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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41화 (241/733)

<제241화> 석연치 않은 고백

빗속의 입맞춤은 부드러웠고, 체자레의 입술은 달콤했다.

그의 입맞춤은 느리고 나긋나긋했지만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체자레의 입술이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덮은 채 그녀의 숨을 들이켰다.

점막과 점막이 닿아 표피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을 옮겼다.

“하⋯⋯.”

체자레는 잠시 입술을 떼고 숨을 내쉬었다. 한탄 같은 한숨이 스쳤다.

그는 상체를 숙여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 싫어하지 마.”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체자레는 재차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두 번째 키스는 좀 더 강렬했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수동적인 그녀에 비해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고른 치열, 촉촉한 입속, 따듯한 숨결, 모두 그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하지만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발견하고 음미하고 경탄했다.

키스 따위야 수천 번도 더 해 보았을 체자레였지만 이곳은 미지의 신대륙이었다.

다른 곳이 인간의 영토라면 여기는 신들의 성역 같았다.

그냥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그녀들과 다르게, 아리아드네는 의미가 있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떼서 그녀의 코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했다.

“나는 네가 필요해. 넌 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어려운 고백이었다. 그 말을 뱉은 체자레는 그 상태 그대로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가랑비가 쉴 새 없이 내리며 그들 둘을 적셨다.

찰나인지 억겁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대지는 고요했고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네가 싫어하면 다 그만둘게. 과음도, 이상한 친구도 다 끊을게. 여자도 너 하나로 끝이야. 너만 있으면 다른 여자는 하나도 필요 없어.”

아리아드네는 왜인지 체자레의 목소리가 울기 직전 같다고 생각했다.

“뭐든 다 할 테니까.”

낮게 잠긴 음성으로 체자레가 속삭였다.

“⋯⋯날 버리지 말아줘.”

이제야 아리아드네는 말을 잊은 채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꿈에서도 그려왔던 그 순간이 드디어 도달했다.

10년쯤 늦게. 혹은 10년쯤 너무 이르게.

전생에서 체자레가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면 그녀는 기쁨의 눈물로 그를 맞이했을 것이다.

언제나 기다려왔다며,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다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매불망 고대했던 이 순간은 감염되고 잘린 왼손 약지와, 서쪽 탑 꼭대기 층의 감옥과, 새 왕비 이사벨라 이후에야 비로소 찾아왔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새까맣게 모르는 이번 생의 체자레의 입을 빌려서.

“⋯⋯.”

아리아드네는 침묵을 골랐다. 이번 침묵은 확실히 길었다. 생각도 골랐고, 단어도 골랐고, 감정도 골랐다.

잘 골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한참이 지나서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러나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낯선 사람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공작님—!! 피사노 공작님!”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체자레는 그녀를 꽉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낯선 남자는 체자레에게는 익숙한 얼굴인 모양이었다.

체자레는 음울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남자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부르짖었다.

“국왕, 폐하의 군대가⋯⋯. 헉헉. 국왕 폐하의 근위병이 빌라 소로토네를 포위했습니다!”

체자레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아리아드네는 동그란 눈으로 체자레의 가복(家僕)을 바라보았다.

“그쪽은 아직 공작님께서 외출하셨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입니다. 근위병이 떼거리로 몰려와 물샐틈없이 모든 출입문을 틀어막고 주변에 대거 포진하고 있습니다!”

체자레는 힘없이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그는 가랑비 속에서 처량하게 읊조렸다.

“아버지께서 기어이 그날의 앙갚음을 하시려는구나.”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빗물이 조각 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이목구비가 몹시 뚜렷한 이 남자의 절망과 체념은 주변 사람을 그 감정 속으로 모두 함께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빚을 받아가시겠다고 작정하시면 내 안 내드릴 요량이 없지 않으냐.”

체자레는 킬킬 웃었다.

“내 목숨도 재산도 작위도⋯⋯. 다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데 다 반납해야지, 암.”

그러나 체자레의 가솔은 고개를 저으며 간곡히 권했다.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공작 각하. 일단 어디로든 몸을 숨기시지요. 당장 내리꽂는 비는 피해야 할 것 아닙니까.”

“피하면, 그 뒤는?”

체자레는 다소 연극적으로 반문했다.

“내가 발 디딘 땅, 숨 쉬는 공기, 모두 지고하신 국왕 폐하의 것 아니냐? 바다 건너 도망이라도 칠까? 망명자처럼?”

“아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집사님께서 약간의 여비를 챙겨주셨습니다. 국왕 폐하의 화가 누그러지실 때까지 며칠만 불똥을 피하시면⋯⋯.”

가솔의 만류에, 체자레는 손을 휘저었다. 그는 타고난 기질상 내리는 비를 피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간 천성에 거슬러 지나치게 오래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그냥 이제는 다 끝내고 싶었다.

“아서라.”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가 요란한 정원을 가득 메웠다.

“돌아간다. 빌라 소로토네로.”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껴안은 팔을 놓고, 휘적휘적 빗속으로 한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뾰족한 목소리가 그의 등을 때린 것은.

“거기 서요. 머저리같이 사지로 기어들어 가겠다고?”

아리아드네가 분노가 서린 녹색 눈동자로 체자레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녀의 전문이었다.

“나한테 방법이 있어요. 지금 당장, 데 마레 저택 안에 들어가서 씻고 반나절쯤 푹 자고 있어요.”

체자레는 대부분은 어이없다는, 약간쯤은 신통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더 꺼낼 수가 남았단 말이야?”

아리아드네는 입을 앙다물고 쏘아붙였다.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진 패가 있어. 그러니까 닥치고 들어가요. 화내기 전에.”

체자레는 굽힐 상대를 정확하게 아는 남자였다. 그는 꾸벅 목례를 해 보였다.

“예, 마님.”

그는 옆에 선 가솔에게 손짓했다.

“너도 인사드려라, 미래의 안주인님이시다.”

가솔은 물색도 없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주인님!”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째려보며 짜증을 냈다.

“아, 좀!”

* * *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를 타고 팔라지오 카를로로 향하며 생각을 다듬었다.

레오 3세가 만나주기만 한다면, 국왕을 어떻게 구슬릴지는 대충 큰 그림을 이미 그려 놓은 터였다.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상념은 다른 것이었다.

‘⋯⋯화나.’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행동을 곱씹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서 화났나?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체자레는 자기가 한 말 중 바꾼 것이 없다.

아리아드네 본인조차도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한 감정만은 진짜였다.

체자레는 분명히, 그녀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하겠다고 했다.

여자도, 친구도, 술도 다 끊겠다고 했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그녀를 포기했다.

‘그런데 빌라 소로토네로 돌아가겠다고?’

거기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

레오 3세는 자신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를 국외로 내보내 전쟁터에서 헤메게 만들었으니만큼 지금 당장 체자레의 목을 칠 수는 없을 것이다.

체자레가 없어지는 순간 알폰소의 안위를 장담할 수도 없게 되고 비앙카를 내놓으라는 타국의 협박과 애걸이 온 사방을 울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순위 왕위계승권자인 비앙카 공녀의 혼처가 정해진다면? 그리고 알폰소 왕자가 무사히 귀국한다면?

레오 3세는 바로 그 순간 체자레에게 황금 잔에 담긴 비소를 내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나만 보겠다며.’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한다면서, 그 달콤한 고백을 던진 바로 그 다음 순간에는 죽으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는 항상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절절한 사랑의 고백을 할 때도 여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 침대에서 뜨겁게 사랑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사람, 그것이 체자레 데 코모였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기에도 애매했다.

사실 체자레 공작의 입장에서는 취할 수 있는 방도가 더는 없었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던가, 아니면 얌전히 국왕의 발치에 무릎 꿇고 처분을 기다리던가.

“하아⋯⋯.”

차라리 나한테 해결해달라고 했으면 됐잖아.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이내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체자레는 그런 종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니 되든 안 되든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말라 죽어버릴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가 그런 남자였다면, 저번 생의 아리아드네도 애초에 그에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항상, 아리아드네는 자발적으로 체자레의 뒤치다꺼리에 뛰어들었다.

‘지긋지긋해.’

그러나 익숙한 루틴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그녀는 묘한 기시감과 편안함 속에, 가장 긴장되어야 할 레오 3세와의 독대로 향하고 있었다.

* * *

팔라지오 카를로의 경비병은 단아한 은마차가 왕궁 정문으로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최근 왕궁에는 항상 오는 얼굴이 아닌 새로운 손님은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새로운 손님을 제지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은마차의 마부는 모자를 살짝 들고는 용건을 밝혔다.

“데 마레 백작님께서 입궁하시려고 합니다.”

경비병은 출입 허가 장부를 뒤적였다. 저런 사람은 없었지만,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없었다.

“귀하께서는 오늘 출입 허가를 받으신 분들의 목록에 없으십니다.”

경비병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왕궁의 분과 약속을 잡으신 후에 다시 들러 주십시오.”

그는 도르래꾼에게 손짓했다.

정문 양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허겁지겁 도르래를 돌려 정문을 닫기 시작했다.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 앞에서 왕궁의 쇠문이 닫히고 있었다.

“잠깐.”

그때, 은마차 안에서 젊은 여자의 저음이 들렸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는 위엄이 있어 왕궁 경비병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도르래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닫다 말고 멈춰서 그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마차 안의 그녀는 창문의 휘장 사이로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그 물건은 여우비 사이 희미한 햇빛을 받아 미약하게 반짝였다.

“이,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은 브로치였다.

월계수를 묘사한 세공이 정교하기는 했으나 값비싼 보석이 박혀 있다거나 달리 값이 크게 나가는 물건이 아니었다.

마차에 탄 젊은 여인은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어투로 말했다.

“랑부예 구휼원장의 표식이다. 국왕 폐하께 랑부예 구휼원장이 알현권을 행사코자 한다고 말씀 아뢰거라.”

그것은 마르그리트 왕비가 랑부예 구휼원장을 역임할 때 생긴 특권이었다.

국왕이 정부의 치맛폭에 푹 싸여서 왕비를 만나려 들지 않을 때, 정무와 관련해서 반드시 나눠야 할 의견이 있으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생긴 것이었다.

비록 레오 3세에게는 거부권이 있었지만, 왕궁 경비병에게는 그 거부권이 없다.

국왕에게 무조건 보고까지는 올려야 한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에게는 레오 3세가 자신과의 독대를 거절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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