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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34화 (234/733)

<제234화> 순백의 신부

“어머니,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뭐가 어떻게 된 거라고?”

루비나는 절망에 빠져 외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바퀴 도는데, 글쎄, ‘태양의 홀’이 열린 거야!”

루비나는 횡설수설했지만, 잘 들어보니 결국 왕궁 살림을 전담하는 루비나조차 모르는 채로 새로운 왕비를 책봉하는 예식이 준비되고 있었고, 분노한 루비나가 ‘태양의 홀’에 난입하자 쫓겨났다는 이야기였다.

“교지도 오늘 아침에 나갔는데 ‘왕비 책봉’이라는 단어가 없이 나갔대! 얼마나 비밀스럽게 진행을 했으면! 콘타리니 백작에게 물어봤더니 그이도 금시초문이라더라!”

국왕은 델피아노사 경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이번 일을 극비로 한 채 진행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혼담의 상대방 당사자조차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히려 잘 됐어.”

“체자레?”

실성한 듯한 아들의 말에 루비나가 반문했다.

하지만 아들은 모친에게 자기 속내를 찬찬히 풀어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머니는 왕궁에 돌아가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지금 뭘 하려고?”

“아닌가? 어차피 망하면 여기나 거기나 그게 그건가?”

횡설수설하는 아들을 보고 루비나는 재차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너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는 거니?”

하지만 체자레는 모친을 뒤에 둔 채 침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레오 3세는 태양의 홀에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장식을 달고 화로를 지폈다. 새 왕비를 맞이할 준비가 거의 끝난 상태였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델피아노사에게 교지를 들려 내보내 버린 터여서 수다를 떨 상대가 없는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난 정말 천재적인 거 같아.’

이건 정말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왕비로 앉히면, 일단 그녀가 가진 곡식이 다 본인 수중으로 들어온다.

일전에 데 마레 추기경은 곡식을 국가에 바치라는 자신의 요청에 깔끔하게 선을 그었었다.

- “그건 제 딸아이의 사재(私財)입니다. 가문의 재산이 아닙니다. 제게는 권한이 없어요.”

가문의 재산이 아니라 그 집 딸의 개인 재산이라면 그 곡식은 결혼과 동시에 전부 다 남편의 가문으로 귀속되는 것이 순리다.

추기경은 똑똑한 척하다가 제 무덤을 팠다.

“클클클.”

게다가 국왕 본인이 아리아드네 데 마레와 혼인을 한다면 데 마레 가문에 내린 작위도 곧바로 회수할 수 있었다.

당대에서는 그녀가 가지고 있겠지만 결국에는 왕궁의 식구다.

그가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몸에서 아들을 본다면 데 마레 백작위는 그 아이한테로 내려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작위에 영지 하나 붙여주지 뭐.’

흑사병으로 빈 영지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빈 땅 하나 찾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는 피사노 영지도 홀라당 먹어치워 체자레에게 내린 전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 결혼에는 평민들이 열광할 거란 말이지.’

흑사병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선 평민 출신 성직자의 딸이 백작위를 받고 왕궁에 들어가 왕비가 된 인생 역전 이야기!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안 그래도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 ‘빈민들의 어머니’ 같은 좋은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계집애 성품이 시전 상인처럼 되바라진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어차피 평민 놈들은 본질을 꿰뚫어 볼 자질이 없다.

‘평민의 지지를 받으면 지방 영주 놈들이 섣불리 덤비질 못할 거란 말씀!’

레오 3세에게 있는 병력은 수도 근위대가 전부였다.

흑사병으로 그 누구도 경거망동을 못 하게 눌려 있는 동안 빨리 평민들을 모집해 규모 있는 상비군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되바라진 것도 말이지⋯⋯.’

철없는 망아지같이 날뛰는 소녀를 어엿한 왕비감으로 길들이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외양은 엄밀히 따지자면 레오 3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전형적인 미녀를 좋아했다.

조형미가 뛰어나고 분위기는 청순하면서도 화려한 쪽이 레오 3세의 눈을 잡아끄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싱싱한 젊음과, 톡 쏘는 성격의 합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큰 키와 굴곡 있는 몸매도 나쁘지 않았다.

입안의 혀처럼 굴었던 젊은 시절의 루비나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레오 3세는 이렇게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계획을 짜고 실행까지 시킨 스스로의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다.

이번 일 중 가장 걸출한 부분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도 왕비 책봉을 알리지 않은 거였다.

체자레와 약혼 정도 시키겠거니 하고 딸을 보냈는데 막상 왕의 계비가 되어 있어서 곡식을 빼돌리지도 못하고 홀라당 왕가에 다 먹히면 그 표정이 얼마나 볼만할까!

‘낄낄낄.’

혼자서 ‘태양의 홀’의 하객석 의자에 앉아 좋아하고 있던 레오 3세의 귀에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델피아노사?”

벌써 델피아노사가 새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시간인가?

아니, 도착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단장을 하고 홀에 올라오기에는 확실히 이른 시간이다.

예식은 아직 한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국왕의 짜증에 홀 장식 마무리에 분주하던 왕궁 시종들도 멈춰서서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왕비 책봉을 알리는 국왕의 교지를 단상 위에 올려놓던 사람도,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 끼익, 텅!

‘태양의 홀’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친애하는 국왕 폐하.”

그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국왕은 남자의 정체를 파악한 다음에 불퉁하게 내뱉었다.

“체자레!”

피사노 공작 체자레는 미끈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기별도 없이 쳐들어오는 게냐!”

국왕은 노기를 참지 못했다.

“루비나가 보냈어?”

그는 괜스레 찔려 성을 내며 말했다.

“루비나한테 전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주제를 몰라, 주제를!”

레오 3세는 루비나의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어미는 바라면 안 될 걸 바라고 끼어들면 안 될 데에 끼어들어. 그래서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제 발 저린 자는 장광설로 아들을 훈계했다.

“돌아가서 똑똑히 전해라. 가진 거에 만족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국왕의 제수이자 공작의 어미면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여자야! 난 할 만큼 챙겨줬어!”

‘주제를 모른다’는 레오 3세의 말에, 체자레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손의 힘을 풀었다.

반박할 말이 무수히 많았지만 모두 다 마음에서 지웠다.

시시비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바뀌면 됐다.

“아버지. 책봉, 철회하시죠.”

레오 3세는 눈을 부라렸다. 호칭도, 말의 내용도 엉망진창이었다.

“네 이놈, 내가 했던 말은 발등으로 들은 게야?! 썩 꺼져! 좋은 날에 부정 태우지 말고 나가!”

체자레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 레오 3세에게 바짝 붙었다.

근골이 큰 아버지와 호리호리한 아들이 붙었다.

그러나 나이 탓에 키가 줄고 등이 굽은 레오 3세는 훌쩍 자라버린 아들 앞에서 왜소해 보였다.

“아버지.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왕비 책봉. 철회하세요.”

“이 새끼가!”

레오 3세는 오른손을 들어 체자레의 따귀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손은 장성한 큰아들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체자레는 물빛 눈에 형형한 안광을 띠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책봉. 철회하세요.”

레오 3세는 자기의 팔목이 아들에게 잡혔다는 사실에 분을 이기지 못했다.

“이, 이⋯⋯. 미친⋯⋯! 근위병! 근위병!”

아들에게 놓여난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당장 들어와서 이 고얀 놈을 끌어내라! 감히 국왕의 옥체에 손을 대었다!”

‘태양의 홀’의 열린 문에서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군장을 모두 갖춘 자들이었다. 그런데 복장이 달랐다.

“이 무슨⋯⋯?”

섬찟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레오 3세는 몰려 들어온 군사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국왕 직속 근위대의 예장을 두른 자들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으며, 투박한 갈색 어깨 장식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내 근위대는 어디로 갔느냐!”

체자레는 빤빤하게 답했다.

“저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총사령관으로서, 왕궁 근위대조차도 제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눈이 번득였다.

“잠시 교대를 시켰습니다. 지금 들어온 친구들은 근위대 대신 팔라지오 카를로의 치안을 살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지요.”

피사노 영지의 사병에 레오 3세가 전국에서 모아다 준 영주들의 군사가 섞여들어 만들어진,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한 상비군이었다.

체자레의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레오 3세를 에워쌌다.

“국왕 폐하를 연단 앞으로 모셔라.”

체자레는 연단에 국왕의 교지가 올라가 있는 것을 눈으로 흘깃 확인했다.

“교지 수정을 도와드려야겠다.”

레오 3세는 몸부림을 쳤지만 완전군장을 한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국왕에게 손을 댈 수는 없어서, 몸으로 부대끼며 가두어 왕을 연단 앞까지 모셔갔다.

“자. 아버지.”

체자레는 턱짓을 했다.

체자레의 병사들 중 지휘관의 복장을 한 자—체자레의 부관 중 하나였다—가 잉크를 묻힌 깃펜을 강제로 레오 3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왕은 깃펜을 잡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부관의 악력에 손목을 꽉 잡히자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체자레는 국왕의 교지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데 마레 여백작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국왕 레오 3세, 레오 데 카를로와 혼인한다.」

단출한 교지였다. 혼인 선물이었을 백작위와 각종 사치품은 미리 하사했기 때문에 본편에 넣을 내용이 거의 없었다.

체자레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름만 바꾸면 되겠네.”

그는 레오 3세에게 말했다.

“아버지, 수정하시죠. ‘레오 3세’를 ‘피사노 공작’으로만 고치면 되겠어요.”

레오 3세는 아들의 부관에게 손목이 잡힌 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체자레! 너 감히 무슨 짓이냐!”

체자레는 레오 3세의 협박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글씨 쓰기가 불편하신가? 제가 직접 고쳐 드리지요.”

체자레는 깃펜을 하나 더 받아들어, ‘국왕 레오 3세, 레오 데 카를로’를 찍찍 지우고 ‘피사노 공작, 체자레 데 카를로’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인하시죠.”

레오 3세의 손목을 붙잡은 부관의 손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손등에 시퍼렇게 얽은 정맥이 터질 듯이 힘을 주어도 체자레의 부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때 왕성했던 레오 3세는 젊은이의 힘에 도저히 더는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무한한 굴욕감을 느끼며, 깃펜을 움직여 이름을 적었다.

- 레오 3세.

국왕의 서명은 짧았다. 체자레는 국왕의 교지를 집어 들어 레오 3세의 품에 안겼다.

“조금 있다가 신부가 올라오면 아버지께서 친히 낭독해 주시죠.”

레오 3세는 눈에서 불을 뿜으며 외쳤다.

“너 네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는 군사들에게 붙들려 있는 상황 탓에 언성을 올리지 못하고, 이를 갈며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댔다.

“이건 쿠데타야!”

‘쿠데타’라는 이야기가 레오 3세의 입에서 나오자, 체자레는 눈짓을 해서 부하들을 물러나게 했다.

군사들이 일제히 뒤로 빠지자 레오 3세는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제 군사들이 국왕 폐하께 실례를 했군요.”

체자레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예식용 제식검이 아니라,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진짜 검이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 푹!

사방에 피가 튀겼다. 레오 3세의 얼굴에도, 체자레의 상의에도 새빨간 선혈이 가득 묻었다.

- 풀썩.

검에 맞은 사람은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바닥에 무너졌다.

죽은 자는 레오 3세의 손목을 잡아 사인을 강제했던 체자레의 부관이었다.

체자레는 느릿하게 선언했다.

“감히 국왕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댔던 무엄한 자는 제가 직접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레오 3세는 물론이고 체자레의 군인들과 왕궁 시종들까지, 모두가 경악해서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쿠데타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실제로 국왕 폐하의 옥체는 멀쩡하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으나 피 묻은 검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그다음 사람의 피도 칼이 머금을 것 같은, 서슬 퍼런 기세였다.

“다친 사람도 없고요.”

체자레는 쓰러진 부관을 발로 툭 쳤다.

“죄를 지은 자 빼고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체자레의 눈에는 광기가 번들거렸고 입가는 굳어 있어서 표정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 좋은 날에 죽상들 하고 있지 마시고, 어서 준비를 마저 하시지요. 예식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체자레의 재촉에 왕궁 시종들이 먼저 황급히 흩어졌다.

군사들은 제 자리에서 위치를 지켰고 레오 3세는 모멸감에 부들부들 떠느라 이동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 끼익.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태양의 홀’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그 뒤에는 델피아노사 경의 인도를 따라 예식홀로 올라온,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오늘의 새신부가 있었다.

아리아드네였다.

체자레는 검을 다시 제자리에 꽂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내 신부 왔는가.”

체자레의 물빛 눈이 처음으로 휘어지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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