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바뀔 기회
체자레는 마차가 없었던 지난번의 에스코트가 썩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달랑 말 한 마리만 끌고 왔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시꺼먼 속이 뻔히 보였다.
“마차가 없으신 분도 아니고, 이 날씨에 도대체 왜 말을 타고 오신 건가요?”
“그래서 한 필만 가져왔지. 추우면 내가 안아 주면 되잖아.”
체자레는 자기가 걸친 망토를 들어 보였다. 망토 안쪽으로 여우 털 모피가 두껍게 덧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추울까 봐 옷도 따듯한 거로 입고 왔는데.”
아리아드네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주세페가 나간 터라 다른 마부가 왔다.
“마차 한 대를 준비해 줘요.”
큰 그림이 깨지게 생긴 체자레가 항의했다.
“마차? 아니, 그럼 내 레오폴도는 어떻게 데려가라고. 내가 마차에 타면 레오폴도는 혼자서 따라와?”
체자레가 애지중지하는 흑마의 이름이 레오폴도인 모양이었다. 전생과는 다른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체자레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는 저 혼자 타는 건데요?”
“뭐라고?”
“공작님께선 레오폴도와 함께 오셔야죠. 공작님 말씀마따나 레오폴도가 혼자서 마차를 따라올 수는 없잖아요.”
“허!”
체자레는 도저히 아리아드네를 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겨서 약간 신난, 의기양양한 얼굴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판판이 지는데도 귀여워 보이니 이쯤 되면 병이었다.
결국 아리아드네는 혼자서 따뜻한 마차를 타고, 체자레는 말 위에서 덜덜 떨며 길을 떠났다.
다행히 여정은 길지 않았다. 둘은 오래 지나지 않아 체자레의 대저택인 빌라 소로토네에 도착했다.
둘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들어간 곳은 응접실도, 침실도, 온실도 아닌 체자레의 서재였다.
이사벨라의 예단과는 다르게 데이트가 아니라 일 때문에 만난 것이다.
손님을 위해 미리 덥혀놓은 서재에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나무 냄새와 뒤섞여서 났다.
“와인 한 잔?”
“됐어요.”
일이 아니라 데이트로 분위기를 몰고 가고 싶었던 체자레는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앉았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순순히 보고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무사히 왕궁으로 돌아가셨어. 내쫓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 뒤로 별말은 없대요?”
“무슨 소리를 들을 기회도 없었대. 얼굴도 못 봤어. 아버지께선 신붓감을 아들한테 빼앗기신 충격이 크셨는지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안 나오고 계신다는군.”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체자레는 아비에 대한 비웃음이 절로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선 당신이 시킨 일을 충실히 하고 계셔.”
수도의 흑사병은 추워지는 날씨와 함께 한풀 꺾인 상태였다.
애초에 산 카를로는 레오 3세의 발작적인 방역에 더한 아리아드네와 랑부예 간호원단의 활약 덕에 남부 도시들처럼 흑사병이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기세마저 꺾였으니, 지난 2주 간 성벽 안에서는 단 한 명의 흑사병 환자도 나오지 않았다.
수도 사람들은 슬그머니 집구석에서 나와 가게와 시장을 방문했고, 수도 사교계 역시 기지개를 켰다.
슬슬 소규모 모임이나 작은 티파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온 사방을 돌면서 국왕 폐하와 루비나 공작 부인이 싸웠는데, 체자레 공작이 뛰쳐들어가 엄마 편을 들었다고 입소문을 내고 계시지.”
루비나가 딱 좋아할 만한 활동이었다.
자신이 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선전선동하는 것. 만인의 부러움을 사고, 선망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
무대의 불이 꺼진 이후에 대기실에서 혼자 외로움에 몸을 떠는 것은 남겨진 배우의 몫일 것이다.
“국왕 폐하 칭찬도 잊지 않고 있겠죠?”
“우리 어머니 주특기가 그거 아닌가. 아버지 올려치기. 아들이 개겼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효심을 기특하게 여겨 산 카를로 최고의 신붓감과 약혼을 명하셨다는 이야기도 떠들고 다니고 계시지.”
체자레는 굳이 루비나가 ‘그 계집애를 그렇게까지 칭찬해줘야 한단 말이냐!’ 고 짜증을 있는 대로 내다가 마지못해 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아리아드네에게 전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는 풋,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분위기 좀 잡지 마세요.”
“안 통했나?”
“안 통해요.”
체자레는 ‘어린 아가씨들은 이러면 백발백중 다 넘어가던데’,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히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수준의 철벽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뚫지 못하는 방패를 뚫는 창이야말로 진정한 신물(神物)인 법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야속한 아리아드네는 일 얘기로 곧장 돌아갔다.
“루비나 공작 부인께서 퍼트리는 이야기가 꼭 국왕 폐하 귀에 들어가도록 하세요.”
“알았어.”
“사교계에서 국왕 폐하가 아들에게 약혼을 명하신 부분이 칭송을 받고 있다고 강조가 되어야 폐하께서 허튼짓을 못 하실 거예요.”
체자레는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도 나와의 약혼이 취소되길 바라는 건 아니구나?”
아리아드네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죠?”
“아니, 국왕 폐하께서 헛짓거리를 못 하게 해야 한다길래. 예상되는 국왕 폐하의 헛짓거리라면 약혼을 파기시키시는 것 아닌가?”
“음, 제가 왜 왕비 책봉은 싫어하면서 공과의 약혼은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죠?”
“신랑이 다르잖아!”
60대의 늙다리 왕과 또래의 팔팔한 미남 공작은 급이 다른 법이다.
“그쪽은 신랑 아니시고, 약혼자.”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한테는 다 똑같아요. 다 취소되면 전 도리어 좋은데요.”
아리아드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짐짓 농담처럼 던졌지만 진심이었다.
“제가 걱정하는 국왕 폐하의 허튼 짓거리는 체자레 공의 투옥이나 감금 같은 거예요. 아들 하나가 이미 국경 밖에 나가 있으니 추방은 안 하시겠네요.”
아리아드네는 이 정도면 체자레가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목 위와 고간에 머리가 두 개 있다는 남자는 오늘은 목 위에 있는 머리를 안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투옥은 좀 그런데, 감금되면 당신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다. 감금이면 내 집에 있을 수도 있고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
“아, 좀!”
* * *
“라파엘! 그쪽에 앉게. 오느라 수고 많았어.”
라파엘은 알폰소의 막사에 들어서서 양털로 덮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의자라기보단 등받이가 남도록 대충 자른 통나무였다.
그러나 이것이 이 방 안에서 가장 좋은 가구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파엘은 총사령관의 막사에서 알폰소의 막사로 이동하는 동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부터 깍듯한 인사를 받았다.
진심으로 우러나는 존경과 사랑의 인사였다.
알폰소의 막사 역시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부의 장식은 단출하다 못해 허름했지만 사람들의 기세와 흥분은 진짜였다.
“알폰소. 갈리코 왕국에서 탈출할 때 딱 왕자 직속 기사들만 데리고 나온 거 아니었어? 설마 근위대까지 다 데리고 나왔던 거야?”
라파엘은 막사 바깥쪽을 손짓했다.
“200명은 족히 되겠어. 저 사람들은 다 누구야?”
손님에게 양털 의자를 내주고, 본인은 현지인이 짠 깔개를 대충 얹은 벤치 위에 몸을 던진 알폰소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늘었어. 지휘관을 잃은 기사들이나, 크게 패배하고 인원이 줄어든 부대의 사람들 같은.”
라파엘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탈영병도 있었다. 주로 그가 거둬주지 않으면 큰일 나는 자들이었다.
알폰소는 그간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주워오듯 갈 곳 없는 십자군 구성원들을 모았다.
부대 살림을 맡은 엘코 경이 몸서리치며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속이 없는 군인은 천덕꾸러기다. 알폰소는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가장 잘 알았다.
“자네가 다 먹여 살리고 있는 거야?”
“빠듯해.”
알폰소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태양 빛에 새카맣게 탄 피부 덕에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더더욱 두드려졌다.
“어찌어찌 꾸려나가고는 있어. 요샌 내가 부대 지휘관인지 현상금 사냥꾼인지 분간이 안 간다니까!”
전리품을 획득하거나 값나가는 포로를 잡으면 공을 세운 부대는 자기 몫을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알폰소는 포로 몸값 장사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이후로 적군 지휘관을 전략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도시를 약탈해야 하는 전리품 노획보다 이쪽이 더 성품에 맞았다.
라파엘은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일세. 본국에서 지원이 왔어.”
알폰소는 반색하며 답했다.
“아, 그래! 안 그래도 전해 들었어. 에트루스칸 교구에서 보낸 돈이라지? 액수가 어떻게 되나?”
“1만 두카토.”
“1만 두카토?”
알폰소는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정말로, 1만 두카토라고?”
“그래. 황금이 어찌나 무거운지 들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지 뭔가!”
라파엘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바로 가져가. 누가 훔쳐 갈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왔어.”
“에트루스칸 교구에 그런 여윳돈이 있었어?”
알폰소의 질문에, 라파엘은 사실 이건 에트루스칸 교구가 아닌 아리아드네가 사적으로 보낸 돈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알폰소가 에트루스칸 왕국을 떠날 때 즈음에는 아리아드네는 왕국을 쥐락펴락하는 거부가 아닌, 그저 사교계에 이름이 조금 난 추기경의 서출 영애에 불과했기 때문에 설명이 길어질 터였다.
“그게⋯⋯.”
“대대장님!”
막사 밖에서 알폰소의 수하가 휘장을 걷어내고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라파엘로서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음? 무슨 일이지?”
“총사령관님 막사에서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전원 출동 대기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알폰소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졌다.
“적군인가?”
“아직은 모릅니다. 근처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부하는 덧붙였다.
“추가 지시가 있으면 바로 알리러 오겠습니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여 부하를 막사 밖으로 내보냈다.
“상황이 조금 안 좋은 모양이야.”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폰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갑주를 챙기기 시작했다.
공들여서 손질했는지 광택이 돌았지만 사용감이 많이 드는, 낡아버린 갑옷이었다.
“이제 새 걸로 바꿀 수 있겠구먼.”
알폰소는 웃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오래 써야지.”
그는 갑옷을 한 조각 한 조각 능숙하게 몸에 걸쳤다.
알폰소의 부대는 지금 시종까지도 다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는지, 왕자가 손수 갑옷을 입는 모습에 라파엘은 혀를 차며 친구를 도와주었다.
“살다 살다 내가 이런 짓까지 다 해 보네.”
“하하.”
알폰소는 자기가 무슨 짓까지 해서 살아남고 있는 중인지 굳이 투덜대는 라파엘에게 토로하진 않았다.
투구를 쓰기 전, 알폰소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저기⋯⋯.”
“음?”
“⋯⋯아리는, 잘 있나?”
라파엘은 잠시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녀는 잘 있다고, 오매불망 너만 그리고 있다고, 내 품속에는 아름다운 그녀가 너에게 보내는 절절한 사랑 편지가 들어 있고 이 1만 두카토의 군자금도 모두 그녀가 재주를 부려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어야 했지만 도통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누군가가—질투의 악마가—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라파엘이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막사 휘장을 들치고 예의 그 부하가 재차 들어왔다.
“대대장님! 출발해야 합니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투구를 쓰며 라파엘에게 말했다.
“다녀와서 마저 이야기하세. 내가 없는 동안 필요한 것이나 아니면 나한테 전달할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엘코 경에게 이야기해.”
‘그녀는 잘 있어’, 라고 이야기해야 했지만 이미 놓친 타이밍이었다.
라파엘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올게. 조금 이따 보자.”
“⋯⋯그래.”
다녀와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하루는 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