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변화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흰 터번과 전신을 덮는 긴 로브를 걸친 채 낙타의 등 위에서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막은 끝이 없었다.
‘사막’ 하면 생각나는 광활한 하얀 모래가 아니었다.
메마른 대지 위에 도저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낮은 관목이 듬성듬성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건조한 공기와 갈라진 지표면이 인간의 출입을 불허하는 듯한, 신비함조차 없이 죽어버린 땅이었다.
“허⋯⋯.”
그러나 이 땅을 한 뙈기라도 더 얻겠다고 성전에 참여한 중앙대륙의 기사들과 무어 제국의 이교도들은 말라붙은 대지 위에 피를 아낌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그것이 성지, 예사크가 가진 상징성이었다.
“도대체 이 땅이 뭐가 그리 좋다고⋯⋯.”
라파엘과 함께 예사크 행에 오른 보카네그로 상회 사람이 혀를 찼다.
“저는 상인이라 그런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어 제국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기는 향신료라던가 상아 같이 돈 되는 것들이 나기라도 하지요. 여기는 정말로 불모지입니다. 하다못해 농사도 못 지을 땅 아닙니까. 도대체 이게 뭐가 그리 좋다고⋯⋯.”
라파엘은 미소를 지으며 상인에게 대답했다. 다정한 말투였다.
“세상을 단편적으로만 보니 온전하게 보이질 않지.”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생각이 짧은 상인에게서 시선을 떼서 황무지 너머에 있을 고도, 예사크의 무너진 성벽을 상상했다.
신의 아들, 에사크의 곤이 가르침을 설파하고 그것이 최초의 <명상록>으로 정리되던 땅이다.
“예사크 성을 가지게 되는 군주는 바로 중앙대륙에서 ‘황제’로 칭할 수 있는 유일한 군주가 된다네. ‘황제’에게는 왕을 책봉할 권한이 있어. 제아무리 중앙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진 군세가 볼품없어도 그 군주는 그 어떤 왕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는 세속의 절대자가 되는 거라네.”
라파엘의 얼굴에 희미한 비웃음이 서렸다.
“항신료를 실어날라서 버는 것만이 황금이 아닐세. 권세에는 자연히 황금이 따라와.”
그는 중앙 정치에서 이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늙다리들을 생각했다. 한낱 봉건영주가 이럴진대, 통치권을 지닌 군주들은 얼마나 더할까?
“중앙대륙에 라탄 제국 이후로 최초의 황제가 생기면, 내놓으라 하는 대공과 공작들이 자기들의 왕 밑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뭐든지 바쳐서 ‘왕’의 칭호를 얻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황금이건, 군대이건, 본토에 붙은 영지이건, 영지와 한 세트처럼 딸려오는 군주의 딸이건.
라파엘은 상대방이 받아만 준다면 마누라를 바칠 놈도 있으리라 확신했다.
독립, 자율성이란 그토록 달콤한 것이었다.
“작위와 황금을 맞바꾸게 되려나요?”
“새로운 ‘황제’는 자기 수하들에게는 충성의 대가로 작위를 뿌리고, 기여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황금을 받고 작위를 뿌리겠지. 꽃놀이패야.”
‘성전’은 한 줌의 뼛속까지 신실한 자들을 제외하면 본토에서 패배한 자들의 패자부활전이다.
신앙의 숭고한 탈을 뒤집어쓴 채 일확천금, 인생 역전을 노리고 몰려든 떨거지들의 모임.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사랑하는 라파엘은 <명상록>을 뜯어먹을 듯이 맹신하는 사람들과도 잘 맞지 않았지만 인생 한 방을 노리고 모여든 루저들은 혐오했다.
그러나 그의 친우가 그 덩어리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고, 라파엘 본인도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씁.”
입맛이 썼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원.
“소후작님,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보카네그로 상인의 목소리가 라파엘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저 앞에 중앙대륙식 주둔지가 보입니다! 십자군임이 틀림없습니다!”
태양에 약한 라파엘의 눈에는 모래바람과 아지랑이 사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십자군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건 중앙대륙 군사들로부터 검문을 당한 뒤였다.
“거기, 누구냐!”
중앙대륙 북쪽에서 쓰는 언어였다. 슈테른하임 공국인 같았다.
라파엘은 터번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눈처럼 흰 피부가 빛났다.
“제3차 십자군을 찾아왔소. 에트루스칸 왕국의 발데사르 소후작이오.”
검문병은 에트루스칸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라파엘의 얼굴을 보고 중앙대륙인이라는 사실은 바로 알아챘다.
라파엘은 터번을 다시 쓰며 대륙공용어인 고대 라탄어로 재차 말했다.
“성황청의 사자로 왔소. 나를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에게 안내하시오.”
아리아드네와 입을 맞춘 대로였다.
일반 병사인 검문병은 라탄 공용어도 하지 못했으나 ‘성황청’ 정도는 알아들었다.
상대방이 지체 높은 손님이라는 것을 파악한 그는 라파엘과 그 일행을 주둔지 안쪽으로 안내했다.
* * *
그러나 불운하게도, 검문병이 라파엘 일행을 안내한 곳은 알폰소의 막사가 아닌 십자군 총사령관 율덴부르크 대공의 막사였다.
제3차 십자군이 출정할 때까지만 해도 갈색 머리에 새치가 희끗희끗 섞인 정도였지만 지금은 새치가 머리카락을 점령하고 있는 율덴부르크 대공은 피곤한 기색으로 라파엘을 맞이했다.
지식인 사이의 공용어인 라탄 제국의 고어였다.
“중앙대륙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네. 반갑소이다. 예삽교의 자식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환영하오.”
그는 덧붙였다.
“어떤 용무로 예까지 오셨는가.”
“중앙대륙의 마지막 신앙인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에트루스칸 왕국, 발데사르 후작가의 장남인 라파엘 데 발데사르라고 합니다.”
라파엘은 매끈매끈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파도바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성황청에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에트루스칸 교구에서 주관하는 젊은 신학자 모임인 ‘베룸 쿠에리티스’에도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의 심부름은 성직자가 아니라 성직자의 딸이 시킨 심부름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와 동시에, 품에 넣고 있던 편지 두 통 중 한 통을 꺼내 율덴부르크 대공에게 건넸다.
아리아드네가 라파엘의 무탈한 배달을 위해 준비해 준, 성황청의 도장이 찍힌 자금출처 증빙서였다.
대공이 이를 읽는 사이, 라파엘은 자신의 공식적인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성황청의 에트루스칸 내 교구에서 저희 왕국의 후계자이신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님께 후원금을 전달코자 합니다. 십시일반으로 경주해 모인 돈이라고 합니다. 영광스럽게도 제가 그 대리인으로 예사크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라파엘은 입술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가짜 알리바이를 댔다.
율덴부르크 대공은 약간의 인상을 썼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총사령관이라면 ‘성전에 들어오는 수입은 모두 다 총사령관에게 바치고 추후 나누자’고 강짜를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율덴부르크 대공은 공평에 살고 공평에 죽는 남자였다.
재정이 아무리 쪼들릴지언정,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손대지 않았다.
“음.”
율덴부르크 대공이 막 알폰소 왕자를 불러오라고 시키려고 했을 때, 총사령관 막사의 휘장이 걷히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라파엘!”
익숙한 목소리였다. 라파엘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선 남자의 실루엣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올올히 짜낸 황금처럼 빛나던 머리카락은 태양에 바래 밀짚처럼 밝아져 있었고, 제때 자르지 못해 목선까지 내려와 있었다.
몸집이 큰 편이었지만 소년같이 앳된 선이 있었던 체형은 누가 봐도 강건했다.
둘의 키는 원래 비슷했었지만 그간 훌쩍 자라 이젠 라파엘보다도 반 뼘도 넘게 더 컸다.
어깨는 떡 벌어졌고 흉통은 웬만한 성인 남자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왕자 전하⋯⋯.”
예를 취하려던 라파엘을, 알폰소 왕자는 성큼성큼 다가가 거리낌 없이 포옹해 버렸다.
“이렇게나 먼 길을! 고생 많았다!”
왕자에게서는 은은하게 배인 피와 땀, 고름과 죽음, 그리고 승리와 전리품의 냄새가 났다.
* * *
아리아드네가 백작으로 봉해지고, 피사노 공작의 약혼녀가 된 일에 가장 슬퍼한 사람은 레오 3세 정도를 제외한다면 단연코 이사벨라였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방 안에 틀어박혀 3일 밤낮을 곡기를 끊고 울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복 여동생과 자신을 배제하고 동생만 밀어주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지금도 그녀는 ‘소녀들의 응접실’에 앉아 한 맺힌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 층 현관에서 소란이 있었다.
이사벨라는 응접실에서 나가 2층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사노 공작님 오셨습니까.”
집사 니콜로가 일 도메스티코에게 맡기지도 않고 한달음에 현관문에 뛰쳐나가 직접 체자레 공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체자레 공작은 공식 약혼자가 된 뒤로 데 마레 대저택이 마치 제집인 양 드나들었다.
“음. 아가씨 계신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바로 모시고 내려오겠습니다.”
미리 나갈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체자레는 응접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현관에 서서 기다렸고, 아리아드네는 손님이 현관에 서 있는 시간이 실례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나타났다.
훤칠한 큰 키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나타나자, 체자레는 한 걸음 다가서서 그녀에게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왔어? 아가씨.”
그녀가 나란히 서서 그의 팔에 장갑 낀 손을 얹자 체자레는 다정하게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리며 뭐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거리가 멀어 이사벨라에게는 그 말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흰 모피와 진주 머리 장식으로 고상하게 꾸민 아리아드네는 체자레 공작의 에스코트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 있었다.
수줍어한다거나, 고마워하는 느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사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사교계에서 귀족 영애의 모범이라며 칭송할만한 아리아드네의 꼿꼿한 자세마저 얄미웠다.
‘저 거만한 계집애 같으니⋯⋯!’
체자레 공작은 수도 모든 소녀들의 꿈이었다.
제아무리 백작위를 받았다고 하지만 벼락출세한 아리아드네 계집애 따위가 저렇게 박대할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체자레 공작은 미약이라도 먹었는지 불쾌해하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뭐라고 말을 하건 크게 웃었고, 매 대화가 끝날 때마다 예뻐 죽겠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 공작의 지분거림 중 절반 정도는 노골적으로 튕겨냈는데, 공작은 그것을 싫은 티 하나 없이 웃으며 받았다.
그는 성심성의껏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하면서 데 마레 대저택의 현관문을 나섰다.
“⋯⋯마차⋯⋯!”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체자레 공작이 마차가 아니라 말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불평하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체자레 공작이 손수 데리러 왔는데 꼴에 대접을 따져?’
이사벨라가 2층 난간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꾹 들어갔다.
이사벨라의 속도 모르고, 체자레 공작은 웃으며 손사래를 치더니,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그윽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에 천사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사벨라는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 ‘화났어, 아가씨?’
여기까지 본 이사벨라는 더는 저 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이 하늘까지 솟아서 씩씩거리며 자기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이복 여동생은 콧대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저 패악질을 다 받아주는 체자레 공작도 제정신이 아니다.
‘돈이 그렇게 좋아?!’
체자레 공작이 자기 여동생에게 이렇게 쩔쩔 멜 이유를 이사벨라는 동생의 부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순 방울뱀 아냐, 저거!’
가질 수 없는 건 깎아내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사벨라는 체자레가 신 포도일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계속 가는 관심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방울뱀은 내심을 잘 숨기고 있으려나?’
돈을 보고 덤비는 게 확실하다면, 이사벨라가 아는 아리아드네라면 아마 체자레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게다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길래 피사노 공작까지 저러는 거야?’
사교계에서는 아리아드네가 수도의 미혼 영애 중 가장 부자인 걸 넘어서, 산 카를로, 아니 에트루스칸 왕국의 최대 거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사벨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은—전보다 더 바빠진 걸 제외하고는—일상생활에서 변한 점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가 갑부가 됐다면 집 안이 넘쳐나도록 모피니 보석이니 향유니 따위를 들였을 텐데, 그녀는 그런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잠깐만, 지금 마침 외출을 하셨겠다?’
아리아드네 본인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의 충실한 사냥개처럼 집 안을 으르렁대고 돌아다니는 빨간 머리 하녀와 멀대 같은 전직 마부놈은 외부에 일정이 있다고 아침 일찍 나간 상태였다.
나머지 식솔들이라면 어떻게든 구슬릴 자신이 있었다.
이사벨라는 보랏빛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2층 복도로 나가 양옆을 살폈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오늘 아리아드네의 서재를 털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