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편지
알폰소는 큰 발걸음으로 막사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투구를 내려놓았다.
그가 죔쇠를 풀어 갑옷을 벗기 시작하자 곧바로 엘코 경이 옆에 붙어 그를 도왔다.
“⋯⋯엘코.”
알폰소가 좋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예, 전하?”
“도와주지 않아도 돼.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그러나 엘코 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어떤 기사도 종자 없이 혼자 갑옷을 벗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종자가 아니야.”
나의 기사지. 라고 말하려다가 알폰소는 입을 다물었다.
엘코 경은 이제 영원히 검을 들 수 없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엘코 경은 기사였으나, 그 말을 듣는 엘코 경의 기분이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알폰소는 엘코 경을 만류했다.
“종자가 필요하다면 따로 들여서 허드렛일을 시키면 돼. 그대는 이런 일 하지 말도록 해.”
엘코 경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전하. 저를 내치지 마십시오.”
“내치다니!”
알폰소는 크게 부인했다.
“당치도 않네! 자네가 할 수 있는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이야기야.”
“⋯⋯왕자님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더 중요한 일이 도대체 무에 있겠습니까?”
엘코 경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에야, 알폰소가 할 말이 없었다. 엘코 경은 강하게 말했다.
“왕자님께서는 갈 곳 없는 저를 거둬 주셨습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저를 한 번 더 거둬 주셨지요.”
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 목숨은 전하의 것입니다. 왕자님의 일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제 기쁨입니다. 저를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결국 알폰소는 묵묵히 갑옷을 맡겼다.
엘코 경은 하나 남은 손으로 꼼꼼히 알폰소의 갑옷 죔쇠를 모두 풀어냈고, 각 갑옷 구성 부분을 떼어내어 막사 구석에 조심히 쌓아 올렸다.
두꺼운 쇳덩어리에서 벗어난 알폰소는 책상에 앉았다.
그는 촛불에 의지해 자기 책상 위에 편지 두 통이 있음을 확인했다.
엘코 경은 막사를 떠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알폰소의 뒤에서 기름 먹인 천으로 알폰소의 갑옷을 닦았다.
알폰소가 집어 든 첫 번째 편지는 성황청의 자금출처 증빙서였다.
“성황청 지역 교구에서 이런 걸 보내주다니. 아버지보다도 낫군그래.”
알폰소의 쓴웃음에, 엘코 경은 맞장구쳤다.
“교구민들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그들도 왕자님께서 진정한 군주의 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거겠지요.”
아리아드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알폰소는 조금 웃었을 뿐, 엘코 경의 멘트에 대해서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알폰소가 두 번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엘코 경은 숨소리를 고르게 내려고 노력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갑옷 위에서 미끈거리는 게 기름포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땀인지 분간이 잘 안 갈 정도였다.
- 부스럭.
알폰소는 별다른 표기가 없는 겉봉을 뜯고 안쪽에 든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
그는 굳은 표정으로 편지의 첫 문단을 반복해서 읽었다.
“⋯⋯엘코.”
“⋯⋯예, 전하.”
“잠시만 혼자 있게 해 주겠나?”
엘코 경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로⋯⋯?”
“혼자 있게 해줘.”
알폰소가 이렇게 강경한 것은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엘코 경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전하.”
그는 닦던 갑옷을 내려놓고 마지못해 막사 밖으로 나갔다.
* * *
혼자 남은 알폰소는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를 재차 노려보았다.
「라리에사가, 사랑하는 알폰소를 그리며.」
인삿말 이후로 여백을 길게 둔 편지였다.
하지만 긴 여백은 종이였을 뿐,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 첫 문단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돌입했다.
「혹여나 알고 싶어 하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제가 알려드려요. 당신의 전 애인이 당신의 배다른 형님과 약혼했어요.」
인사말부터 영 불편했는데, 첫 문장부터 알폰소의 숨이 턱 막혀왔다.
「내가 말했었지요. 그녀가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의 배다른 형님을 인지해 달라고 국왕 폐하께 매달렸다고요.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 정식으로 왕실 구성원이 된 기념 무도회에서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은 그와의 첫 춤을 췄다고요.
이제 확실해졌네요. 그녀는 당신을 저버렸어요.」
알폰소의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은 없었다.
「‘태양의 홀’이 열렸고, 국왕 폐하께서 직접 약혼식을 주재하셨다고 해요.
그녀는 ‘데 마레 여백작’ 작위 또한 수여 받았습니다.
당신이 없는 동안, 그녀는 신분 없이 겉돌던 산 카를로 사교계에 귀족 작위를 받아 정식으로 편입되었고,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가 방계 공작의 약혼녀로서 산 카를로에서 가장 지체 높은 미혼 여성이 되었네요.
무엇에 대한 대가로 받아낸 이득일까요.」
그 뒤로는 쓸데없는 이야기만 쓰여 있었다.
라리에사 대공녀 본인이 알폰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 자신의 일상에 대한 공유, 그리고 알폰소의 공훈에 대한 치하였다.
‘내가 세운 전공들은 그녀가 어떻게 아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없었다.
갈리코 왕국은 이번 십자군 전쟁의 가장 큰 후원자이고, 외드 대공은 갈리코 왕실의 실권자 중 하나이다.
아마 공식 및 비공식 루트로 전쟁 상황에 대해 보고가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한참을 알폰소의 훌륭함을 치켜세워주던 편지는 라리에사의 조언으로 끝맺었다.
「십자군에서 당신의 위명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기쁘게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돌아오셔요.
고귀한 혈통의 당신은 일확천금을 찾아 떠난 개돼지들처럼 굳이 전쟁터에서 피와 고름에 시달리지 않으셔도 계승할 왕좌가 있습니다.
산 카를로에서 들려오는 당신의 배다른 형님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에트루스칸 군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반쪽짜리 서출이 나대게 내버려 둘 때는 지났습니다. 당신이 가진 걸 지켜요.
집으로 돌아가셔서 굳건히 자리를 잡으시고 저를 어서 맞이해 주세요. 저 또한 당신을 뵙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당신만을 바라보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라리에사 올림.」
‘아리아드네가 나를 배신했다.’
알폰소 왕자는 위 문장을 속으로 여러 번, 되뇌어 보았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를 배신했다.’
한 번, 두 번, 아니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곱씹어 보았지만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라리에사가 고약한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자기를 꾸며내기 위한 거짓말은 밥 먹듯이 하는 여자였으되 정치, 군사, 정세 등등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실관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이따위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내 편지에 적는다면 도래할 후폭풍을 감당할 담력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리아드네가 그를 배신했다니, 그게 말이나 되나?
알폰소는 다시 한번, 멍한 상태에서 문장을 재구성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체자레 데 코모이다.’
알폰소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문장은 또 다른 형태를 띠며 제멋대로 재조합됐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더는 알폰소 데 카를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 두근.
심장이 자기 마음대로 뛰었다.
알폰소는 나머지는 다 참을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와 약혼했다고 해도, 혹여나 그를 팔아넘기고 백작위를 받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같아서는 다 괜찮다고, 자기가 참을 수 있다고 외치며 그녀를 다시 포옹할 수 있었다.
남들이 보면 호구 멍청이라고 욕하겠지만 남의 눈 따위, 남의 눈일 뿐이다.
그녀는 그가 이 삭막한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유였다.
언젠가, 금의환향해서 그녀를 품에 안고 산 카를로 성벽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꿈을 꾸었다.
떠나오면서 그녀가 서 있었던 그 성벽 위. 그날 정말로 그녀의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싶었다.
당일에는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현실로 가져오고 싶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정정당당히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돌아가, 세운 전공으로 아버지에게 요구할 생각이었다.
‘나는 정략결혼의 체스말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와 결혼하겠습니다.’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억지 혼인을 깨트리려면—알폰소는 아직 그가 서명한 혼인서약서가 무효임을 알지 못했다—에트루스칸 왕국이 갈리코 왕국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어야 했다.
후방에 안전하게 남아 있어도 될 에트루스칸 왕국의 왕자가 별동대로 최전방을 헤집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기사왕이 되어 갈리코의 국왕이 감히 도발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
그러나 파편화된 문장은 제멋대로 재조합을 거듭해 알폰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알폰소 데 카를로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
쿵.
알폰소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문장은 다시 춤을 췄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작위와 지위를 원했다.
이전에는 알폰소 데 카를로가 그것을 줄 수 있었고 지금은 아니다.
체자레 데 코모는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던 것을 주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는 부정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의 파도 앞에 단순한 부정은 힘이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단어들은 몰려드는 생각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생각은 끝내 하나의 최종 덩어리로 뭉쳐져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알폰소 데 카를로를 사랑한 적이 없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알폰소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인했다. 그 입술, 그 미소, 그 체온, 그 생기, 그게 모두 가짜일 리는 없었다.
삼일 밤낮을 전쟁터를 휩쓸고도 멀쩡하게 돌아온 알폰소는 갑자기 밀려드는 피로 앞에 나무 책상 위에 고개를 박았다.
주체할 수가 없는 무게였다.
그리고 알폰소의 막사 밖에는 오매불망 안쪽의 기색을 살피는 엘코 경이 있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 * *
동생의 서재 안으로 잠입한 이사벨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리 한번 기가 막히게 해 놨네.’
먼지 한 톨 없었다. 서류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고 좀 이래야 뒤지는 맛이 날 텐데 일체가 정갈했다.
책꽂이는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거기에 꽂혀 있는 것들은 죄다 제본된 책이고 이사벨라가 찾는 장부, 비밀수첩, 남자한테 받은 보석, 기타 뭔가 약점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드르륵!
이사벨라는 거친 손길로 아리아드네의 서랍을 열어 보았으나 거기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잉크병이나 아직 새것인 편지지 따위가 줄지어 정리되어 있었을 뿐이다.
“얜 사람이 뭐 이래?”
화장대 위에 보석이라도 좀 엉켜서 굴러다니고 오래된 화장품이라도 굳어 있고 해야 인간미가 있지, 라고 중얼거리며 이사벨라는 큰 벽장을 홱 열어젖혔다.
“어⋯⋯.”
벽장 안에는 큰 금고가 있었다. 이사벨라는 금고의 자물쇠 부분을 노려보았다. 비밀번호가 아니라 열쇠로 된 자물쇠였다.
‘내가 찾는 것들은 죄다 저 안에 있겠군.’
눈엣가시 같은 ‘푸른 심해의 심장’도, 각종 장부도, 두카토 금화나 다른 값나가는 것들도 다 저 안에 있을 터였다.
이사벨라는 요행을 바라며 금고문을 당겨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쳇.’
그녀는 아리아드네의 서랍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뒤졌다. 혹시나, 만에 하나, 열쇠가 있을까봐여서였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금고 열쇠를 금고 바로 옆에 있는 서랍에 두는 멍청이는 아니었고, 이사벨라의 탐색은 소득 없이 끝났다.
‘아, 짜증 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리아드네의 책상을 마저 뒤지던 그녀의 손끝에 묵직한 양피지 뭉치가 걸렸다.
‘이게 뭐지?’
당겨서 늘릴 수 있는 책상 선반 위에 쌓여 있던 양피지 뭉치였다. 새 종이는 아니었다. 쓰다 만 편지 묶음이었다.
‘⋯⋯?’
이사벨라는 편지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알폰소에게.
오늘은 산 카를로에 비가 많이 내렸어. 같이 비 오는 날 우산 한 개만 쓰고 산책을 하고 싶었었는데⋯⋯.」
“뭐야.”
시시껄렁한 연애편지 모음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받은 것도 아니고, 아리아드네가 알폰소 왕자에게 쓴 편지들이었다. 이사벨라는 혀를 찼다.
‘왕자랑 사귀긴 사귀었나 보네.’
이사벨라에게 이득 될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왕자가 아니라 어디 동네 양아치가 상대고, 찐한 스킨십을 했다는 내용이라도 쓰여 있으면 사교계에 쫙 뿌리기라도 있지. 이따위 걸 어디에다가 써.’
그렇지만 이 편지 뭉치가 오늘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이사벨라는 편지를 쓱쓱 넘기면서 대충 훑어보았다.
‘⋯⋯잠깐만. 근데 왜 안 부쳤지?’
어딘가 이상했다. 이사벨라는 다시 한번 편지들을 싹 훑었다.
편지들은 죄다 쓰다 만 것들이었고, 중간중간에 진짜로 부친 것들도 있어 보였다. 날짜가 비어 있었고, 이 뭉치에는 없었지만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언급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답장이 편지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을뿐더러, 아리아드네가 쓰는 내용에 ‘알폰소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언급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게다가 날짜가⋯⋯. 생각보다 최근이잖아?’
이사벨라는 여기에 무슨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지 뭉치의 맨 뒤로 건너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맨 끝에 있는 편지는 아주 최근에 쓰인 것이었다.
「1123년 12월 22일, 당신을 사랑하는 아리아드네.」
이사벨라의 눈이 커졌다.
‘이건⋯⋯, 체자레 공과의 약혼 후에 쓰인 거잖아!’
그녀는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재빠르게 훑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네 걱정이 더욱 많이 돼. 예사크는 산 카를로보다 기후가 온화하다고는 하지만, 군인의 주둔지가 생활하기 편할 리가 없잖아.」
‘열부 나셨네, 열부 나셨어.’
이사벨라는 혀를 쯧쯧 차며 마저 읽었다.
「⋯⋯날씨가 이러니 아라벨라의 장례식 때 네가 조문을 와줬던 기억이 나. 얼음, 눈 조각, 망토에서 훅 끼치던 냉기, 그리고 쌉싸름한 키스⋯⋯.」
이사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동생 장례식에서 남자랑 붙어먹었다고? 이게 미쳤나?’
애초에 그 장례식이 왜 치러지게 됐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이사벨라였다.
‘이것이, 얌전한 척하더니⋯⋯.’
입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지만 이사벨라의 눈이 조그마해졌다.
입가에는 조그맣고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편지는, 어디가 됐든지 간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편지를 재빠르게 품 안에 챙겨 넣었다.
편지가 없어진 것을 알고 아리아드네가 난리를 피우면 어쩌지, 란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뭐 없어진 거 알면 자기가 어쩔 거야. 증거 하나도 없이 내 소지품이라도 뒤질 거야?’
그래도 가급적 들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의 서랍들을 꽉 닫고, 모든 게 제 위치에 있는지 대충 점검을 마쳤다.
그녀는 서재 입구로 나가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조심스레 발을 뻗어 서재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