 알겠어?”
“히끅! 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루비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레오 3세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 하시는 거예요?”
“당신은 알 것 없어! 나가! 썩 나가!”
레오 3세에 의해 국왕의 집무실에서 쫓겨나며 루비나 공작 부인은 이마를 찡그렸다. 촉이 좋지 않았다.
* * *
아리아드네 본인은 작위가 아니라 랑부예 구휼원장 직위를 받은 사실로 적잖이 실망했지만—데 마레 추기경은 후속타가 남았다는 사실을 딸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게는 그것조차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다 아빠 때문이야!”
이사벨라는 자기 숄을 ‘소녀들의 응접실’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랑부예 구휼원에는 나도 봉사활동 갔었다고!”
사실 이사벨라도 머리로는 알았다.
구휼원장 자리는 단순 봉사활동으로는 받을 수 없고, 수도를 넘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명성과 곡식 기부로 얻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직시하려니 너무나 아팠다.
“그때 내가 봉사활동 가는 걸 아리아드네 그 계집애가 막지만 않았더라도! 아빠가 그 계집애 편을 들지만 않았더라도! ‘구휼원의 성녀’ 타이틀은 내 것이었다고!”
“네 말이 맞다.”
아리아드네에게 자기 방을 뺏겨 책상을 쓰려면 ‘소녀들의 응접실’로 와야 하는 처지가 된 이폴리토가 침중한 척 이사벨라의 맞장구를 쳤다.
핑크색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예쁜 응접실에 하얀 가구를 차지하고 앉은 꼬락서니가 웃기지도 않았지만 그는 엄중한 기색이었다.
“걘 그걸 다 설계해 놨던 거야. 미리 다 짰던 거라고!”
분노한 마음에 가장 손쉬운 양식이 되는 건 음모론이었다.
“수도에 역병이 퍼질 걸 미리 알았던 걸까? 지가 퍼트린 거 아니야?”
“걔라면 그러고도 남지, 음흉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야!”
음모론 다음은 인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어떻게 그렇게 가족 생각은 한 톨만큼도 안 하고 혼자서만 나댈 수가 있어?”
“성격이 더러워서 그래. 원래 그랬잖아? 오빠가 못 봐서 그렇지, 걔가 농장에서 처음 올라온 다음에 얼마나 기분 나쁘게 굴었는데! 내가 잘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무슨 짓을 했길래?”
“나한테 쌍욕도 하고, 내 친구들도 다 훔쳐 가고! 난 정말 좋은 마음으로 모두 소개해 준 거라고!”
공공의 적이 생기자 역설적으로 동복 남매의 우애는 돈독해졌다.
“너 진짜 속상했겠다.”
“그지, 오빠가 봐도 그렇지?”
“내 그 계집애를 콱!”
남매의 허세를 멈춘 건 그 아버지였다.
“쯧쯧쯧쯧쯧.”
소녀들의 응접실 문에 기대선 데 마레 추기경은 대놓고 혀를 찼다.
“⋯⋯아빠!”
이사벨라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내 안 그래도 너희들이 실망했을 것 같아서 들여다보려고 왔더니.”
데 마레 추기경은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고작 한다는 짓거리가 여동생 험담하기냐?”
“그렇지만 아빠!”
이사벨라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호소했다.
“어떻게 우리만 이렇게 쏙 빼놓고 일을 진행하실 수가 있어요?”
이사벨라는 벌떡 일어서서 아버지 앞에 섰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폴리토 오빠는 장자라고요! 집안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오빠하고는 의논하시고, 웬만하면 오빠에게 몰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랑부예 구휼원장 자리는 특수했기 때문에 이사벨라의 말이 들어맞지 않았지만, 그걸 작위로 바꾸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이 잘해야 나도 그럴 생각이 들지, 허구한 날 동생 뒤통수칠 궁리나 하는데 내가 어떻게 너희를 믿고 의논을 하겠니, 아니면 감투를 주겠니?”
이폴리토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는 부모는 당연히 자식에게, 정확하게는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인 자기에게 좋은 걸 다 몰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걸, 경쟁해서 획득해야 한다고?
“동생한테 잘할 생각이나 해.”
데 마레 추기경은 차갑게 말했다.
이제 와서 국왕에게 이폴리토로 작위 수여 대상자를 바꿔 달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고, 이 꼴을 보니 솔직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건 너희들이 뒤에서 받쳐 주는 처지이고 너희들 동생이 전면에 나설 때도 마찬가지야. 언제까지고 좋은 것만 받아먹을 줄 알았어?”
냉정한 추기경의 말에, 이사벨라의 보랏빛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인정사정없었다.
“잘 보여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그는 기어이 한마디 덧붙였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아빠!”
추기경은 꼴도 보기 싫은 자식새끼들을 뒤로 한 채 홱 돌아서서 응접실을 걸어 나갔다.
추기경의 흰 옷자락이 너풀댔다.
추기경이 재직하는 동안만 그들을 지켜줄 하얀 옷자락이었다. 이사벨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저 자리에 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동안, 어떻게든 자력으로 먹고살 방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분주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몰랐지만, 그 동공은 삼 주 뒤 여동생이 두 번째 교지를 받게 되는 날, 본격적으로 흔들리게 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