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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33화 (233/733)

<제233화> 의문의 교지

라파엘이 예사크로 떠난 지 2주여가 지났다. 아리아드네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국왕 폐하의 교지를 받으라!”

오전에 장부 정리를 마친 후 점심 식사 전 시간을 이용해서 간만에 책을 읽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난데없는 외부인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소리를 듣자마자 실내용 드레스 차림으로 일 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저 사람 왜 또 왔어?”

“몰라?”

이폴리토와 이사벨라가 삼 주 전에 보았던 델피아노사 경을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델피아노사 경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도착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식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 층으로 모이고 있었다.

오늘 등청이 늦었던 데 마레 추기경도 딸보다 조금 늦게 현관으로 내려왔다.

“아버지. 혹시 이게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추기경은 굳은 얼굴로 대답이 없었다.

“저에게 교지가 왜 또 오지요?”

추기경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겠다. 조만간 너에게 교지가 한 번 더 내려올 거라는 언질만 있었어.”

“무슨 내용의 교지지요?”

“나도 받아봐야 알겠다.”

앞에서 기다리던 델피아노사 경은 다시 한번 외쳤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국왕 폐하의 교지를 받으라!”

더는 국왕의 전령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어쩔 수 없이 현관 중앙으로 나갔다.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이폴리토와 질투로 바들바들 떠는 이사벨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리아드네는 형제들을 무시한 채,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랑부예 구휼원장, 데 마레 가의 차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 국왕 폐하의 사절께 국왕 폐하를 뵙는 것과 같은 인사를 드립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그녀에게 본인이 전하는 인사를 하고는, 이내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쳐 국왕의 전언을 읽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흑사병을 퇴치하며 빈민을 구휼한 공이 있다. 이에 그이를 랑부예 구휼원장으로 임명했던바, 이제까지의 노고를 치하함과 동시에 앞으로도 맡은바 업무를 좀 더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데 마레 구성원 전원의 눈이 델피아노사 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조차 어떤 작위가 내려질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추기경의 손과 아리아드네의 손에 똑같이 땀이 차올랐고, 이폴리토의 눈알이 빠질 듯이 튀어나왔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 에트루스칸 왕국의 백작위를 내린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

아리아드네의 표정에 희열이 번져갔다.

봉토 없는 백작위다. 일반적으로는 순전한 명예직이다.

그러나 아리아드네에게는 그 어떤 대영지보다도 더 소중한 작위였다.

‘데 마레 백작’의 작위가 이폴리토에게 간다면 이폴리토가 가주가 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추기경이 죽은 후의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의 명령에 따라 꼼짝없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 마레 백작’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차기 가주 자리에 대한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을뿐더러, 설령 만에 하나 이폴리토가 가주가 된다손 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밖으로 내돌릴 순 없다.

그녀를 밖으로 시집보낸다면 집안이 바로 평민으로 강등당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못 하게 방해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도리어 바라던 바였다. 나쁘지 않았다.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가까이 다가와 작위 수여의 예를 취하고 국왕 폐하의 하사품을 받으시오.”

그녀는 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가 델피아노사 경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델피아노사 경은 예장용 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세 번 톡톡 쳐서, 작위 수여의 예를 치렀다.

데 마레 추기경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차녀가 작위를 받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기쁘기도 했고, 착잡하기도 했다.

‘백작. 데 마레 백작.’

작위 자체는 몹시 잘 받았다. 추기경이 애초에 예상했던 것은 자작위 정도였다.

국왕을 들이받고 온 다음에는 수여되는 것이 남작위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봉토가 없는 것은 매우 아쉬웠지만 생각보다 작위의 급이 많이 높았다.

이제는 데 마레 가문이 수도에서 어엿한 명문가로 행세하고 다니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의 영광이 대를 넘어 내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방법을 더 고민해보아야 하겠지만, 데 마레 가문은 이제 명실상부한 수도의 고관대작 반열에 들어섰다.

그가 평생토록 바라 마지않던 단 하나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문제는 그걸 받은 아이가 장남이 아닌 차녀라는 점이었다.

‘이걸 지켜낼 수 있을지⋯⋯.’

작위를 가진 여자를 꼬시거나 겁박해 집안에서 그 영광을 앗아가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데 마레 추기경의 착잡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국왕의 대리인인 델피아노사 경은 작위 수여식을 마쳤다.

그는 식을 마친 후 뒤에 대기하고 있는 왕궁 시종들에게 손가락을 딱, 울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왕궁 시종들이 몰고 온 다섯 대의 마차에서 각종 호화로운 물품들을 내리며 집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보석함, 드레스 상자, 모자 상자, 각종 구두 상자 등이 줄지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구휼원장 직위를 하사받을 때에는 단출한 은 브로치 하나를 받은 게 전부였다.

아리아드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델피아노사 경에게 물었다.

“저게 다 무슨⋯⋯.”

델피아노사 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국왕 폐하의 하사품이십니다.”

“작위 수여 시에 저런 종류의 하사품이 원래 내려오나요?”

델피아노사 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교지 한 개를 더 꺼냈다.

“영애, 아니, 데 마레 백작님. 집중하시지요.”

“예?”

아리아드네가 다시금 예를 취하는 것을 확인한 델피아노사 경은 두 번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양피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새로운 교지⋯⋯?’

델피아노사 경이 입을 열었다.

“데 마레 여백작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신앙심이 깊고 덕이 높아 타의 모범이 되는 영애로⋯⋯.”

확실히, 두 번째 양피지도 교지였다.

그녀를 ‘데 마레 여백작’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보니, 첫 번째 교지에 바로 이어서 낭독하도록 예정된 교지다.

하지만 교지의 내용이 모호했다.

델피아노사 경이 대독하는 국왕의 말씀은 그녀를 칭찬하는 말로 가득했지만, 실체가 없었다.

“그 용모와 자세가 뛰어나고 명성이 수도를 떨치되 태도가 부드러우며 몸을 낮추니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있고⋯⋯.”

‘백작’에게 내리는 작위인데 온통 그녀의 여성성을 칭찬하는 미사여구로만 점철된 것도 매우 이상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여백작은 지금 당장 입궁하라.”

그게 끝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입궁이요? 지금요?”

대독을 마친 델피아노사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장 입궁하시라는 국왕 폐하의 명입니다.”

“백작위 수여는 모두 끝난 것 아닌가요?”

어깨에 검을 세 번 두드리는 예식도 치렀고, 국왕의 하사품도 가득 받았다. 뭐가 더 남았단 말인가?

델피아노사 경이 애매한 표정으로 답했다.

“들어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는 덧붙였다.

“지금 당장 출발하시지요.”

아리아드네는 당황해서 스스로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단출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의상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비단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왕궁에 국왕을 알현하러 들어갈 차림새는 아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준비를 하고 나오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리아드네는 당황해서 델피아노사 경을 쳐다보았다. 설마 이대로 국왕을 알현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델피아노사 경의 의도한 것은 후줄근하게 하고 들어가도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도리어 정반대였다.

“영애께서 걸치실 일체의 의복은 모두 왕궁에서 준비할 것입니다.”

당혹스러워하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델피아노사는 왕궁 시종에게 일렀다.

“데 마레 영애를 부축해서 마차에 오르시는 걸 도와드려라.”

그는 웃으며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예하. 가족분들께서는 저녁때쯤 입궐하시지요. 따로 안내인을 보내겠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델피아노사 경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가시지요.”

왕궁에서 내 의복을 갈아입혀 준다고? 난 왼손의 장갑을 벗으면 안 되는데?

아리아드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제 하녀, 제 하녀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요!”

“곤란합니다. 왕실의 법도를 따르셔야죠.”

“한 명, 한 명만이라도요!”

아리아드네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델피아노사 경은 한숨을 쉬었다.

수도에 그녀의 위명이 울리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열여섯 살 소녀였다.

게다가 그녀가 결국 왕궁에 들어오게 된다면 친정 시녀 한둘은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이 상례다.

그리고 그도 자신이 오늘 맡은 임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델피아노사 경은 약간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몸종 딱 한 명만 대동하시지요.”

아리아드네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산차를 불렀다.

하지만 산차가 뭔가를 가져오려는 것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는 손을 들어 산차를 제지했다.

“시간은 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왕궁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모여들어 아리아드네를 수행해 그녀를 왕궁에서 내준 호화로운 황금 마차에 태웠다. 왕족만 타는 마차였다.

아리아드네는 여자 수행원에 의해 몸으로 밀리다시피 마차에 올라탔다.

산차가 같이 타려고 했지만 왕궁 시종의 매서운 제지에 가로막혔고, 맨 뒤의 검은 마차로 끌려가 거기 맨 뒤 칸에 간신히 탑승할 수 있었다.

바로 마차의 문이 닫혔고, 왕궁 예복을 갖춰 입은 마부가 채찍을 내려쳤다.

“이랴!”

아리아드네는 마치 연행되듯이 왕궁으로 끌려갔다.

* * *

그날 아침, 체자레 공작은 불청객의 방문에 그의 기상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눈을 떴다.

“체자레―!!!”

큰일이 없는 한 왕궁을 잘 떠나지 않는 그의 모친이 체자레의 수도 저택인 빌라 소로토네에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루비나의 방문이 최근 잦아진다고 생각하며, 체자레는 짜증스럽게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흰 시트가 흘러내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난봉꾼답지 않은, 미끈한 마른 근육이었다.

“여자라도 있었으면 어쩌시려고.”

그러나 아들의 침실로 아침 일찍부터 직진한 루비나 공작 부인은 아들의 사소한 항의는 묵살한 채 비명을 질렀다.

“네 아버지 좀 어떻게 해 다오!”

또 시작이시군.

체자레는 모친을 꼭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양반을 제가 무슨 수로 말립니까?”

그는 숫제 레오 3세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레오 3세는 걸어다니는 자연재해 같은 사람이다.

어차피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국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루비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네 아버지가 새 왕비를 들이겠단다!”

이 이야기에는 체자레도 적잖이 놀랐다.

“딱히 혼담이 오가는 국가도 없지 않았습니까?”

국왕의 혼사는 아무리 계비(繼妃)를 찾는 경우라고 해도 큰일이었다.

길면 2-3년 전, 짧아도 1년 정도는 여유를 두고 상대 국가와 조율을 하며 당사자의 초상화를 교환하기도 하고 조건도 맞춰 보는 것이 상례였다.

“내국인이라고 한단다!”

“내국인이요?”

체자레는 한 번 더 놀랐다. 국내에 국왕의 후처가 될 만한 여성이 있다고?

보통 지체 높은 가문의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식이나, 한 번 다녀온 여식이 국왕의 계비가 된다.

예삽교 교리상 이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로 전남편의 흠집을 잡아 혼인 무효 선언을 받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지금 에트루스칸 왕국에 있는 공작가 이상은 대부분 다 왕가의 친척이었다.

레오 3세와 결혼할 수 있을 만한 신분 높은 내국인 여자가 없었다.

“근데 어머니. 설마 왕비 자리가 영영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였어요?”

국모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을 수는 없다. 루비나도 그것은 알 것이다.

혹시나 본인이 왕비 자리에 등극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망상이다.

“내국인 누구?”

체자레는 누가 우리 어머니를 밀어냈는지가 궁금했다.

앞으로 새 왕비와 루비나 사이에 흥미로운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반쯤은 재미있었지만 반쯤은 골치가 아팠다. 순수한 관전자가 될 수 있다면 재미만 있었을 텐데.

루비나는 울부짖듯이 외쳤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그 살바르산 이야기를 들쑤셔 꺼낸 맹랑하기 짝이 없는 꼬마 계집애!”

체자레는 잠이 모두 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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