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본성을 거스를 순 없지
- 끼리릭.
팔라지오 카를로. 에트루스칸 왕국 본궁의 정문은 마치 마법처럼 열렸다.
그녀는 이 문이 열릴 줄 알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 이거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태양의 홀’에 들어서서 순백의 예복을 차려입은 레오 3세가 원래 준비되어 있었던 그날의 신랑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 확신했다.
레오 3세는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었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국왕과 독대했을 때 그가 그녀를 훑었던 눈길, 결코 너그럽지 않은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선을 넘는 것을 봐줬던 관용.
모두 다 그 이성적 끌림의 부산물이었다.
‘이사벨라 언니 흉내를 한 번 내 볼까.’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를 이리저리 조종해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는 것은 이사벨라의 주전공이었다.
딱히 아리아드네가 전문성을 가진 영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 근처의 참새도 알파벳 정도는 읊을 수 있는 법이다. 무수히 많이 봐 왔다.
“데 마레 여백작님. 안쪽으로 드시지요.”
왕궁 시종이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깍듯하게 에스코트해 국왕의 처소 쪽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비소를 지우지 못한 채 시종에게 물었다.
“바로 알현을 허락하시던가.”
“예. 국왕 폐하의 집무실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번과는 다르게 국왕의 개인 서재가 아닌 공적인 집무실이다.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국왕의 얼굴을 봐야 확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를 또다시 개인 서재로 불렀다면 그것은 국왕이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체자레를 구명코자 하는 아리아드네의 목표를 이루기 곤란해질 수가 있었다.
늙었든 젊었든 질투하는 남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또 깨끗하게 포기했다면 역시 그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포기했다면 날 안으로 들여보내 줬을 리가 없겠지.’
정말로 국왕이 깨끗하게 포기했다면 그녀는 정문에서부터 박대를 당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왕궁 복도에 걸려 있는 거울들을 보며 자신감을 재차 확인했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 위에는 진주 장식을 얹었고, 목 끝까지 올라오는 정숙한 푸른 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나 착 달라붙어 실루엣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그녀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린 드레스였다.
딱 적당했다. 선량한 자의 눈에는 고상한 차림새로 보일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는 후자일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데 마레 여백작 드셨습니다!”
왕실 시종이 큰 소리로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들라 하라.”
시종은 문을 열어 그녀를 안쪽 방향으로 입장시켰다.
호화로운 집무실이었다. 레오 3세는 고개를 숙인 채 책상 위의 서류 뭉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국왕이 자신을 쳐다보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누른 채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레오 3세는 돋보기가 없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태양을 뵙나이다.”
그녀의 듣기 좋은 중저음이 방을 울리고 나서야, 레오 3세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왕의 눈길이 그녀의 실루엣을 훑는 것을 보고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레오 3세는 짐짓 위엄있게 말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흐드러진 작약꽃 같은 미소를 생각하며 자기도 한번 상큼하게 웃어 볼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본인에게 어울릴 것 같지는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레오 3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영명하신 국왕 폐하께서는 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토끼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내가 아는 것은 데 마레 여백작이 랑부예 구휼원의 일로 나에게 알현을 청했다는 것뿐이네. 말해 보게. 무슨 일로 왔는지.”
아리아드네는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내가 굳이 체자레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서 굽신굽신하기를 바라는 거군, 이 망할 영감탱이.’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잊지 않은 채, 레오 3세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제 불민한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대신하여 구명을 청하러 왔나이다.”
“영애⋯⋯. 아니, 여백작도 공작이 약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모양이로군?”
심통이 제대로 난 모양이었다. 쪼잔하기 짝이 없는 새끼.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혼처이온데 제가 어찌 불만을 표할 수 있겠습니까?”
레오 3세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영애⋯⋯. 아니, 여백작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네. 내가 내린 혼처라 불만이 없다면 내가 도로 거두어가도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아리아드네의 웃는 낯에 최초로 균열이 생겼다.
그녀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수습해 매끄러운 대답을 건넸다.
“일단 한 번 인연을 맺었는데 어찌 그리 쉽게 보내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약혼녀의 의무라고 사료됩니다.”
“그새 정이 붙었나 보군.”
국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재차 물었다.
“역시 젊은 게 좋은 건가? 잘생긴 얼굴, 싱싱한 피부? 응?”
역시 국왕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노망이 나는 것이 틀림없다.
10년에 한 번씩은 잡아다가 성지순례라도 보내거나 빈민가에서 구걸을 시켜 봐야 한다.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의 망발에 넘어가지 않고 낭랑하게 모범 답안을 읊었다.
“어찌 그리 삿된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겠습니까? 성품과 인덕에 반한 거지요.”
레오 3세는 피식 웃었다.
“그 아이는 내 아들이지만 반반한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이상한 데서 발휘되는 객관성이었다.
“성품과 인덕이라니 농담이 심하네, 여백작.”
아리아드네는 흔들리지 않고 되받았다.
“제 약혼남인데 장점을 샅샅이 찾아 보듬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
“하하하하. 좋은 여잘세. 좋은 혼처야.”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지만 아마 덧붙이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내가 놓친’일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존경하옵는 국왕 폐하.”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피사노 공작이 생각이 짧고 성품이 강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뒤끝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오 3세의 얼굴 근육이 살짝 풀어졌다.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의 험담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가택연금을 풀어주시면 제가 데리고 찾아와 국왕 폐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 시키겠습니다.”
체자레는 사실 현재 가택연금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도망치거나 왕궁에 올 수 있었지만 레오 3세가 그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호소했다.
“다시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지 않고 얌전히 살도록 잘 타이르겠으니, 한 번만 자비를 베푸셔서 너그러이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리아드네가 상체를 숙인 채 고개마저 조아리자 상체의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래서 깊이 파인 옷을 입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린 채 3초를 기다렸다.
‘제발⋯⋯. 좋게 좋게 갑시다.’
그러나 고심했던 보람도 없이, 레오 3세는 차갑게 대답했다.
“일 없네. 여백작은 헛심 그만 쓰시게.”
아리아드네는 그 단호함에 놀라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튕기거나, 배짱을 부릴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단칼에 자를 줄은 몰랐다.
아리아드네가 올려다본 레오 3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피사노 공작은 애초에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도대체 그 어떤 아들이 제 아비의 목젖에 칼을 들이댄단 말이냐!”
그의 물빛 눈에 분노가 흘렀다.
“그것도 한낱 계집에 미쳐서! 국왕의 목에!”
레오 3세는 흉흉한 기세로 외쳤다.
“왕궁에서 칼붙이를 든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다! 피사노 공작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야! 당장 목숨을 거둬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라!”
당장 군사를 보내 공개적으로 연행하지 않고 자택 감금만 하는 것은 그나마 자비로운 처사라고 레오 3세는 굳게 믿었다.
물론 체자레에게 너그러움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제1 왕위계승권자가 국외에 있는데 제2 왕위계승권자를 투옥할 수가 없어서 택한 울며 겨자 먹기였지만, 그 사실은 레오 3세의 머릿속에 자신의 관용으로 이미 세탁이 끝난 상태로 입력되어 있었다.
레오 3세는 눈앞의 여인이 벌벌 떨며 물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의 말에 비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한낱 계집’에 미친 건 그 아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라?!”
레오 3세는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처럼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국왕 폐하께서도 여자에 눈이 돌아 무리수를 두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레오 3세는 쿵! 책상을 내리쳤다.
“오냐, 고분고분한 척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무엄한 것! 발칙한 것!”
“그 ‘발칙한 것’의 독대를 허락하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아리아드네는 단정했던 자세를 풀어 편안하게 다리를 꼬았다.
레오 3세의 눈길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드레스 안쪽을 훑었다. 아리아드네는 고소(苦笑)를 흘렸다.
“제 작위, 솔직히 왕비로 올리려고 주신 것 아닙니까. 성직자의 사생아는 국모가 되기에 부적합한 신분이니까요.”
“흠!”
“국왕 폐하께서는 저를 탐내고 계셨습니다. 부인하지 마십시오. 모양새가 더 추해질 뿐입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본인이 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지 말게, 데 마레 여백작!”
레오 3세는 분기탱천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는 못했다.
“내 그대를 국모로 올릴까 했었던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대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네가 가진 곡식 때문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자기합리화를 내뱉었다.
말하면서 점점 더 스스로가 설득되는 듯도 해서 그는 언성을 점차 높여갔다.
“자네가 국가에 대한 충의로 순순히 나라를 위한 재물을 바치지 않으니, 내 이를 국고에 귀속시킴과 동시에 여자로서의 지고의 영예를 내려 자네를 위로하려 했던 것일세!”
썩 마음에 드는 논리였지만, 눈앞의 새파란 것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저에 대한 위로라면 제 약혼자에 대한 처벌을 감해 주십시오.”
그녀는 레오 3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녹색 눈에서 광채가 흘렀다.
“자택 감금으로 끝날 거라면 기꺼이 수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망둥이는 집에서 좀 썩어봐야 해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보다도 더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리아드네는 의심거리를 모두 읊었다.
“루비나 공작 부인께서 왕궁 내에 돌아다니실 수 있는 구역이 제한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틀린지요?”
“궁 안의 사정은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곧 제 가족이 되실 분인데요. 아니 그렇습니까, 약혼을 명하신 저의 아버님?”
그녀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콘타리니 백작은 내부 회의에서 모두 제외되었고, 폐하께서는 피사노 공작을 총사령관 자리에서 파면하셨지요. 게다가, 피사노 영지에 임시 관리인을 보내셨다지요?”
모두 체자레의 가솔이 급하게 보고한 내용들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체자레 공작의 팔다리를 모두 잘라놓으셨습니다. 재기를 막으시려는 거지요. 게다가⋯⋯.”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피사노 영지에 관리인을 보내신 걸 보니 체자레 공작이 아주 긴 시간 동안 자리에 없을 것을 대비하시는 것 같더군요.”
아리아드네는 무겁게 내뱉었다.
“왕위계승권자가 귀국하고, 비앙카 공녀의 혼처가 안정적으로 정해지면, 피사노 공작의 처분은 어떻게 됩니까, 폐하?”
레오 3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아까, ‘약혼을 거두어 갈 수도 있을 것’의 연장 선상이었다.
레오 3세는 체자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대로 체자레를 죽여 버릴 심산이다.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
잠시 말이 없던 레오 3세는 선언했다.
“나가라.”
늙은 국왕은 분노가 서린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이성적인 분노였다.
국왕으로서의 위엄이 훼손된 데에 대한 분노이자, 자기가 점찍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한 수컷의 분노였다.
“그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마지막 체면으로 붙들고 있는 듯했다.
수가 틀렸다, 라고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모와 재기로 녹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레오 3세는 자기가 체자레를 버리고 국왕의 후처로 들어가겠으니 제발 그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해야 청을 들어줄까 말까 했던 상태였다.
생각보다 훨씬 꼬여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세를 바로 했다. 국왕이 시킨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사벨라 흉내라니, 내가 무슨.’
아리아드네는 오늘의 전략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제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협박이 답이었다.
- 바스락.
그녀의 품속에서, 양피지 뭉치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것을 레오 3세의 책상 위에 던졌다.
“네 수작질엔 넘어가지 않아. 난 보지 않을 것이다.”
“읽지 않으실 거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사교계에 이야기가 쫙 퍼졌을 때 들으시면 되지요.”
“이건 또 무슨 망발이냐?”
아리아드네는 한만하게 답했다.
“약혼남이 죽어버리면 전 결혼도 못 해보고 독수공방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약혼 상태로만 있다가 결혼도 못 해본 건 한 번으로 족하고, 두 번은 사양이라고.
꼭 체자레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약혼자가 비밀리에 자택에서 독살당하면 그래도 사정이 낫지만, 국왕에 대한 불충이니, 쿠데타니 하면서 끌려가서 사형이라도 당하면 제 평판은 뭐가 되겠습니까?”
아리아드네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전에 자력구제 해야죠. 폐하께서 오늘 체자레 공작의 구명을 약속해주시지 않으면 전 내일 당장 온 산 카를로에 저 편지뭉치를 뿌릴 겁니다.”
레오 3세는 그제야 편지를 집어 들었다.