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사랑에 빠진 약자
아리아드네는 랑부예 구휼원의 비밀 금고를 다시금 굳게 닫아걸었다.
그녀가 다음으로 한 행동은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주세페와 금고의 존재까지만 알고 있는 알바니 사무처장의 입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돈 세는 것도 혼자 했다.
3일 밤낮을 들어가서 잘그락잘그락 금화를 세니 재밌으면서도 질리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손에서 쇠 냄새가 나더라.’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랑부예 구휼원의 비자금의 규모 파악을 끝내보니, 알폰소에게 보낼 군자금으로 대충 1차로 1만 두카토 정도를 보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돈이면 급한 불은 모두 끌 수 있을 것이고, 2-300명 수준의 소규모 부대 무장은 최상급으로 갖출 수 있을 것이며, 아껴 쓴다면 사람을 조금 더 늘릴 수도, 인원을 줄인다면 왕자 본인이 호화롭게 지낼 수도 있을 만한 돈이었다.
어느 쪽이건, 알폰소가 원하는 대로 쓰면 된다. 어차피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남겨준 돈이다.
더 많이 보낼 수도 있었지만 송금 루트의 문제가 있었다.
믿을 만한 송금책이 없어서, 금전이 잘 갈만한 길을 먼저 뚫어야 했다.
‘포르토 공화국의 정기선 편에 보낼 수는 없어.’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알폰소의 답장이 없는 이유는 배달 사고 쪽에 더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취약한 마음이 정인의 변심을 경고하며 장난질을 치는 것까지야 막을 수 없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백중해를 건너 예사크까지 편지가 오가는데 그게 정상적으로 잘 갈 거로 믿는 편이 이상하다.
‘이런 큰돈은, 중간에 누가 빼돌리기에도 딱 좋고.’
카루소 대표는 무어 제국으로 가는 밀무역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그 배의 항로를 바꾸어 예사크에 들렀다 가도록 하면 안전한 배편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밀무역선은 카루소 대표가 직접 탑승하는 배편이 아니었고, 또 배편이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항구에 내려 내륙까지 돈을 운반할 사람이 또 필요했다.
카루소 대표 본인이 이 정도 돈에 배신하지는 않겠지만, 보카네그로 상회의 아랫사람이 카루소 대표만큼 본인의 신용이나 에트루스칸 왕국에서의 사회생활을 높게 칠지는 다른 문제였다.
1만 두카토를 홀라당 들고 예사크 땅 어딘가를 거쳐 무어 제국으로 잠적해 버린다면 찾을 길이 없다.
아리아드네는 충성심을 믿지 않았다. 그 정도 금전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한 사이즈가 있어야 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 그리고 에트루스칸 왕국에 뿌리가 깊어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뇌리에 한 명이 떠올랐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항상 너그러웠던 사람이니. 들어주지 않을까.
* * *
“바다를 건너서요?”
라파엘은 붉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아리아드네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리아드네가 모처럼 자신을 호출해, 부리나케 데 마레 대저택으로 달려온 라파엘은 그녀의 충격적인 부탁에 자기가 내용을 잘못 들었기를 바랬다.
하지만 흑단 같은 머리채를 하나로 땋아 올린 녹색 눈의 소녀는 너무나 확고하게 그가 제대로 들었음을 확인 사살해 주었다.
“알폰소에게 군자금을 보내고 싶어요. 바다를 대신 건너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아리아드네는 믿음 충만한 눈동자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 당신은 알폰소의 친우죠?”
라파엘은 단 한 번도 이 여자에게서 순진무구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가능했다.
그녀에게는 한 점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우연찮은 사정으로 죽은 왕비님께서 알폰소를 위해 남겨두신 금화를 발견했어요. 이걸 제가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마침 알폰소는 이 돈이 꼭 필요하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라파엘은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다.
‘나는 우정과 당신 사이에서 이미 당신을 택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에게 말 꺼낼 시간도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발데사르 가의 하나 남은 후계자에게 국외로 나가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사실은 알아요. 하지만 알폰소는 이제 우리밖에 믿을 사람이 없는걸요.”
라파엘은 마른세수를 했다. 발데사르의 후계자가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 따위는 하나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후계자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성직자가 되려던 판이었는데, 그깟 해외야 몇 달 다녀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가 군자금을 가지고 왕자를 만나러 간다면⋯⋯.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알폰소는 아마 높은 확률로 그 돈을 노잣돈 삼아 안전한 호위 선단을 확보해 본국으로 귀국할 것이다.
‘알폰소가 돌아오면 아리아드네는⋯⋯.’
그의 품에 기쁘게 안기겠지.
라파엘의 상상 속에 중동의 태양 아래 다갈색으로 탄 건장한 금발 기사의 품 안에 날 듯이 달려 안기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그려졌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단정하게 땋아 올려진 머리카락이 알폰소에게 안길 때에는 무방비하게 허공을 흩날려…….
“⋯⋯라파엘?”
그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퍼뜩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괜찮아요?”
“그럼요.”
라파엘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는 매끄럽게 일 이야기로 넘어가며 그녀의 의구심을 무마했다.
“군자금 액수는 얼마쯤 됩니까?”
다행히 이런 쪽의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손쉽게 그의 유도에 걸려들었다.
“1만 두카토 생각하고 있어요.”
“아⋯⋯.”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라파엘은 침음성을 흘렸다.
“왜 제가 라파엘 말고는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는지 아시겠지요?”
확실히, 집안 식솔에게 들려서 보냈다가는 누구든지 들고 도망가 버릴만한 액수다.
게다가 부피 자체도 장난이 아니었다. 황금의 무게만도 100 리브라(약 33.4kg)은 족히 나갈 것이다.
“타란토에서 출항해 5주면 라트갈린 지역의 발리안티 항구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라파엘이 받아줄 기색을 보이자 아리아드네는 신이 나서 세부 계획을 공유했다.
“요새는 남동풍이 부는 시즌이니까 조금 더 빠를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발리안티 항구에 내려서 내륙으로 제3차 십자군을 찾으러 가면 됩니다.”
심술이 난 라파엘은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아리아드네 양은 이게 무슨 몬테카를로 후작가의 티파티에 가서 찻잔이라도 받아 오는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어느 시점 이후부터로 허락도 없이 그녀를 ‘아리아드네’라고 불렀던 주제에, 갑자기 거리를 홱 둬버린 호칭이었다.
이를 기민하게 느낀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라파엘, 아니, 시뇨르 발데사르. 그러려던 뜻은 아니었⋯⋯.”
하지만 역설적으로, 라파엘은 자기가 먼저 거리를 벌렸으면서도 그녀가 벽을 세우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확 덮쳐버리고 싶었다.
입술이 입술과 겹쳐지고 점막과 점막이 닿으면 일단 더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될 테다.
그는 일단 저질러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했다.
⋯⋯저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좋은 ‘친우’의 두 얼굴에 충격받을까. 다시는 나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들까.
“시뇨르 발데사르?”
그는 결국 저지르지 못했다.
“라파엘.”
그는 그녀의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시뇨르 발데사르가 아니라 라파엘.”
“아⋯⋯.”
“심술을 부려보았을 뿐이에요. 저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라파엘의 변덕에, 아리아드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
라파엘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가늘고 탄력 있는 백발이 햇살을 반사해 은빛으로 빛나며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한층 어두워진 붉은 눈이 깊숙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는 그녀 앞에 약자다. 그리고 알폰소 앞에서는 죄인이다.
누구에 대한 사죄인지 모를 사과를 중얼거리며 라파엘이 말했다.
“군자금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왕자님을 직접 호위해서 돌아오라거나, 그런 부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의 눈앞의, 찬란한 검은 머리칼의 소녀는 얼굴 전체에서 기쁨을 내뿜으며 답했다.
“네!”
그녀는 하얀 토끼 이빨을 드러내며 크게 미소지었다.
“알폰소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국왕 폐하께서 군자금을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들리질 않아요. 만리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맞다. 맞는 말이다.
그의 친우는—알폰소는 라파엘 내심의 배신을 모르니 라파엘만 선을 지킨다면 둘은 계속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지금 이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 일을 그가 거절한다면 알폰소는 계속 이역만리에서 혹독하게 구를 것이다.
라파엘은 알폰소에 대한 죄책감에 재차 숨을 들이쉬었다.
한 번도 날 저버린 적 없는, 내 좋은 친구 알폰소.
“한 번 루트를 뚫어 주시면, 그 이후로는 황금보다는 현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내는 편이 알폰소에게 더 요긴할 수도 있어요. 말이나, 마구, 갑옷이나 군장 같은 건 본국에서 보내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요.”
그녀는 속눈썹을 깜박이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두 번째 물품 전달부터는 보카네그로 상회의 사람을 지정해서 보낼 수 있도록 할게요. 라파엘에게 여러 번 부탁할 염치는 저도 없어요.”
“그런가요.”
아리아드네의 이 말에, 라파엘은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자신에게 여러 번 부탁할 염치가 없다는 부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알폰소의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가서 알폰소를 데리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고요?”
라파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답했다.
“⋯⋯복귀 시점은 전적으로 알폰소가 정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체자레가 들었으면 둘도 없는 현모양처 감이라며 물개박수라도 쳤을 만한 발언이었다.
“지금 국내 정세가 복잡해서 알폰소가 돌아와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기왕 성전에 출전한 것,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는 편이 국내 입지를 다지기에도 유리할 수 있고요.”
알폰소는 항상 성안에 갇혀 부모가 정한 방향으로, 그들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며 살았다.
그가 갈리코 왕국으로 떠난 것은 인생 최초로 자기가 정한 목표를 자기 손으로 달성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아직 자신이 목표한 바를 다 이루지 못했다면 그가 날개를 꺾고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이 그녀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해도 그랬다.
그녀가 알폰소에게 한 맹세는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아니라 기사의 서약이었으므로.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하게 해주고 싶어요. 굳이 나를 위해 일찍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괜히 말을 꺼냈다가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이타적인 애정만 엿보게 된 라파엘은 입안이 말라붙는 기분이었다.
상대방의 속도 모르고, 아리아드네는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 군자금에 더해서 편지도 꼭 전달해 주세요! 편지에 대한 답장도요!”
“이제까지는 못 받았습니까?”
라파엘의 반문에, 아리아드네는 짐짓 의연한 척 답했다.
“포르토 공화국의 정기편이 별로 믿음직하지가 않아요. 이제까지 보낸 편지가 중간에서 누락된 모양이에요.”
“하긴⋯⋯. 왕궁에서도 알폰소와 연락이 잘 안 된다고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래, 왕궁에도 편지가 안 갔다니, 이제까지 연락이 안 됐던 것은 배달 사고가 틀림없다.
라파엘 덕에 이제는 드디어 알폰소의 소식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보카네그로 상회의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금의 이동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알폰소를 제외한 십자군 측에 돈의 출처를 해명해야 할 경우에는 성황청의 에트루스칸 교구 연합에서 보내는 군자금이라고 둘러댈 수 있게 서류를 마련해 놓을게요.”
라파엘은 자신이 승낙만 하면 당장 모든 일이 시작되도록 이미 준비를 완료해 둔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치밀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보카네그로 상회의 배는 2주 후에 타란토에서 출항합니다.”
그 말인즉슨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라파엘에게는 3일여 밖에 여행 준비 및 가족에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가 된다.
알폰소에게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라고 말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는 삼 일 내에 당장 예사크로 출발하라고 호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빠진 약자였고,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갑을관계에서의 아랫사람이었다.
자신의 죄를 그녀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죄인이기도 했다.
결국 라파엘은 쌉싸래하게 웃으며 답했다.
“무엇이건, 당신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