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완벽한 선인은 없다
- 와지끈!
힘찬 도끼질로 무너져내린 목조 벽 뒤에는 아니나 다를까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입 끝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금고가 있군.”
벽 하나 부수면 바로 숨겨진 비자금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너무 날로 먹으려던 생각이었나 보다.
벽 뒤에서 나온 것은 벽면 하나를 전부 다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금고였다.
알파벳으로 된 암호를 맞춰 넣으면 손잡이가 돌아가고, 수레바퀴처럼 생긴 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여는 구조였다.
- 철컥, 철컥.
그녀는 손잡이를 대충 흔들어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세페. 알바니 사무처장을 모셔와.”
아리아드네는 알바니 사무처장이 뭔가를 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금고를 처음 보는 것은 알바니 사무처장도 마찬가지였다.
랑부예 구휼원은 설계 시점부터 마르그리트 왕비가 직접 관여해서 지어진 것이고, 그는 추후 왕비궁에서 차출되어 투입된 것이라 그로서는 금시초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왕비 폐하께서 구휼원에 남겨두신 일기장, 쪽지, 메모 따위를 깡그리 가져오라는 명령만 남긴 채 그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비밀을 더 알게 된 알바니 사무처장에 대한 감시 정도만 한결 더 높아졌을 뿐이다.
“⋯⋯왕궁에 들어가 봐야 하나.”
랑부예 구휼원에 남은 왕비의 메모들은 신통한 것이 없었다.
개수 자체도 적을뿐더러, 악필로 대충 알아보기 힘들게 끄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유의미한 문장조차 나오지 않았다.
‘알폰소의 악필은 어머니를 닮았네.’
그 생각을 하자 아리아드네는 잠깐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알폰소에게 이미 네 통이 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예사크로 떠나는 정기선은 포르토 공화국이 운영하는 군용선 하나밖에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처음에는 편지를 일반적인 접수창구를 통해 보냈지만 나중에는 이게 분실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돈을 주고 보내기도 했고 카루소 대표의 거래처라는 상인에게 맡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묵묵부답, 알폰소에게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내가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갈리코의 귀족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거나, 예사크의 아름다운 무희에게서 위로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알폰소 왕자는 유혹에 참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신의가 있었고, 그녀와의 믿음을 깰 만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이 약하니까, 누군가가 동정심에 호소했다면⋯⋯.’
아리아드네는 다시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때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게 답이다.
‘그래, 금고.’
당면한 과제는 금고였다. 마르그리트 왕비님이라면 저 금고의 비밀번호를 뭐라고 정하셨을까?
다행히 금고는 여러 번 실패하면 자동으로 잠기는 형식의 자물쇠는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맞출 때까지 계속 돌려보면 된다.
‘그래도 비밀번호 길이가 너무 긴데⋯⋯.’
자물쇠는 무려 17자리 알파벳이었다. 네 자릿수 자물쇠처럼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비밀번호 설정자의 마음을 헤아려 단어를 맞춰 금고를 여는 인문학적인 접근방식은 일단 포기하고 기술적인 방법을 취해보기로 했다.
흑연을 구해다 자물쇠의 알파벳 위에 뿌리고, 어디에 더 많이 달라붙는지 본 것이다.
자주 사용한 알파벳에 기름때가 더 많이 묻어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시, 약간의 성과는 있었다.
‘첫 글자는 ‘A’야.’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모든 자물쇠에 손때가 다 타 있는 건 아니었다.
다섯 번째 글자가 ‘N’, 일곱 번째 글자가 ‘O’ 인 것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으나 나머지에서는 뭐가 딱히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ALFONSO’가 첫 번째 일곱 글자겠지?’
거기까지는 나왔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반쯤 확신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이 비자금을 하나뿐인 자기 아들을 위해 남편 몰래 숨겨두었다.
‘오늘 같은 날이 올 걸 예견이라도 하신 걸까?’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부부로 20년을 넘게 살면 배우자의 행동에 대해 예지력 같은 것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로서는 레오 3세가 친자식에게도 병력이나 군자금을 보내지 않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마르그리트 왕비는 그걸 10년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않나.
‘그런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정말이지 불행하셨겠어⋯⋯.’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물쇠에서 나는 각종 잡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비밀번호를 계속 풀었다.
날카롭게 집중을 하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달칵, 달칵’ 소리를 들으며 알파벳을 돌리고, 실패한 단어 조합을 종이에 필기하면서 그녀는 계속 다음 시도를 했다.
‘‘ALFONSO DE CARLO’는 글자의 개수가 안 맞아.’
사랑하는 알폰소, 카를로의 아들 알폰소, 알폰소 황금의 왕자님⋯⋯.
다 실패였다.
한참을 맞추다 그녀도 조금 지쳤을 무렵이었다.
- 똑똑.
“아가씨.”
주세페가 들어왔다.
“벌써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댁에서 식사를 하실 예정이시면 슬슬 귀가하실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
몰입해 있던 그녀는 그제야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놓았다.
“주세페도 집에서 식사하지?”
“예. 저야 사실 어디서 먹든 상관없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항상 기다리셔서요.”
주세페는 순박하게 웃었다.
막내 마부에서 집안 장정들을 총괄하는 아리아드네의 최측근으로 올라온 뒤로 제법 점잖아지고 위엄도 생겼지만, 어머니 얘기를 할 때는 천생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도 가족 이야기를 할 때는 입이 트였다.
“그래도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는 걸 보면 어머니 요리 솜씨가 좋으신가 보지?”
“하하,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꿀꿀이 죽⋯⋯. 이건 저희 어머니께는 비밀이에요.”
아리아드네는 조금 웃었다.
“당연하지.”
주세페의 어머니 험담 내지 자랑은 계속되었다.
“아직도 우리 아기, 우리 아기 하신다니까요. 제가 어머니 두 배는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아리아드네의 뇌리에서 번쩍 빛났다.
그녀는 주세페를 뒤에 내버려 둔 채, 홀린 듯이 자물쇠로 다가가 단어들을 맞췄다.
‘우리 아기⋯⋯.’
- ALFONSO, MIO BAMBINO. (알폰소, 내 아이.)
- 달칵.
마지막 알파벳이 자리를 잡는 소리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울렸다.
아리아드네는 자연스럽게 수레바퀴 모양 손잡이를 붙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기계 태엽장치가 맞아들어가는 소리가 나며 수레바퀴가 옆으로 돌아갔고,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천신이시여!”
금고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주세페의 감탄사가 귀를 때렸다.
“아가씨, 이건⋯⋯!”
“주세페, 쉬잇.”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었다. 흰 마대 자루에 가득 담긴 금화로, 모두 순금 함량이 가장 높다는 두카토 금화였다.
아리아드네는 금고 안으로 들어가 금화를 하나 집어 들어 깨물어 보았다.
- 아드득.
확실히, 금화 맞았다.
“아가씨, 여기 무언가 있습니다!”
뒤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주세페가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금고의 문짝 앞쪽에, 주머니처럼 만들어진 포켓에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편지를 집어 들며, 주세페에게 부탁했다.
“주세페, 앞으로 나가서 경호를 서줘. 아무도 이 방에 못 들어오게 해.”
“예!”
힘차게 대답한 주세페를 내보낸 후, 아리아드네는 편지를 펴서 내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알폰소.」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들에게 남긴 서신이었다.
「네가 이 편지를 볼 일이 없기를, 내가 내 손으로 이 돈을 너에게 직접 건네줄 수 있기를, 아니 그보다는 이 자금이 쓰일 일이 없기를 빈다.
이 어미는 죄인이란다. 내 자식의 안위에 눈이 멀어서 아프고 약한 자들을 대거 굶겨 죽이기로 결심했단다.
평범한 어미로서는 흔들릴 수도 있을 만한 결정이지만 국모로서는 절대로 내려서는 안 되는 결정이지.
하지만 결국 하루가 끝날 즈음에 내 눈에 밟히는 건 내 자식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이로구나.」
그 뒤에는 뭐라고 더 쓴 내용이 있었으나, 거친 잉크 자국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쓴 뒤에 두 줄을 그어 지워버린 모양이었다.
‘당시에 일어났었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술일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마저 읽어나갔다.
「나는 일부러 네 동생을 가지지 않았어. 둘째가 딸이라면 남편이 그 아이를 어디로 팔아넘길지 가늠조차 되지 않고, 둘째가 아들이라면 레오의 성정을 보건대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거야. 경쟁, 무한 경쟁, 금도를 벗어난 수단⋯⋯.」
이 뒤는 다시 한번 글씨가 지워져서 잘 읽히지 않았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두 줄이 그어진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를 인상을 찌푸린 채 판독했다.
「그이는 자기 본인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그저 성품이 타고나길 무심한 거라고, 남자라서 잘 모르는 거라고 좋게 생각해 왔지만 오늘로써 명징해졌어. 그이는⋯⋯.」
이 뒤는 잉크를 한 번 더 찍어서 지웠는지 영 읽히지 않았다.
「내 목숨은 어찌 되어도 상관 없⋯⋯.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갈리코에서 데려온 측근들로 교체⋯⋯. 남편은 애정에 눈을 감⋯⋯.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지운 내용이 너무 많아 지우는 잉크도 성기게 그여서 뒤 내용이 대충 파악이 됐다.
마르그리트 왕비를 향한, 아마 루비나 당시 백작 부인의 암살시도가 그때도 한 번 있었던 모양이었고, 젊은 왕비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아이’ 알폰소.’
나만의 아이.
세상에 어린 자식을 제외하면 홀로 남은 기분이었을 테다. 나는 약하고 무력한데, 지켜야 할 새끼가 있다.
항상 군주에게는 의무가 있다며, 자신의 소임을 다 해야 한다던 마르그리트 왕비마저 눈이 돌아 하지 말아야 할 짓에 손을 대게 했을 그녀의 모정. 아니, 최후의 생존 본능.
내가 죽게 생겼을 때에도 도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훌륭하지 못하다. 아리아드네는 전생에서의 자신이 내렸던 선택을 되돌이켜보았다.
- 풀썩.
그녀가 건넸던 푸딩을 먹고 쓰러지던 알폰소 왕자의 모습. 체자레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진압당하고 목숨을 잃던 왕성 근위병들.
죽은 채 나무에 매달렸던 목동. ⋯⋯그리고 이번 생의 그레타. 그녀 왼손에 새겨진, 피의 무거움.
아리아드네는 도저히 준엄하게 마르그리트 왕비를 질타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왕비가 죄인이라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이다.
‘⋯⋯백성에 대한 속죄는, 제가 대신해 드릴게요.’
아리아드네는 왕비를 단죄할 수 없었다. 너무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그녀는 랑부예 구휼원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국왕이 억지로 떠맡긴 짐이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자리로 여길 수도 있었다.
사실 미혼의 영애에게 준 직위인데 결혼하면서 ‘가정생활에 집중하고자’ 사임한다고 하면 더 붙잡아 둘 핑계도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랑부예 구휼원을 정말로 빈민을 구제할 수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거기에 사용할 충분한 재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왕비가 저지른 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의 속죄가 되었으면, 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라파엘은 죄짓지 않는 자는 없다고 했지⋯⋯.’
그리고 인간이란 종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순결할 수 없다고.
그러나 순결해지고자 항상 노력하는 것이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아리아드네는 생각했다.
의미가 없더라도, 한걸음만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선(善)에 가까이.
‘그리고 이 자금은⋯⋯.’
그녀는 금고 안을 가득 메운, 놀라운 양의 두카토 금화를 둘러보았다.
정확히 얼마일지는 세어 봐야 알겠지만 1년 치 국가 예산에 육박할 정도의, 말도 안 되게 큰 금액임은 틀림없었다.
‘의도하셨던 용처로 보내 드릴게요.’
랑부예 구휼원을 구호하는 데에는 그녀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폰소 왕자는 군자금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몹시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